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여느 때처럼 조간신문을 읽었다. 수요일인지라 한국일보를 사들었는데 최근의 '인문학 사태'와 관련하여 강준만, 전봉관 두 교수의 칼럼이 눈길을 끌었다. 이 시사적인 이슈에 대한 나의 생각과 닮은 점이 많아서 옮겨놓도록 한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국일보(06. 09. 27) 오락공화국

한국의 40대 남성 사망률은 세계 최고다. 한국인의 스트레스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인의 자살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대학입시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해 매년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성적 문제로 자살을 한다. 한국인의 행복도는 세계 중하위권 수준이다.

● 전쟁 같은 한국인의 삶
이런 기록만 살펴보자면 한국은 지옥에 근접한 나라로 보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옥과 천국을 수시로 왔다갔다 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비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은 세계 50대 교회 중 제1위를 포함하여 23개를 갖고 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겐 음주ㆍ섹스ㆍ도박ㆍ스포츠가 있다. 음주ㆍ섹스ㆍ도박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포츠는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스포츠 국가주의에 열광하는 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더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오락이 있다. 영화는 히트만 쳤다 하면 천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인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비롯한 오락프로그램은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되 인터넷이 주로 오락용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이다. 한국은 게임 강국이며, 비보이 문화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떠올랐다. 오락 기능이 강한 각종 방(房) 문화의 발달도 세계 1위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한국은 '오락 공화국'이다! 냉소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자는 뜻이다. 한류 열풍은 '오락 공화국'의 역량을 보여준 사건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에서도,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도, 오락문화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내내 번성했다. 한국인이야말로 이른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오락 공화국'은 한국인의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땅 좁고 자원 없는 나라가 살 길은 근면과 경쟁 뿐이다. 한국은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선진국 되는 걸 국가종교로 삼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택한 게 바로 '삶의 전쟁화'였다. 전쟁 하듯이 산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든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오락이었다(*그러니까 각종의 오락은 한국인들의 지옥 같은 삶을 지탱해주는 '마약'이다).

한국인들은 정치를 욕하지만, 정치야말로 고급 오락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욕하면서 즐기는 오락, 이건 오락의 최고봉이다. 특정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이른바 '빠' 문화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정치에 대해 말이 많지만 매우 재미있는 범국민 오락을 제공한다는 점에선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오락 공화국'에선 삶의 속도가 빠르다. 오락은 유행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싫증나게 만드는 건 죄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런 속도전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도의 폭력에 치이는 분야가 생겨났다.

인문학도 그런 분야 중 하나이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하고 나섰지만, 인문학만 위기인 건 아니다. 오락적 가치가 사회의 전 국면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오락적 효용이 떨어지는 건 모두 다 위기다. 신문을 보라.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대학교수들이 의외로 많다.

● 오락 외에는 대안 없나
문화관광부가 이름을 문화체육관광부로 바꾼다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세계 10대 레저스포츠 선진국 진입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라나. 한국은 이미 세계 1위의 '오락 공화국'인데, '세계 10위'를 목표로 삼다니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오락 공화국'은 한국적 삶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택한 대안이었겠지만, 이를 계속 밀어붙일 것인지 본격적인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에 앞서 '오락 공화국'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더라면 더욱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나의 아쉬움이기도 하다).(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한국일보(06. 09. 27)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인문학을 전공한 노교수는 30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똑같은 과목을 강의했다. 30년을 사용하다보니 강의노트가 너덜너덜 해어졌다. 대학원생 조교는 노교수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타이핑해 컴퓨터 문서로 정리하면서 이렇게 권했다. "선생님, 이참에 내용도 한번 정리하시죠?" 노교수는 무례한 제자를 한심한 듯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

● '인문학 위기 선언'을 보고
필자가 다니던 대학원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실화라고 믿는 대학원생이 더 많았다. '인문학 위기 선언'을 접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전설이었다.

나는 인문학 위기 선언이 그동안 학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단행하지 않은 것, 학문 후속세대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것, 사회의 통합은커녕 분열에 앞장선 것 등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될 줄 알았다.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보낸 10여년 동안, 내가 경험한 인문학의 위기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과정이 끝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인문학자가 처한 경제적 곤란은 위기가 될 수 없었다. 같은 국문학자끼리도 전공이 고전문학이냐 현대문학이냐에 따라 서로의 논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므로, 인간성 회복이니 사회적 통합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가 인문학의 존립 근거가 될 수도 없었다. 논문과 학술서는 전공자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엽적이고 난해했으므로, 대중의 무관심 역시 위기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젊음을 인문학에 바치면서 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생이 열심히 연구해 제출한 논문을 교수들이 대충 읽고 깎아내릴 때, 학술지 논문심사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때 절망했고, 신진학자의 새로운 견해가 학계의 낡은 기준으로 난도질당할 때, 후배들이 '형처럼, 교수들처럼 살기 싫다'고 하나둘씩 대학원을 떠날 때 절망했다. 무엇보다도 인문학자들이 '나태'를 '영혼의 자유'로 분식(粉飾)하려 들 때 절망했다.

● 해어진 강의노트부터 찢어라
아무리 '남 탓'이 우리 시대의 '정신'이라지만,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청춘을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바치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이 아직은 대학원에 남아있다. 사회는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데, 인문학자는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독백만 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인문대 대학원에서 내쫓는 것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이 녀석아! 진리가 변하냐?"는 오만과 만용, 시대착오와 자가당착이다. 해어진 강의 노트는 찢어버려야 한다. 진리가 변하지는 않지만, 해어진 강의노트에 적힌 것은 진리가 아니다. 설령 진리라 하더라도,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인문학자들마저 남 탓에 내몰리면, 이 나라는 정말로 희망이 없어진다.(전봉관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절충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의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오락공화국'의 문제를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하며 자신의 해어진 강의노트를 찢어버려야 한다(내 강의노트는 어디에 처박혀 있나?). 그러니까 문제는 인문학 일반의 위기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인문학이고, 인문학자들 자신의 인문학이다(혹 무늬만 인문학은 아닌가?). 그리고 사실 이러한 반성이야말로 (몰염치한 정치와 무반성적인 과학에 대하여) 인문학의 장기이자 특권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네 주제를 알라!" 

06.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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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27 15:36   좋아요 0 | URL
아, 서늘합니다. 칼럼도, 님의 결론도.

biosculp 2006-09-27 17:00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 애기는 10년도 더된 애기 아닌가요.
인문학의 위기라는것이 더 나아가면 문제 해결능력의 위기는 아닐런지.
10전부터 나온 애기에 무슨 뭘 했다는 애기는 없고 선언과 돈 지원해주세요.이게 전부.
국민들은 능력있는 진보세력을 원한다는 신문보도가 있던데 능력있는 인문학자들이 필요한것은 아닌지. 여기서 능력은 돈버는것은 아닙니다.

로쟈 2006-09-27 17:03   좋아요 0 | URL
웰-다잉도 웰-빙만큼 의미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대세라면. 정현종 시인의 시에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게 있는데, 인문학에 대해 제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슬픔입니다. '슬픔의 종언'을 굳이 말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구요. 왜? 우리는 '오락공화국'에 사니까요...

페일레스 2006-09-27 17:34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 종사자들의 위기' 같은데요. 탁석산씨가 100분 토론에서 몇 마디 했더군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 건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페이퍼로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 2006-09-28 08:42   좋아요 0 | URL
낡은 강의 노트부터 찢어라. 정말 와 닿는 말이네요. 스스로 구원하지 않으려 한다면 남이 구원에 나서줄 수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