중국작가 츠쯔젠의 대표작 <어얼구나강의 오른쪽>(2005)을 강의에서 읽었다. 중단편 대상의 루쉰상을 세 차례 수상한 작가이니(유일하다는 것 같다) 단편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장편소설의 성취에 더 관심이 있는데 마오둔상(2008년) 수상작으로서 <어얼구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다.

˝나는 어원커의 여인이다. 우리 부족 마지막 추장의 여인이다.˝라는 소개로 시작하는 긴 이야기가 아래 인용문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어원커족의 한 씨족/부족(우리렁)의 거의 한세기에 걸친 역사의 체험자이자 목격자이다. 마르케스 소설의 ‘마마 그란데‘ 같은 여성(<백녀의 고독>에서의 우르슬라). 어원커족은 순록을 치는 산악유목민으로 이들이 사는 지역이 어얼구나강의 오른쪽(우안)이다(이 강의 좌안은 러시아 땅으로, 어원커족, 러시아어로는 에벤키족이 어얼구나강 양안에 산다. 어얼구나강의 러시아어 이름은 아르군강).

지리적/공간적으로는 소수민족 서사에 해당하지만 어원커족 이야기는 역사적/시간적으로 농업혁명(정주화) 이전 단계의 삶을 재현하는 의미가 있다. 국가라는 정치공동체, 상업시장 혹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등장하기 이전 단계의 세계. 가라타니 고진의 용어로는 호수적 교환양식이 지배적이며, 신앙면에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애니미즘과 대립하기 이전 단계의 샤머니즘, 성경에서라면 에덴 신화 이전의 세계)이 공존하는 세계다.

소수민족문학으로서 <어얼구나>는 정착민으로 편입되면서 사라져가는 소수민족의 민족지를 대신한다. 그것이 이 소설의 특수성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어얼구나>는 보편적인 인류사의 첫 단계를 재현한다. 그것은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어얼구나>를 계기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은 언제부터 구분(분리) 되었는가? 소수민족문학 범주 바깥에서 다시 읽게 되면, <어얼구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은폐하고 있는 본래적 삶의 모습을 엿보게 해준다.

달이 떴다. 하지만 둥그렇지 않다. 반달이다. 백옥처럼 휘황하다. 몸을 구부리고 있는 자태가 마치 물을 마시는 새끼 사슴 같다. 달빛 아래 산 바깥으로 난 길을 나는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안차오얼이 다가와 나와 함께 그길을 바라본다. 그 길에 트럭이 남겨놓은 바퀴자국이 있다. 내 눈에 바퀴자국은 상처자국 같다. 갑자기 그 길 끝에서 흐릿하게 잿빛 그림자가 나타난다. 곧 순록의 은은한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그 그림자가 우리 야영지와 점점 가까워진다. 놀란 안차오얼이 소리를 지른다.
"아테, 하모니카가 돌아왔어요!"
감히 내 눈을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방울소리가 점점 청아하게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본다. 달은 나를 향해 달려오는 흰 순록 같다.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오는 순록을 바라본다. 순록은 지상에 떨어진 반달 같다. 내 눈에서 눈물을 흐른다. 나는 더 이상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을 구분할 수 없다. - P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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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로쟈가 생각하는 한국문학의 과제

5년 전 인터뷰다. 아직 코로나가 한창이었던가. 지나고 나면 모든 게 흐릿해진다. 아무려나 한국문학 읽기는 성과물을 내놓아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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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3월 24일(화)로 예정된 서울문학기행에 대한 준비강의를 두 차례 진행한다(화요일 오전 10시10분-12시10분. 비대면). 주요 작가는 윤동주, 박태원, 이상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유료강의이며, 문의 및 신청은 010-3274-4327 이정은).



서울문학기행 준비강의


1강 3월 10일_ 윤동주의 삶과 문학
















2강 3월 17일_ 박태원의 경성, 이상의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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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2026-02-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번역된 테리 이글턴 ‘모더니즘‘ 한국어판 서문에 박태원 이상 임화에 대한 언급이 있더군요.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를 강의에서 마저 읽었다. 대학 1학년때 김붕구 선생 번역본(문예출판사)으로 읽은 뒤 정명환 선생 번역본(민음사판, 1998)으로 두어번 읽은 듯싶다(아무래도 한주 강의에서는 소화하기 어렵고 두 주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4장 ‘1947년의 작가의 상황‘을 제쳐놓으면 핵심은 3장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이다. 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2장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는 3장의 질문을 다루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다.

질문의 형식 때문에 흔히 앙가주망 문학론이 작가의 역할과 책임만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르트르가 작가의 자유만큼 강조하는 것이 독자의 자유이다(독자의 앙가주망이 빠진다면 작가는 헛바퀴만 돌리는 게 된다). 즉 문학적 소통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고매한 협약‘이며 문학은 둘의 공동 창조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문학은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명제가 도출되며 유효성을 획득한다(‘주관성‘은 김붕구 번역본에서 ‘주체성‘으로 옮겨졌다). 그에 답하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지금 그런 문학을 갖고 있는가, 혹은 그런 문학을 갖고자 하는가?

그러나 문학이 자유의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두 양상을 결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의 글을 읽게 될 독자 역시 모든 것을 변혁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없어질 뿐 아니라, 모든 독재가 철폐되고 사회 기구가 늘 새로워져야 하며, 질서가 굳어지기 시작하면 부단히 해체되어야 하는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사회의 주관성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은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을 지양(止揚)할 것이다. 하기야 문학이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가 그의 독자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독자가 무조건적 (無條件的)인 결심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각을 하고 자기를 비판하고 변신해 가는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작품은 행동의 한 본질적 조건, 즉 반성적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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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마지막 대작 ‘풍요의 바다‘의 첫권 <봄눈>을 읽었다. <금각사>와 함께 일본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다는 작품(대외적으로도 미시마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전 일본문학의 간판이었다. 다니자키와 가와바타보다도 더 많이 번역돼 더 많이 팔렸다). 다이쇼 초기를 시대배경으로 후작 집안의 미남 후계자 기요아키와 백작의 딸 사토코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다(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로망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니자키의 ‘소설‘ <세설>과의 차이다).

사토코의 구애적 제스처를 무시하던 기요아키가 그녀가 황족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자(천황의 칙허까지 떨어진다) 갑자기 ‘급발진‘하는 이야기. 이유는 절대적 불가능성에 매혹돼서다. 성장기를 같이 보낸 사토코가 한순간 금지된 여자가 되자 구애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기요아키는 비로소 사토코를 열렬히 사랑한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요아키는 열세살 때 메이지 천황 행차 행사에서 비전하의 옷자락을 들어주는 시동 역할을 하다가 우아한 아름다움에 매혹됐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의 매혹.

타협적인 세계의 서사로서의 소설은 이러한 매혹을 감당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봄눈>이 소설을 초과하는 이유다. ‘풍요의 바다‘ 4부작(결과적으론 미시마의 긴 유서다)을 완결지으면 미시마 자신이 한갓 소설가를 초과하게 된다. 그 자신이 절대적 불가능에 매혹된 또다른 기요아키, 아니 원본 기요아키였다.

기요아키에게 환희를 안긴 것은 불가능이라는 관념이었다. 절대적인 불가능. 사토코와 자신을 잇는 실이 예리한 날붙이로 끊어 버린 거문고의 줄처럼, 솟구치는 단현의 비명을지르며 칙허라는 빛나는 칼에 베여 버린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 이후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우유부단함 속에서 비밀스레 꿈꾸고 남몰래 바라 온 사태는 이런 것이었다. 옷자락을 들며 올려다본 봄의 흰 잔설 같던 비전하의 목덜미, 우뚝 솟은 채 접근을 거부하던 비길 데 없는 그 아름다움은 그가 품은 꿈의 발원지, 그가 지닌 바람의 성취를 똑똑히 예언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뒤틀린 자신의 감정에 변함없이 충실해 온 기요아키가 스스로 초래한 사태였다.
그러나 이 환희는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음침하고 위험하며 무서운 환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단 하나 진실한 것, 그것은 방향도 귀결도 없는
‘감정‘만을 위해 살아가는 일… 그런 삶의 방식이 마침내 그를 소용돌이치는 환희의 어두운 못 앞에 데려다 놓았다면, 남은 일은 그 못에 몸을 던지는 것뿐일 터였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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