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노마드’, ‘노마디즘’이란 말이 우리 사회의 한 유행어가 되었다. 번역하자면, ‘유목’, ‘유목주의’ 정도가 될 이 단어들이 유행을 타게 된 데에는 대략 두 가지 계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세계자본주의 단계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대략 1990년대부터 다국적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하의 ‘보편적 삶의 조건’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이 다국적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이 시대에 군림하고 있다.

   

 

 

 

아예 인류사를 유목/정주라는 개념틀로 재기술함으로써 이러한 현 시대적 조건을 ‘오래된 미래’로 사유하려는 경향도 대두한바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는 그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만하다. ‘잡노마드’니 ‘디지털 노마드’니 하는 신조어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생하는 것들인데, 이러한 경향성을 ‘경제적 노마디즘’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제적 노마디즘의 우상은 칭기스칸인바, 오늘날 그 정신적 후예들은 전세계를 무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본의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애쓴다. 새로운 권력계급으로서의 ‘하이퍼노마드’이든, 새로운 하층민으로서의 ‘인프라노마드’이든.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노마디즘에 앞서서 反파시즘적 삶의 양식을 기치로 내걸었던 또 다른 노마디즘도 있었으니 그것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돌로지, 곧 노마드의 철학이다. 국내에서는 이진경의 저작 <노마디즘>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 철학적 노마디즘은, 그 주된 전거가 되는 <천 개의 고원>이 1980년에 출간된 만큼 경제적 노마디즘과는 종류와 계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진경에 따르면, 철학적 노마디즘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변이시켜가는, 앉아서 하는 유목”을 가리킨다(그것이 들뢰즈의 노마디즘인지 이진경의 노마디즘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앉아서 하는 유목’이 ‘싸돌아다니는 유목’과 동종일 리는 없다. 애당초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증적 교란과 그로부터의 탈주를 기획했던 만큼 철학적 노마디즘과 경제적 노마디즘은 동일한 이름으로만 불릴 뿐 내용물은 전혀 상반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없이 통칭어로서 ‘노마디즘’ ‘유목주의’란 말이 남용되는 데 있지 않나 싶다(그러한 ‘남용’을 서로가 즐긴 것은 아닌가라는 혐의는 잠시 제쳐놓도록 하자).

최근에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노마디즘에 대한 이러한 동상이몽(同床異夢)에 기인한 것이지 않을까? 저자는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 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을 애써 외면”하는 세력들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유목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시장 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건 과욕인 듯싶다(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농사꾼 철학자’라기보다는 ‘옹골진 농사꾼’으로서 천규석의 주된 비판은 들뢰즈/가타리보다는 칭기스칸에 더 집중될 필요가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국내 ‘철학적 노마디즘’의 또 다른 대표자 이정우의 강파른 비판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란 서평에서 이정우는 철학에 대한 천규석의 몰이해를 냉소적으로 몰아붙이는바,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비록 논리보다는 감정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비판이지만, 천규석 자신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철학적 노마디즘도 싸잡아서) 모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고 말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목’인가?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탐독>에서 이정우가 말하는 유목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 일 따위가 아니라 지적 편력으로서의 ‘지적 유목’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하면서 ‘가로지르기’가 곧 그에게는 ‘유목’이고 ‘유목적 사유’인 것. ‘앉아서 하는 유목’이란 점에서 이진경과 이정우는 노마디즘관을 공유한다. 그들이 대동소이하게 ‘철학적 노마디즘’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이다(두 사람은 ‘수유+너머’와 ‘철학아카데미’ 같은 대학 바깥의 연구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그러니까 노마디즘을 둘러싼 논란과 혼돈의 대부분은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정의하는 데서 비롯되는 듯싶다. 실상, ‘이동 마인드’(천규석의 표현)를 갖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와 ‘자유롭게 사유하는’ 존재는 현실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자본축적과 생계유지에 바쁜 하이퍼노마드나 인프라노마드는 사유하지 않으며(혹 겉멋으로 들뢰즈/가타리를 끼고 다닐지는 모르겠으나), 철학적 노마드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사유하는 게 아니라 앉아서 사유한다. 특정한 소속을 갖지 않거나 기존의 개념틀로부터 벗어나는 걸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이 두 부류가 직접 마주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요컨대, 경제냐, 철학이냐?). 

한데, 여기서 잠시 제쳐놓았던 문제를 끄집어내자면, 그리고 ‘혼돈 속의 노마디즘’에 대한 김진석의 진단을 빌자면, “탈현대론이 소비문화와 겹치는 과정에서 ‘유목주의’는 아주 광범위하고 모호한 문화적 소비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목주의’는 애초의 철학적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는 듯했다.”  

즉, “유목주의가 소비문화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다름아닌 철학의 이름을 내건 책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란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 경우 경제적 노마디즘과 철학적 노마디즘은 의미론적으로 무관하더라도 화용론적으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은 모르게 서로 연루되어 있는 것.    

김진석의 ‘관전평’에 따르면,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이 실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들뢰즈 해설자들(혹은 철학적 노마디스트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한다. 앉아서 유목하는 이들이 노마디즘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건 아닌가라는 혐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목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아닌 이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김진석의 지적대로 ‘지역 자치공동체’라든가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는 각각의 관념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관념성에서 벗어날 때, 분명 “침략적 이동성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김진석)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보편적 조건’처럼 돼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울은 우리가 오래 껴안고 누워서 뒹굴어야 할 우울이다. 정주민도 유목민도 아니었던 ‘산책자’ 보들레르처럼.

“이곳의 인생은 병원과도 같다. 그곳에서 환자들은 제가끔 침대를 바꾸어 다른 곳에 있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병원.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고통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에서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는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항상 좋은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것이다...”('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나')

06. 05. 14.

P.S. 원고지 20매를 청탁받은 원고인지라 분량을 거기에 맞췄다. 모든 글은 지 '팔자'를 갖는다. 보들레르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자세히 적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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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5-15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뎌 올라왔군요..^^ 어디에 쓰신글인가요?

몇가지 의문나는 사항이 있어 여쭤보면..

"김진석의 ‘관전평’에 따르면,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이 실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들뢰즈 해설자들(혹은 철학적 노마디스트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한다"

라는 부분입니다. 전 아직 <천개의 고원>을 읽어보지 못해서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 저작에서의 유목성 즉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은 자본주의와 "전쟁"하는 유목성을 뜻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 반대라는 이야긴가요? 위 본문에서는 어느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인지 잘 모르겠네요.

만약 들뢰즈의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이 자본주의와 전쟁을 하는 반 자본주의적 유목성이라면 위에서 예로드신것의 두번째 측면 즉 "자본주의의 주적"으로 노마디즘을 보는것은 전자(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와 동일한 시각에서 유목성을 보는 것 아닌가요? 김진석씨는 그런 측면에서 들뢰즈의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이야기하신거 같은데..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님은 이진경씨나 이정우씨의 노마디즘은 "관념적"이다라고 보시는것 같은데
님이 예로드신 보들레르식의 "산책자"적 관점과 이진경씨와같은 관념성은 어디가 서로 다른건지 잘 모르겠습니다..제가 보기엔 둘다 "관념적"으로 보입니다.. "관념적"이라는 것이 세상에 대해 실천적,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만하고 "산책"만 하며 우울해하는 것이라면 말이죠.

아 그리고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고통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여기에서 "고통하고 싶어하는가 하면"이란 말은 "고통받고 싶어하는가 하면"의 오자같네요..

yoonta 2006-05-15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다시 김진석씨의 글을 읽어보니.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이 지칭하는 말은 이진경씨나 이정우씨의 유목주의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가 가지는 침략적 유목성을 지칭하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어느정도 이해 안되는 부분이 해소되긴 하는데 이진경씨나 이정우씨가 자본의 이러한 침략적 유목성을 과연 인지하지 못했을까하는 회의가 좀 드네요. 어디선가 신자본주의와 국제투기자본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을 본거 같아서요. 그리고 <천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주적"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애매하군요..

로쟈 2006-05-1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쓰던 게 날아가서 좀더 간략히 쓰겠습니다.^^ 들뢰즈의 유목주의에 대해서는 <천개의 고원>에서의 12장 '1227년 노마돌로지: 전쟁기계' 장을 막바로 참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주적'을 발견하시면 알려주십시오). 제가 받는 인상은 제목에도 표기돼 있지만,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유구하게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자본의 '침략적 유목성'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거 아닌가요? 김진석의 견해에 공감하는 것은 그가 그러한 공범성(과 우울)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한 건 똑같이 관념적이라 하더라도 거기엔 아이러니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세상에 대해 실천적, 능동적으로 개입'만 하면 관념적 오류로부터 자유로운 건가요? 역사상의 많은 '실천적, 능동적 개입'을 떠올려보게 되는데, 좀 의문입니다(yoonta님이 실천적, 능동적이란 말을 또 다르게 정의하신다면 모를까). '고통하고 싶어하는가'는 좀 어색하지만('능동적인' 표현이지 않나요?), 민음사 번역본의 원문 그대로입니다. 그냥 놔두었습니다... 근데, 밤을 새시는군요?!

마늘빵 2006-05-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운 이야기들을 나누시는군요. 전 가져가겠습니다. 꾹.

yoonta 2006-05-1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공범성을 모르고 과연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을 이야기했을까?라는 회의를 저는 한단 거죠. 김진석씨의 비판에 한편 수긍이 가면서도 왠지 그분 의견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게 이런 의문점 때문입니다.

(보들레르식)문학적 실천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는 로쟈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님의 보충설명이 좀 필요한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다루어주신다니 그때를 기다려려봐야겠네요..^^

제가 책보다가 종종 밤을 샙니다..^^


로쟈 2006-05-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신문 인터뷰를 인용한 바 있지만, 이진경씨가 노마디즘에 대해서 얘기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수유+너머'입니다. 그게 '외부'인지에 대한 판단은 자유이겠지만, 저는 시스템 바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구성적 예외 정도라고 해야겠죠. yoonta님의 '외부'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보다 진전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를 기대합니다...

딸기 2006-05-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앉아서 하는 유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지식인들이 노마디즘 논의를 하는 동안 진짜 노마드들이 '평평한 지구'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yoonta 2006-05-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이야기하시는 이진경씨에 대한 판단은 존중합니다만. 전 님이 좀더 본격적으로 이진경씨나 이정우씨의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 그것의 내적 논리를 구체적으로 논파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김진석씨도 그렇고 님도 그렇고 지금처럼 텍스트 '외부'에서 간단한 인상비평을 하는 정도로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이진경의 <노마디즘>이나 <미-래의 맑스주의>같은 저작들을 독해하셔서 그들 텍스트 내부에 있는 논점들을 비판해주시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님이 그런 작업들을 하는것에 특별한 동기를 발견하지 못하신다면 뭐 할수없는 일이지만요.

로쟈 2006-05-1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그게 서로 다른 '노마드'라니까 뭐 할말은 없습니다...

yoonta님/ 저보다는 yoonta님이 더 잘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노마디즘>은 부분적으로 읽었습니다. 한데, 아시다시피, <천개의 고원>과 같이 읽어가야 하는 일이 '수유+너머' 같은 공간에서 세미나로 읽는 게 아니라면 여력을 내기가 힘든 일이지요. '노마돌로지' 장에 대해서만큼은 바쁜 일들이 끝나는 대로 마저 읽을 계획은 갖고 있습니다. <미-래의 맑스주의>도 책은 갖고 있는데,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무슨 -주의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후반부를 마저 읽는 건 여름방학 때나 가능할 거 같습니다. 이정우씨의 <탐독>은 이 참에 얼마간 읽어보았는데, 도올 이상의 자뻑 스타일이더군요. 그게 '자부심'이면 나무랄 것도 없지만 개인적으론 르네 톰의 책들을 번역하는 일에 더 자부심을 갖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데, 실상은 그들보다 더 시급하게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더 많은 것인지요!..

yoonta 2006-05-1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시는군녀..^^(근데 농담이시져? ㅋ) 저야 어학실력도 로쟈님만큼도 못되고 글쓰기 실력은 더욱 딸리고..생업에도 종사해야하니..그래서 이처럼 로쟈님의 독서의 흔적이나마 따라가보면서 같이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는겁니다..^^
이정우씨의 탐독은 저도 읽어보았는데 "도올식의 자뻑 스타일"이라는 님표현에 어느정도 공감은 합니다만 그분처럼 이과와 문과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공부하시는 분도 드물죠. 그때문에 그분 특유의 '자부심'이 생기는 것 같기는한데 뭔가 더 생산적인데 그 자부심이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분에서는 로쟈님과 생각을 같이합니다..^^ 트랜스크리틱은 예상외로 난해하더군요. 탐구나 윤리21이 차라리 더 쉽더라고요. 전반부를 조금 남겨두고 읽다가 말았는데 머리속에 정리해야 할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후반부 독해를 (이곳에서)하시게 되면 즐겁게 님 페이퍼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꼭 올려주시길...^^

로쟈 2006-05-1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장난을 종종 하는 편이지만, 말장난의 전제조건은 말을 진지하게, 축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텍스트를 축어적으로 읽습니다. 일단은...

dhkd1246 2007-12-3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하면서 ‘가로지르기’가 곧 그에게는 ‘유목’이고 ‘유목적 사유’인 것.]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

라고하는 명제가 나에게는 많은 이해를 가져다 줍니다.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을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