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레비나스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로서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시간상/분량상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들'은 언급하지 못했다. 따로 기회가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올해는 지난 1995년 성탄절에 세상을 뜬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말에 출간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과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세계의 문학>(2006년 봄호) 등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생애를 살았던 이 ‘최고의 윤리학자’의 삶과 철학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


레비나스는 누구인가?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코우노)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모국어는 러시아어였으며,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히브리어 성경이었다고 한다. 이 히브리어 성경과 탈무드, 그리고 푸슈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러시아문학이 그의 유년기를 채운 정신의 수프였다.


프랑스로 건너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을 경유하여 현상학에 몰입하게 되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있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리고 1930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후에 현상학을 소개하면서 독창적인 자기 철학, 즉 ‘제1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전개하게 된다. 요컨대, 레비나스는 히브리어와 러시아어,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그 문화와 함께 숨을 쉬면서 작업한 철학자였으며, 때문에 ‘네 문화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오래전 그의 생전에 그의 철학을 소개하는 글들을 처음 접하면서 나는 매혹된바 있는데(‘타자=무한자로서의 신’을 핵심으로 한 그의 종교론은 내가 유일하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종교론이다. 그에게 신은 ‘존재자’가 아니다!), 이제 그를 기념하는 계절을 맞이하여 비록 ‘거창한’ 기획들에 동참할 만한 역량은 갖고 있지 않지만 그에게 진 빚은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이 자리에서 나대로의 ‘입막음 의식’을 갖는 이유이다. 그 의식은 레비나스라는 ‘타자’가 나에게 강요하는 명령이자 거기에 답하는 나의 응답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출석부를 부르는 윤리 선생님 레비나스 앞에서 “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래서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독촉을 사전에 입막음하는. 이 자리에서 그 입막음은 레비나스의 철학적 여정, 혹은 ‘사랑의 지혜’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나의 손가락으로 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지혜라고? 그렇다. 사랑,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필로소피아)이 있기 이전에 ‘사랑의 지혜’ 혹은 ‘사랑하라’는 무한자의 명령이 있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어쩌면 철학은 아테네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사랑의 지혜’를 그 가능조건으로서 미리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족을 나치의 수용소에서 잃은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는 ‘존재의 망각’에 대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염려 이전에 ‘사랑의 상실’에 대한 근심이 우선적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하는 그런 사랑으로 세상은 넘쳐나는 듯도 한데, 어찌하여 사랑이 부족하며 사랑이 상실되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사랑의 정념은 넘쳐나되 ‘사랑의 지혜’, ‘사랑이라는 지혜’는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탐욕과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군림하는 자기중심성과 무사무욕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사상”(핑켈크로트)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지혜’란 레비나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즐겨 인용하는바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고백하는 지혜이다. 어쩌면 용기이기도 한.    

 

 

나는 이러한 지혜로 가는 길에 굳이 우회의 여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철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의 지혜”(la philosophie: sagesse de l'amour au service de l'amour)라고. 이걸로 충분하지만, 이에 대한 주해가 필요하다면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를 읽어보시길. 레비나스 관련서들 가운데 아마도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도 따라가며 읽을 수 있을 거의 유일한 책이며 레비나스의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수준 높은 개관이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러한 개관을 통해서 레비나스에 대한 영감을 좀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게 ‘뭐, 그런 정도군!’이 아니라 ‘영감의 폭탄’이어서 자신의 존재가 주체할 만한 수준을 좀 넘어서까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한다면 보다 본격적으로 레비나스를 입에 담고 중얼거려볼 수 있겠다. 레비나스의 육성을 그대로 따라서 말이다. 우리말로 녹음된 레비나스의 육성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현대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의 한 꼭지인 ‘무한성의 윤리’에서 레비나스는 대담자인 리처드 커니의 질문들에 답하여 자기 철학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해준다(한두 군데 흠잡힐 만한 번역이지만 레비나스 관련 번역으로는 가장 우수하다).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사랑은 신과 인간의 사회이다. 하지만 인간이 더 행복한데, 신은 인간을 동료로 갖고 있는 반면 인간은 신을 동료로 갖고 있다”(273쪽)는 대목에 이르러 왠지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못난 놈들끼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운 법이다!).   


그리고 ‘필’을 받은 김에 필립 네모와의 대담을 담은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까지 내처 읽어볼 수도 있겠다(우리말 번역은 ‘외재성’을 ‘외모’라고 옮기는 식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대략 레비나스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열 개의 대담 꼭지들은 한 철학자의 철학적 생애를, 혹은 지혜의 생애를 자세히 되짚어준다. 그 끄트머리에서 레비나스가 던지는 말(혹은 벼락):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철학전통에서 자신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있음이 곧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158쪽) 즉,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쯤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레비나스가 문제삼는 것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 essendi)', 즉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기보존욕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타자의 현현으로서의 타인의 얼굴 때문이다. 우리에게 무한책임을 떠맡기면서, 우리로 하여금 ’대속적 주체‘로 다시 깨어나도록 발목을 잡는 그 얼굴은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의 얼굴이다. 아, 젠장, 나는 나대로 좀 살고 싶은데, 어쩌자고 내 앞에 있는 당신은 헐벗은 이방인이고 젊은 과부이며 배고픈 고아인가? 그런 물음을 무겁게 등에 짊어질 때 우리는 ’사랑의 지혜‘로 가는 도상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선적인 여정에 자신을 내맡기기엔 머리나 엉덩이가 너무 무거운 이들도 없지 않겠다. 이 분들을 위해서는 보다 우회적인, 현학적인 여정이 필요할 듯한데, 그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학자’ 레비나스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 또 다른 방향의 여정은 아직 다 개발되지 않은 코스의 여정이어서 언제 ‘사랑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저에 해당하는 <전체성과 무한>(1961)과 <존재와 다르게 혹은 존재사건 저편에>(1974)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그의 초기 철학을 입에 물게 해주는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와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인데, 1947년에 발표된 이 두 작품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레비나스 자신의 윤리학으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저작들을 읽어나가는 데 매뉴얼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이 앞서 언급한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과 함께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이다. 거기에 국내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김연숙의 <레비나스 타자윤리학>(인간사랑, 2001)도 레비나스 해설서로 참고할 만하다.  

물론 이 책들은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대한 해설뿐만 아니라 레비나스의 철학 전반과 주저들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데이비스의 책은 개인적으로 경탄할 만큼, 분량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고 정교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다(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곳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한편으로 강영안 교수와 함께 국내에서 레비나스 철학에 가장 정통한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문학과지성사, 2000)와 <일상의 모험>(민음사, 2005)에는 레비나스를 직접 다루거나 레비나스적 영감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으므로 읽어봄 직하다.

 


 

 

 

 

 

 

 

 

시야를 좀 넓히면, 레비나스와 영감을 주고받은 가장 중요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최초의 본격적인 레비나스론이기도 하다) ‘폭력과 형이상학’(1964)을 그의 <글쓰기와 차이>(동문선,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는 데리다의 비판을 고려하여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이 글 또한 레비나스의 주저인 <전체성과 무한>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막바로 읽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우리에게 레비나스는 여전히 풍문이다). 해서,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성과 무한> 등의 주저들이 번역돼 나오는 것이겠다. 우리의 무거운 엉덩이만 믿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닐까?


자, 여기까지가 나의 응답이고 책임이다. 레비나스라는 타자에 대한 이 책임은 무한책임이기에 이건 고작 ‘입막음’에 불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언제나 중과부적이어서 겨우 틀어막은 틈새로 새어나오는 준엄한 무한자의 목소리를 나는 어찌할 수 없다. “너 어디에 있느냐?” 오, 신이시여, 제발!..

 

06. 03. 03 - 04.

 

P.S. 내가 보기에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은 주로 '타자'의 일상성에 걸려 있다(바디우와 지젝, 고진 등의 비판). 레비나스식의 '타인의 얼굴'에 대한 이들의 카운터 펀치는 (지젝이 언급한 것이지만) 영화 <페이스 오프>(1997)이다. 이에 대한 숙고는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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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PS에서 언급하신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할 만한 책좀 소개해 주세요..

로쟈 2006-03-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언젠가 읽은 지젝의 언급은 출처를 못 찾아서(!) 적어놓지 못했습니다. 고진의 언급은 <트랜스크리틱>에 있고(다른 데도 있을 듯하지만), 바디우의 비판은 <윤리학>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전체성과 무한>에 대한 비판이고, <존재와 다르게> 정도로 가면 데리다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카바가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twoshot 2006-03-0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드립니다.

sgtchoi75 2023-04-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비나스와 관련된 지문이 계속 나오는데 속수무책이더군요
그러다가 예전에 사두었던 ‘책을 읽을 자유‘에서 그나마 깨우침을 좀 얻었습니다
(아니면 깨우침을 얻었다고 제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든가요....)
추천해주신 개론서를 읽을 만큼의 깜냥은 저한테 없는 거 같구요
대신 ‘책에 빠져 죽지 않기‘를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또다시 지적 대화를 위한 입막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