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기사이긴 한데,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얼마전 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그의 대담을 여럿 읽어본 나로선 새로운 내용과 접할 수 없었지만, '압축'의 의미는 있어 보인다.

국민일보(06. 07. 25) “우리사회 교양없는 걸 부끄러워 안해” 유종호 문학평론가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71) 전 연세대 교수가 최근 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 영문학자이면서 한국문학을 편향 없이 공정하게 논평해온 것으로 정평 있는 유 교수의 평생 공적을 평가한 상이다. 유 교수는 올해 46년에 걸친 강단 생활을 접었다. 1959년 청주사범을 시작으로 이화여대에서 20년을 보내고 1996년부터 10년간 재직한 연세대에서 문과대 특임교수직을 마지막으로 지난 2월 퇴임식을 가진 것(*지난 2월에 이를 기념하여 <유종호 깊이 읽기>가 출간됐다). 신망받는 심판이 퇴장함으로써 문단이 얼마쯤 쓸쓸해진 것도 사실이다. 수상 소식을 계기로 근황을 물었다.

 

 

 



-예술원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축하합니다. 교단에서 내려온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아주 편하게,아주 즐겁게 소일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니까 서운하지 않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홀가분하고 한가해서 진작 그만둘 것을 괜히 남보다 5년이나 더 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면서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한 책들을 골라 읽고 있다며 요즘 듣고 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녹음된 영어 오디오북을 보여주었다. 또 책을 고를 때는 페이퍼백 대신 비싸더라도 양장본을 사야 오래 볼 수 있다고 했다. 매일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운동이며, 외출은 가끔 있는 친구들 모임과 문학상 심사 모임에 나가는 정도라고.

-학교에서는 영문학자로, 대학 밖에서는 한국문학의 명 평론가로 활약했습니다. 어느 쪽에 본업이라는 의식이 있었는지요.

광복 직후 3년간 활발한 비평활동을 했던 김동석이라는 평론가와 시인 정지용을 어려서 좋아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영문과 출신입니다. 이들처럼 글을 잘 쓰려면 영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특히 ‘문학을 하기 위해 영문학을 택했다’는 김동석의 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별개로 의식하지는 않았고 외국문학에서 무언가를 얻어서 한국문학에 기여하자는 생각이었지요.”

-김동석(1913∼?)은 경성제대 영문과 출신으로 1947년부터 1950년 월북할 때까지 좌우 문단간 논쟁을 주도하며, 유 교수의 표현으로는 ‘사납게’ 비평활동을 했다.

-계간지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으로 장기간 활동했던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겠군요.

“한국문학이 세계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외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또 사회와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잡지 편집에 임했습니다. 1976년 창간 때부터 1985년까지 한 10년간은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 함께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그 뒤에는 이남호 고려대 교수가 책임을 이어 받았지요.”

-당시는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같은 계간지의 전성시대였는데 그 사이에서 입지는 어떠했습니까.

“창비와 문지는 동인들이 동시에 경영자였지만 세계의 문학은 민음사라는 출판사가 경영주체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요. 독자와 부수 면에서는 두 잡지에는 못 미쳤지만 함께 잘 됐던 것으로 압니다.”

-유 교수는 몇몇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요즘도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요즘 작가들의 단편집은 2000∼3000부 판매가 고작이라고 전한다.

-한국문학의 부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1980년대에 번창했던 리얼리즘 문학이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는 스스로 열기를 상실했고 독자들의 관심도 잃었지요. 그 시대의 문학이 사회운동의 기운과 맞물려서 독자의 호응은 받았지만 문학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뒤에 젊은 사람들의 생활과 스타일을 드러내는 감각파 문학이 나오고 있는데 깊이가 별로 없지요.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저하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도 잘 쓴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있게 마련이고 문제는 무엇을 쓰든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지고 보면 문학작품이 안 팔린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은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지요.”

-요즘 소설 시장은 일본소설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는 한류(韓流)지만 소설은 일류(日流)인 셈인데요.

“일본문학도 과거에 비해 취향이 떨어졌습니다. 소설도 오에 겐자부로를 마지막으로 깊이가 사라졌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는 TV 영화 스포츠와 경쟁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문학이 위엄을 잃은 것이지요.”(*유종호 교수의 하루키 문학 비판에 대해서는 이전에 소개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작가는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과거 교수 문인 기자 등 소수가 지면을 독점하던 체제가 붕괴된 뒤로 작가들의 위상 저하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톨스토이나 토마스 만 시대의 독자들은 이들 작가에게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진지한 고민의 해답이나 암시를 구했습니다. 작가는 동시에 삶의 교사였던 것이지요. 일본에서도 나쓰메 소세키 같은 작가가 그런 경우였고요. 그러나 전자민주주의 시대가 되면서 모든 계층이 평등해지고 나는 나대로 산다는 생각이 팽배해졌습니다. 지금의 작가는 엘리트도 아니고 사회도 작가에게 엘리트가 되기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대중사회는 엘리트에 거부감이 있어요.”(*근대 문학의 종언은 문학-엘리트의 종언이기도 하다.)

-엘리트에의 거부감과 함께 반(反) 교양현상도 두드러집니다. 특히 정치권에서 심한 것 같고요.

“과거에도 정치인들이 교양이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교양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아요. 기자회견에서도 막말을 하잖아요. 외국에 나가본 일이 없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까지 있는 세상입니다.”

-요즘 한국영화 중에는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영화가 적지 않습니다. 조폭과 형사들만 욕을 하는 게 아니라 점잖은 검사도 상욕을 합니다.

“점잖은 척 해봐야 별 수 있느냐라는 거지요. 권위의 붕괴를 노리는 겁니다. 심한 욕 다음에는 폭력이 따릅니다. 욕설이 폭력의 예고 지표가 되는 거지요. 미국영화를 보니 대통령의 부인도 상욕을 하더군요. 욕설과 폭력이 창궐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칼 포퍼 같은 철학자는 큰 폭력의 근원은 TV라며 TV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TV를 통해 폭력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어린이들까지 감염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회는 노인들의 걱정을 흘려듣고 있다. 늙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며 투표장에 나오지 말라고 한 정치인도 있는 현실이다.

-노년의 지혜를 경청해야 할 텐데요.

“미국 방송의 뉴스 앵커는 노인이 많습니다. 한 사람이 30년 이상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방송은 40대가 한계입니다. 젊음을 숭배하는 현상이지요. 사회 변화의 규모와 속도가 크고 빠른 근대 이후에 노인들은 과거 농경사회에서 누렸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권위 상실은 앞으로도 가속될 것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청해야 할 노년의 지혜가 있다면 젊은이들이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 교수가 재작년 펴낸 <나의 해방 전후 1940∼1949>은 당시의 경험과 지식을 과장된 해석 없이 전하고 있다. 일제 시대 국민학교 때부터 광복을 거쳐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의 기록이다. 우리 사회에 문필가가 대필한 정치가나 기업인의 자서전은 많지만 지식인의 회고록은 희귀하다.

“자기가 산 시대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쓴 책입니다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썼다고 지적하는 기자도 있어 놀랐습니다. 사회사란 원래 미시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쌓여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유 교수는 마지막으로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 국내외 지식인들이 잘못된 인식으로 일반인을 오도한 것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에 관해 충고했다.

“우리 사회가 늘 한쪽으로 편향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파가 승할 때는 좌파는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좌쪽으로 승한 세상이지요. 이런 풍토에서는 정보와 지식의 편식이 일어나기 쉬운데, 명망가의 말이라고 해서 곧이 듣지 말고 검토하고 확인하는 지적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문일 편집위원)

06.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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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17 14:57   좋아요 0 | URL
'작가=엘리트(지식인)', 너무도 그리운 고어(사어)가 되어버린 듯... 요즘 작가가 이런 생각 갖고 있으면 '너나 잘하세요' 같은 소리나 듣겠죠? ;;;--

로쟈 2006-08-17 15:06   좋아요 0 | URL
실상은 '작가'라는 말 자체에 그런 함축이 들어있는 것이죠. 그걸 빼면 '글쟁이'가 남는 것이고. 혹은 '이야기꾼'...

기인 2006-08-18 03:34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항상 유종호 선생님이랑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든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았는데, '작가=엘리트'가 붕괴되었다는 것이 생각할 꺼리가 있어서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