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나온 화제의 신간은 이진경(박태호 교수)의 <미-래의 맑수주의>(그린비, 2006)이다. 아직 구해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맑스(주의)에 관한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 2부와 함께 듀엣으로 읽어볼 계획은 갖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 2005)를 꼽을 수 있겠다(네그리/하트의 <제국>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면 줄줄이 딸린 책들 때문에 또다른 한판의 방대한 책읽기가 되므로, 가급적 자제해야겠다). 해서, 예비적으로 <미-래의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이 페이퍼는 그걸 정리한 것이다. 세 개의 서평인데, 각각 한겨레,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것이다.
(1)먼저, 한겨레의 리뷰(06. 04. 07)는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로 제목을 달고 있다(*해서, 이 글 제목 '이진경주의'의 출처가 됐다). 내가 읽기에, 그 속사정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이진경의 (과격한) 맑스주의를 분리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해서, '미-래의 맑스주의'를 '이진경 맑스주의', 혹은 더 줄여서 '이진경주의'라고 불러주는 것. 서로 인상 구기지 않게 말이다. 그건 그냥 나의 '추측'이고, 다른 속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리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2006)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 (노마디즘>(2002),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물론 저자는 거명된 책들보다 더 많은 책을 썼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대학가 베스트셀러였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박사학위논문이며, <노마디즘>은 한국사회의 '메인스트림'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으면서 '이진경'이란 운동권 브랜드가 '인문학 브랜드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책이다. 동시에 국내에 들뢰즈와 노마드/노마디즘 붐을 가져온.)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즉, '사상가' 맑스나 맑스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진경 자신의 이야기라는 함축이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10여년이 넘도록'이 아니라 '10여년도 안되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단순한 의문. '외부'에 관한 사유는 규정하기에 따라서 초월적 관념론을 모두 포괄하는 거 아닌가? 혹은, '철학의 외부'란 철학이 자신의 무능력한 대면하는 지점 아닌가? 철학의 외부에 대해서 (유물론)철학은 무엇을 사융할 수 있는가? 사유되는 외부도 여전히 '외부'인가?)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이미 '포스트-휴먼'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라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생소하거나 과격하지 않다. 물론 '생태주의자'들이라면 불편해 할 주장일 것도 같지만).
-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인간과 기계의 결합에서 유추될 수 있는 자연스런 결론이다. 요컨대,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하면,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자문하도록 해야겠다. "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란 말인가?" 여성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여성'이 되는 게 아니며, '여성-되기'가 요청되듯이,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편입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다. 프롤레타리아트-되기가 필요한 것.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다! )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뭐가 불온하냐는 반문이겠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온함'에 대한 과신도 불온함의 일종인 것일까? 문득 자신의 '야함'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하는 마광수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건 기사의 보충설명인데, '이진경의 지적 이력'이라고 해서 군대 차트식으로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라고 정리하고 있다.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그러니까 노동자 계급보다 혁명적인 것이 이 '연구자들'이겠다. 프롤레타리아트 후보 1순위. 한데, 노동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닌 이들, 즉 삶과 결합될 '연구'를 안 갖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그러니까 이진경에게서 맑스주의는 '맑스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겠다. 맑스의 정신을 근대 맑스주의주로부터 분리/구출하고자 하는 것.)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자본의 외부에 대한 사유도 자본주의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니까.)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아무도 대꾸를 안 해준다는 얘기인가?)
(2)이어서 동아일보의 리뷰(06. 04. 08)는 '마르크스 넘어서 코뮌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고, 따라서 방점은 맑스주의가 아닌 '코뮌주의'에 찍힌다.

-<굿바이 프로이트>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때 그를 믿었다가 버린 사람의 수로 쳤을 때 이 빈 출신의 의사(프로이트)를 능가하는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다.” 그렇다. 프로이트도 울고 갈 만큼 수많은 개종자를 양산했던 그 마르크스에 대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대표적인 논객이었고 1990년대 탈(脫)근대사상 연구에 주력해 왔던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다. 필명 이진경으로 더 유명한 그는 한때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다 감옥까지 다녀온 뒤 한동안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2004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단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로서 코뮌주의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컨대, '코뮌주의자로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주류'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그가 주장하는 코뮌주의는 익숙한 마르크스 사상과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DNA로 꼽히는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투쟁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모든 것이 물질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경제주의’와는 다른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이 모든 문제를 체계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유물론은 이를 초월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체계 외부 조건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를 '자본의 외부'와 관련지어 사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계의 예외성으로서의 '외부'란 체계의 구성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상식 정도만 상기하기로 하자. 그의 '외부'는 어떤 외부인 것일까? '수유+너머'?)
-그는 노동가치설에 대해 기계나 화폐, 지대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노동가치설의 폐기를 주장한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계급질서 내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가 포착할 수 없는 ‘비(非)계급’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주류 소수자 그룹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뮌주의는 바로 이런 소수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계 외부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모든 불온한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일까. 근대적 사상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온갖 탈근대적 사유를 주입한 뒤 이게 본래의 마르크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유생들이 중국 취푸(曲阜) 공자 생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공자를 안 닮았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던 선불교의 기개가 못내 아쉽다.(*미래의 맑스주의, 아직 도래하지 않는 맑스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한편으론 모든 과거에 실재해던 모든 '역사적' 맑스주의의 기각이다. "너네, 맑스주의 아냐, 딱지 다 반납해!" 한데, 그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역사적 자본주의, 혹은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미래의 자본주의', 진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될 거라고.)
(3)경향신문의 리뷰(06. 04. 09)는 "마르크시즘을 뒤집어 새 마르크시즘 만났다"란 제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주의'는 '새 마르크시즘'이란 표현을 얻었다. 가장 호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인터뷰라서 그런가?).
-사회학자 이진경씨(서울산업대 교수·43)가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를 내놓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서이지만, 책에는 ‘이것이 마르크시즘인가?’ 할 정도로 새로운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이씨는 도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니다라는 주장도 펼친다.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계적 포섭’ 개념을 통해 기계 또한 가치를 생산한다며 맞선다.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코뮨주의’라는 사회모델도 내놓았다. 독창적이다 못해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래서 책은 이씨의 독창적인 사회구성체론으로도 읽힌다. 이씨가 20대인 1987년 내놓았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연장선인 셈이다(*나는 이 80년대의 '고전'을 읽지 않았다. 다들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을 때라서, 나는 딴 걸 읽었다). 한때 들뢰즈, 가타리, 푸코 등에 탐닉하며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씨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났다.

-마르크시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를 만난 이후 한번도 마르크스를 떠난 적이 없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보다는 푸코, 들뢰즈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만났지만, 모두 마르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잘 재구성할 수 있었다.”
-흔히 마르크시즘은 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물론은 흔히 물질의 일차성을 인정한다거나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외부에 의한 사유’로 정의한다(*유물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탈목적론으서의 우연성에 대한 사고이다). 역사유물론에서 ‘역사’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뜻한다고 볼 때 사적유물론은 역사 과학이라기보다는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는 게 옳다.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사적유물론을 사회발전단계론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한 사고다. 사물은 정해진 것도 없고 본성도 관계 속에 달라진다. 사물은 조건에 비춰 사유하고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人'이 아닌 '人間'에 대해 사고했던 동아시아 사상, 혹은 불교의 연기론 사상이야 말로 '관계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유물론에 근접하는 것이겠다.) 외부에 의한 사고는 유물론을 물질이란 개념과 결별하도록까지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개념 등이 통설과 달라 혼란스럽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노동자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계급’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노총 등에서 보듯 노동자가 귀족화되는 속에서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과 연대를 가져야 한다. 현재의 노동운동만으로는 변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기계적 포섭’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것인가.
“가치나 가치 생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기계화·자동화도 가치를 생산한다. BT(생명공학) 산업도 잉여가치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 생명복제시대에는 인간과 기계, 생명체와 기계에 관해서도 기존과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물론 저자는 알튀세리언의 경력을 거쳤으며,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는 반휴머니즘을 표방했었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 이씨는 루카치,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이 마르크시즘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씨가 책 제목을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붙인 것은 마르크시즘이 다가온 현재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것을 찾는’ 무엇이 아니라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사상이자 철학이다.(*그에게서 마르크시즘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인 것이다.)
06. 04. 12.
P.S. '이진경'의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눈에 띈 글은 김규항의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B급 좌파'의 견해(04. 07. 10)도 참고삼아 들어보기로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다. 오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진경의 방법은 지적 편력, 혹은 지적 허세다. 편력이든 허세든 그가 알아서 선택할 일이지만 그런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존중을 얻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 배경엔 그가 80년대 PD 운동권의 주요한 이론가였다는 다소 엉뚱한(그러나 한국이라는 기지촌 지식 사회에선 지극히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진경의 주 메뉴가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유럽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지적 허세(특히 프랑스의)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탈근대 철학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탈근대철학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진경을 비롯한 80년대 우등생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포기할 수 없는 지적 허세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엔 자의식이 강하고, 기약 없이 풍찬노숙하며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유약한 그들에게 탈주, 횡단, 유목 같은 탈근대 철학의 개념들은 뇌까리는 건 모든 것을 실제로 청산하면서도 뭔가 진지한 탐색을 지속하는 듯한 외양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진경은 최근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예약 이벤트’까지 벌이며 냈다. 그 책의 맑스주의적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맑스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다.”(*요컨대, '근대적 맑스주의자'로서 김규항은 '새로운 맑스주의'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