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는 겨울학기 강의가 시작된다. 구면의 저자와 책도 있지만 새롭게 만나게 되는 저자와 책들도 있다. 모든 새로운 만남에는 기대와 설렘이 수반된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렇다. 정치철학 강의에서 다룰 스티븐 스미스의 <정치철학>(문학동네)에서 최선의 체제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한 여행의 초대장을 옮겨놓는다. 1장(왜 정치철학인가?)의 마지막 대목이다...

정치철학은 현상태와 되어야 할 상태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불확정성의 지대에존재하며, 거기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철학은 완벽하지 않은 사회, 해석은 물론이고 부득이하게 정치적 비판을 필요로 하는 세계를 전제로 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철학은 언제나 잠재적으로는 파괴적인 작업이다. 최선의 체제에 관한 지식을 찾아 여행을 시작하는 독자 여러분은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아마도 전과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충성심과 헌신성을 가지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여행에는 어느 정도 보상이 있다. 그리스인에게는 이런 탐색, 최고의 체제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이 욕망을 일컫는 근사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에로스eros. 즉 사랑이다. 철학은 에로틱한 행동으로 이해되었다. 정치철학 공부는 사랑에 바치는 가장 고귀한 경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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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사회를 사고할 때 확인해 두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 근대적, 도시적 사고방식으로서 개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가장 원시적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부족들로 다가갈수록 이 개인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몇 배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누이트, 부시맨, 인도네시아나 나이지리아의 농부는가 사용하는 연장만 지니고 있다면 홀로 남겨져도 상당한 시간 동안 생존할 수가 있다. 그들은 경작지나 사냥감과 멀지 않은 거리에 살고 있기에 스스로의 삶을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공동체들은 심지어 무한히 오랫동안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들 압도적인 다수는 한번도 곡식을 재배해본 적도, 사냥을 해본 적도, 가축을 키워본 적도, 밀가루를 빻아본 적도 없으며, 아마도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든가 자기 집을 짓는다든가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절망적일 만큼 훈련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자기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가 조금만 고장이 나도 우리들 공동체 내에서 자동차 수리나 수도관 수리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불러야 하는 판이다. 실로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지만, 아마도 어떤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그 평균적 거주자들이 남의 도움 없이 홀로 생존하는 능력은 확실하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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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관계 체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방식이 고독의 폭증 원인이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국가는 사회관계 체제가 지닌 통합력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이 체제에 계속해서 직접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사회관계 체제인 커플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켰다. 고독은 이 개입으로 생긴 결과라기보다는 이개입이 이루어진 방식으로 생긴 결과다. 국가는 관계를 늘리고 강화하는 대신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놓으려 했다. 개인을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이로써 개인을 구원해주는 제삼자인 동시에, 사회관계를 해치거나 분열시키는 매개자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강화된 어머니-자녀 관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관계는 무언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더 위험한 일이라는 듯 말이다.
 요컨대 고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가장 큰 이유는, 과거에 인간관계를 담당하던 사회 기관을 희생시키고 국가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국가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는 위대한 존재이자,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는 온갖 억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해주는 존재로 나선다. 개인을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부터 구원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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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의 사회학 버전 같다...

시카고대학교의 한 연구 집단은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미국인의 40퍼센트)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빨리 죽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고독은 건강 면에서 담배만큼 중대하고 비만보다 더 심각한 위험인 것이다. 고독은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 관절염이나 당뇨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염증을 일으킨다. 고독은 숨은 쉬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우울증‘의 원인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우울증을 겪는 프랑스인의 비율은 21퍼센트로, 미국(19.2퍼센트)을 앞서며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고독은 자살률과도 관련이 있다.
프랑스인 10만 명 중 14.7명이 자살한다(유럽 평균은 10만 명 중10.2명이다). 한편 고독은 자살하고 싶은 욕구에도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에서 매년 22만 명이 자살을 기도한다. 더욱이 ‘지연된 자살‘의 두 형태, 즉 테러와 대량 살상 행위 - 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보이는 행위 -까지 고려하면, 이미 어둡기 그지없는 상황은 더욱 암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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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일찍 귀가하여 한숨 돌리는 차에 책장에서 ‘김현 문학전집‘의 <책읽기의 괴로움/살아있는 시들>(문학과지성사)을 빼든다. 같이 묶인 <살아있는 시들>(전2권, 홍성사)은 안 갖고 있지만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은 애장본이다. 종로에 영풍문고가 개장할 때, 다른 서점들에서 구하지 못하던 이 책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30년 전인가? 아무튼 그래서 내게는 ‘수프‘ 같은 책이다.

1984년에 나온 이 비평집에는 ‘김춘수에 대한 두 개의 글‘과 ‘김수영에 관한 두 개의 글‘이 포함돼 있다. 새삼 알게 된 건 김현 비평이 김춘수의 시와 궁합이 더 잘 맞는다는 것이다. ‘풀‘에 대한 자세한 분석(‘웃음의 체험‘)만 하더라도 뭔가 석연치가 않았었는데 지금이라면 그 이유를 좀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인용문은 그의 김수영론(‘반성과 야유‘)의 마지막 단락으로 김수영 시에 대한 이해가 왜 어려운가에 대한 해명으로도 읽힌다. 어제 김수영의 번역전집도 나와야 한다고 적었는데 김현의 앞선 주장을 거든 데 지나지 않다.

김수영은 1966년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라고 말한 바있다. 나는 차라리 그의 비밀의 상당 부분은 그가 번역을 했건 안 했건 그가 읽은 것 속에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아주 필요하고 긴요한 일이다. 그 작업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산문에 나오는 책·사람 이름의 목록이라도 만들고, 어떻게 그가 그 책이나 사람을 읽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가 자유롭게 접근한 일본어·영어로 씌어진 책에 나는 그만큼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한다. 오래 전에 생트 뵈브는 브왈로를 평하면서, 그는 핀다로스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지만 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쓴 바 있다. 내가 그런 평가의 대상이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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