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를 강의에서 마저 읽었다. 대학 1학년때 김붕구 선생 번역본(문예출판사)으로 읽은 뒤 정명환 선생 번역본(민음사판, 1998)으로 두어번 읽은 듯싶다(아무래도 한주 강의에서는 소화하기 어렵고 두 주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4장 ‘1947년의 작가의 상황‘을 제쳐놓으면 핵심은 3장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이다. 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2장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는 3장의 질문을 다루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다.
질문의 형식 때문에 흔히 앙가주망 문학론이 작가의 역할과 책임만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르트르가 작가의 자유만큼 강조하는 것이 독자의 자유이다(독자의 앙가주망이 빠진다면 작가는 헛바퀴만 돌리는 게 된다). 즉 문학적 소통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고매한 협약‘이며 문학은 둘의 공동 창조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문학은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명제가 도출되며 유효성을 획득한다(‘주관성‘은 김붕구 번역본에서 ‘주체성‘으로 옮겨졌다). 그에 답하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지금 그런 문학을 갖고 있는가, 혹은 그런 문학을 갖고자 하는가?

그러나 문학이 자유의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두 양상을 결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의 글을 읽게 될 독자 역시 모든 것을 변혁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없어질 뿐 아니라, 모든 독재가 철폐되고 사회 기구가 늘 새로워져야 하며, 질서가 굳어지기 시작하면 부단히 해체되어야 하는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사회의 주관성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은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을 지양(止揚)할 것이다. 하기야 문학이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가 그의 독자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독자가 무조건적 (無條件的)인 결심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각을 하고 자기를 비판하고 변신해 가는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작품은 행동의 한 본질적 조건, 즉 반성적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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