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부터 미열과 두통 때문에 일과를 놓치고 있다. 할일은 많은데 머리는 아프고 손은 더디다. 게다가 어제는 발목까지 삔 탓에 (자업자득이긴 해도) 이래저래 불만이 터져나온다. 그린버그의 글을 정리하는 일을 미루고 잠시 재작년에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란 제목으로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창고에 다시 정리해둔다. 새학기에 러시아문화에 대한 입문 강의도 (다시) 맡게 되었기에 워밍업도 좀 해두어야겠고. 주된 내용은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이 자유가 필요한가"에 대한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스프스키의 인터뷰 갈무리이다. 그런데, 콘찰로프스키가 누구냐고? 이런, 젠장...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1937- )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모스크바영화학교 동기생이다. 둘 다 미하일 롬에게서 배웠는데, 비슷한 시기에 졸업작품을 만들고, 1960년대 중반 러시아 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콘찰로프스키의 데뷔작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타르코프스키의 경우 졸업작품은 <증기롤러와 바이올린>이고 데뷔작이 <이반의 어린시절>(1962)이었다(콘찰로프스키는 <증기롤러와 바이올린>의 시나리오도 썼다). 1962년 베니스영화제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참고로, 주인공 ‘이반’으로 나왔던 소년도, 지난달에 우연히 TV 인터뷰를 보니까, 중견 영화감독이 돼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이 부를랴예프이다. 혹 소년의 얼굴이 생각나시는가? 아래는 그 '소년'의 어린시절과 최근 모습이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의 두번째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의 시나리오가 바로 콘찰로프스키와의 합작이다.

콘찰로프스키는 내가 알기로 타르코프스키보다 먼저 7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소비에트 몰락 이후 1990년대 중반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정확한 년도는 알지 못하며 짐작에 그렇다). 그의 헐리우드 시절 초기 대표작이 <폭주기관차>이며, 스탈린의 전속 영사기사의 삶을 다룬 <이너 서클>이 또한 그의 작품이다(<아마데우스>에서의 ‘모차르트’가 주연을 맡았다. 톰 헐즈이던가?). 그밖에도 미국에서 활동하며 많은 영화와 TV시리즈를 만들긴 했지만(<탱고와 캐쉬>, <마리아스 러버> 같은 영화들도 떠올려볼 수 있겠다), 비평가들은 보통 그가 젊은 시절의 ‘재능’을 낭비한 걸로 평가한다. 동기였던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성취와 비교해서도 그렇고, 러시아 영화의 ‘황제’라고도 불리는, 그의 동생 니키타 미할코프와 비교해서도 그렇다(콘찰로프스키의 풀네임은 ‘안드레이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이다. 거기서 ‘미할코프’를 떼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이 형제의 사이가 원만한지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러시아로 되돌아온 이후에도 콘찰로프스키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내가 알기로 그의 최신작은 1996년의 제1차 체첸전쟁을 다룬 <바보들의 집>(2003)이다(실화를 다룬 이 영화의 배경이 전장(戰場)의 정신병원이다). 이 영화로 그는 제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영화의 비디오CD를 사놓고 아직 다 보지는 않았는데, ‘문제의식’에 있어서 에밀 쿠스투리차의 <언더그라운드>와 유사한 종류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어쨌든 ‘타르코프스키의 친구’ 혹은 ‘미할코프의 형’ 정도로 나는 그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인터뷰는 그의 ‘존재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아예 번역까지 해버렸다. 번역은 ‘정확성’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의역했는데, 그게 ‘유려함’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읽기에는 더 무난할 듯해서이다. 참고로, 나는 인터뷰 내용 중 많은 부분에서 콘찰로프스키에게 공감하는데, 이 때문에 같이 수업을 듣는 독일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내 의견(‘자유론’)은 번역문 뒤에 간략히 밝히기로 하겠다.

인터뷰가 게재된 지면은 주간신문인 <논거와 사실(영어로는 ‘Arguments and Facts’)>인데(사진), 발행부수가 많은 주간지의 하나라고 한다(우리의 <일요신문> 같은 종류이다). 어제 처음 한 부 사봤는데, 9루블로 표시된 정가와는 달리 구내에서는 11루블(450원쯤)에 판매하고 있었다. 전체 32면. 일간지인 <이즈베스찌야>나 <니자비씨마야>(우리말로는 ‘독립신문’)와는 달리 활자나 체제가 좀 조잡해서, 정말로 ‘유력지’인지는 의심스러웠다(하긴 대부분의 신문이 그렇지만). 그리고, 정확한 인터뷰 시점은 확인하지 못했다. 러시아 두마(=의회) 선거 직후인 듯한데, 그 선거가 언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제기된 문제가 여전히 현재적이기 때문에(지난주에도 ‘러시아에서의 자유’라는 주제의 TV토론이 있었다), 시점에 구애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인터뷰의 제목은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이다. 인터뷰는 한 문단의 서론 이후에 시작되며, ‘기자들’이라고 표시되지 않은 문단은 전부 콘찰로프스키의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주석에는 *표시를 했다. 이하는 번역문이다.

의원 선거가 끝나고 러시아에 사실상 단일정당 체제의 두마(=의회)가 형성되자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논거와 사실>의 지면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아버지’ A. 야코블레프, 반체제작가 V. 부코프스키 등 여러 사회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그들은 러시아에 대두되고 있는 ‘우려할 만한 정세들’에 대해서 지적했다. 즉, 우리가 지난 수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쟁취해온 시민권적 자유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란 문제와 관련하여 이와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저명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논거와 사실>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예기치 않은, 역설적이면서 상당히 논쟁적인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러시아 국민에게 어떤 요구들이 존재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에 무엇인가에 대한 요구(*영어의 ‘need’에 해당한다)가 사람들에게 없을 경우에는, 아무리 유익한 것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요를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령 캐비어(*상어알젓) 한 양동이를 세네갈 사람들한테 제공한다고 해봅시다. 과연 얼마나 먹고 싶어할까요! 그들은 이 특별한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을 텐데, 그건 캐비어가 나쁜 음식이어서도 아니고, 그들이 모자란 사람들이어서도 아니죠. 세네갈 사람들, 물론 훌륭한 국민들인데, 단지 그들에겐 캐비어에 대한 요구가 없을 뿐입니다.

같은 질문을 러시아에도 던져봅시다. 과연 이 나라에서 언제 자유에 대한 요구가 객관적-역사적 조건으로서 제기된 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입니다. 플레하노프(*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조차도 레닌에게 미리 경고했었죠. “러시아의 역사는, 구워서 사회주의란 고기만두를 만들 밀가루를 빻지 못했다네.” 즉, 러시아의 역사는 유사 이래 그 발전과정 속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요구를 창출해내지 못했던 것이죠.

라디오 <스바보다>에서 “당신에게 자유란 무엇입니까?”란 여론 설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두 가지 답변이 기억에 남는데, 첫번째는, “자유란 무엇보다도 국가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 것이다.”이고, 두번째는, “자유란 만약 당신에게 말이 있고, 초원에 천막이 있다면,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이다.”예요. 이 두 가지 정의는 특별히 러시아적입니다. 두 정의는 그냥 러시아 철학이 아니라, 러시아 농민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농민들의 철학이란 언제나 국가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자신을 설정해 왔기 때문이에요. 국가는 농민들에게 한번도 뭔가를 주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빼앗아가기만 했죠. 농민들의 역사, 이것은 국가와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의원 선거결과 집계가 끝나자 사회학자들은 어째서 젊은 층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우파에 표를 던졌을까를 분석하려고 했습니다. 이건, 그 정치세력(*우파)이 그들(*젊은 층)의 권리와 자유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데도 말입니다. 몇몇 사회학자들은 아주 슬픈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젊은 층들에게 자유란, 단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의 시간, 그러니까 일할 필요가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러시아에서 모든 서구적 가치들(*사상), 루소나 디드로 등등의 계몽사상가들이 공표한 그 가치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가치들은 단지 소수의 계몽된 그룹, 인텔리겐치아 층에서만 받아들여졌죠. 인텔리겐치아, 이건 순전히 러시아적인 현상입니다. 다른 나라들에는 인텔리겐치아 대신에 그냥 전문지식인들(*인텔렉츄얼)이 있죠(*‘비판적/혁명적 지식인’이 하나의 ‘사회적 계급’으로 존재했던 나라는 러시아가 유일하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교육받은 소시민계급에서 생겨났습니다. 이 소시민계급이란 해방된 농노들이죠. 그 때문에, (의사, 교사 등) 19세기의 ‘잡계급’(*1)들은 ‘나로드’(*2)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죠. “나는 여기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나로드는 여전히 노예상태에 있구나!”(*1860년대의 비평가 도브롤류보프는 딸기잼을 먹을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그랬죠, 나로드는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상태에 있었고, 이 때문에 어떠한 삶의 안락도 체험할 수 없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러시아의 모든 재앙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쪽에는 서구사상을 수용하여 진보적으로 사고하는 인텔리겐치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이러한 사상에 관심도 없고, 그걸 이해할 수도 없는 절대 다수의 나로드가 있다는 것(*이러한 분열현상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는 문헌은 이인호, <지식인과 역사의식>(문학과지성사)이다).



 

 

 

(*1) ‘잡계급’은 소수 귀족과 다수 농민/농노가 아닌 제3의 계급을 가리키는데, 19세기 전반기에 형성된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그 출신에 따라 (소수) ‘귀족 출신’과 (다수) ‘잡계급 출신’으로 대별되는바, 전자의 대표자가 작가이자 사상가 게르첸(Herzen)이라면(그는 대귀족의 사생아였다) 후자의 대표자가 비평가 벨린스키(Belinsky)이다(그는 사제의 아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은 인텔리겐치아의 문학이었다. 하지만, 교육받지 못한 대부분의 나로드 때문에 당시 문맹률은 95%에 달했는바, 다르게 말하면, 그 위대한 러시아문학은 5%에 의한, 5%를 위한 문학이었다.

(*2) 우리에겐 ‘브 나로드’ 운동(심훈의 <상록수>)이라고 할 때의 그 ‘나로드’이다(‘브’는 ‘toward’란 뜻의 전치사). ‘민중’ 혹은 ‘인민’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실내용은 주로 ‘농민’이다. 대략 1840년대부터 제정러시아의 사회적 계급은 짜르(=황제)/귀족과 나로드, 그리고 인텔리겐치아로 3분 된다. 인텔리겐치아는 주로 ‘참회하는 귀족’(작가로선 톨스토이가 대표적이다)과 대학교육을 받은 잡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다. ‘브 나로드’ 운동은 1880년대 인텔리겐치아들의 농촌 계몽운동이었는데(‘농활’의 원조이다), 그 진보적/혁명적 취지와는 달리 이 운동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농민들의 고발로 이들은 (다행히 총살을 면할 경우) 대부분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요구, 즉 캐비어 혹은 거위간의 맛을 아는 소수의 요구와 캐비어가 뭔지, 거위간이 뭔지도 모르고 그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다수의 요구는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이 계몽된 소수는 나로드가 무얼 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레닌의 오류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플레하노프는 레닌에게 이렇게 말했죠. “자넨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걸세.” 그러자 레닌이 말하길, “아니요, 혁명은 역사의 산파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갈 겁니다.”

하지만, 좌건 우건 갑작스런 진동(*혁명)은 매번 재난을 초래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1990년대에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체험했습니다. 혁명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로의 길로 진입한다는 게 그런 것이죠. 무엇을 얻게 되었습니까? 다수의 절대 빈곤화와 국가 체제의 완전한 붕괴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아무런 구심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나로드에게 자유는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가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돈을 빨리 벌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고작 한줌의 무리들뿐이죠(*이 한줌의 무리를 ‘노브이 루스끼’, 즉 ‘새로운 러시아인’ 혹은 ‘신종 러시아인’이라고 부른다. 그 말의 함의는 그들이 ‘본래의 러시아인’이 아니란 얘기다. 그들은 자본주의 이행기에 한몫잡음으로써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현 러시아 사회의 새로운 ‘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모스크바에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 많은, 비싼 독일차들이 굴러다니는 건 이들의 과시적인 부(富) 덕분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국민의 요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얻게 된 결과입니다. 누가 국민의 요구를 이해했을까요? 스탈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한번은 서기장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소파에 누워서 대답하기를, “어머니, 짜르가 무엇인지는 아시죠?” “그럼, 그럼, 알지.” “그게요, 그거랑 거의 비슷한 거예요.” 스탈린은 나로드의 요구가 절대권력에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고, 러시아인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비극이 아닙니다. 짜르가 폭군이 되느냐, 성군이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기자들) 당신의 생각대로 한다면, 우리는 짜르시대로 후퇴해야만 할 거 같군요. 자유로운 사회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왜 자유 곧 전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1990년에 자유로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린 러시아 나로드에게 그들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우리가 얻은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으로 전진했습니까? 대답을 해보세요! 러시아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돼 버렸어요. 그걸 타고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기자들) 가긴 가겠죠. 하지만, 문제는 어디로, 어떤 속도로 가느냐겠죠.

-그게 그겁니다. 요컨대, 자유가 반드시 전진은 아니라는 것이죠… 1990년대 초의 그루지야를 예로 들어봅시다. 거기서는 절대 자유선거에 의해서 감사후루지아(Gamsakhurdia)가 선출됐었죠(*그때 선출된 대통령인 모양이다. 사진). 98%가 표를 던졌습니다. 그가 시작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루지야 인텔리겐치아의 절반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게 전진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감사후르지아는 실상, 권력의 찬탈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루지야가 전진했던가요?

-보통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자유와 안전 중에서 어느 걸 선택할 것인지.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자들) 안전.

-당연하죠! 러시아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보살핌입니다. 나의 증조부이자 저명한 철학자 표트르 콘찰로프스키는, 1940년대에 파리에서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쓰셨더랬죠. “자유란 위대한 선물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축복은 아니다. 자유를 잘 다룬다는 건 원자력 에너지를 다루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때문에, 자유가 러시아인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만족스런 조건이 주어진다면, 그는 동물이 될 겁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아있기 위해서는 불만스런 조건이 필요합니다. 물론,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 말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적당히 추울 때 적극적으로 일을 합니다. 어째서 3,000킬로미터의 적도 부근이 절대 빈곤지대입니까? 거긴 덥거든요. 당신이 누워 있으면 나무에서 바나나가 떨어집니다. 그걸 먹으면 되고, 일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너무 덥기 때문에. 하지만, 좀 추운 곳으로 가면, 일을 해야 따뜻해질 수 있고, 그런 곳에서 정상적인 부르주아사회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이 ‘만족스런 조건들’과 ‘불만스런 조건들’ 사이에서 균형을 창출해야만 합니다. 국가(=정부)란 것 자체가 나로드를 보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죠. 그건 커다란 환상입니다. 국가란 인간이 동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국가는 인간의 탐욕과 본능을 제한합니다. 인간은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니까요…

 

 


 

유감스럽게도, 러시아 문화의 몰락은 넘쳐나는 정보가 서서히 인간의 정신적 체험을 잠식해가고 있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 체험이 더 증가하는 게 아니라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줄어듭니다. 인터넷, 이건 쓰레기통입니다. TV도 쓰레기통이고, ‘맥도널드’도 쓰레기통입니다(*쓰레기가 정말 많이 나온다!). 이런 게, 오늘날 전세계에 퍼져나가고 있는 ‘미국식 대중문화’이고, 이건 ‘미국문화’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위대한 시인이 출현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에게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오늘날엔 영화도 끝났고, 예술은 자신의 권위와 대중에 대한 매혹을 잃었습니다.



 

 

 

프랑수아 모리악이 말한 대로입니다. “20세기는 축구의 세기가 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약간 빗나갔는데,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가 스포츠의 세기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돈이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까? 축구, 테니스, 야구, 농구, 각종 레이스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슈마허나 베컴은 톰 크루즈만큼이나, 더는 아니더라도, 유명합니다. 왜인가요? 돈이죠! 시장은 이미 예술에서 스포츠로 옮겨갔습니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선 다행스런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발가락으로나 썼을 법한 작품을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든가, 원칙적으로 배우로서의 조건이 안되면서 마지막 사무라이를 연기하는 것보다는(*톰 크루즈를 염두에 둔 얘기 같다. 원한이 좀 있는지?) 잘 뛰어다니는 게 그래도 나으니까.



-(기자들) 러시아의 영혼은 남아있습니까?

-러시아의 영혼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영혼이 반드시 청렴을 뜻하는 걸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돈은 악이고, 영혼은 선이라는 이분법은 큰 오류입니다. 영혼이 사악할 수도 있고, 반면에 돈이 순수할 수도 있으니까요.<끝>

여기까지이다. 이상, 콘찰로프스키의 다소 ‘도발적인’ 견해에 대해서, 독일 학생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헤겔의 후손들답게(그들이 헤겔을 거명하진 않았지만), 인류사의 진보는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전제가 그들의 뇌리에는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그것이 '러시아 영혼'과 대비되는 '독일 정신'이다). 하지만, 나는 콘찰로프스키에게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동의는 그의 주장에 깔려있는 ‘역설’에 대한 동의까지 포함한 것이기에 ‘전적’이다. 그가 말하는 러시아가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이다. 전제주의나 독재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자본의 ‘합리적인’ 독재보다 더 나쁜 것일까? 이 질문은 “과연 후세인이 부시보다 더 나쁜 놈일까?”란 질문과 같은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이 ‘자본’(대부분 유태계 자본이라고 한다)의 독재를 얼마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국가’이다. 이 국가란 푸틴의 국가관료체제를 말하는바, 그래도 그 점이 자본과 결탁했던 옐친과는 다른 푸틴의 면모이다. 그리고, 현 러시아적 문맥에서, ‘자유에 대한 요구’는 현재 감옥에 있는 ‘기업가’ “호도르코프스키에게 자유를!”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요즘(물론 재작년 얘기이다) 씨아일랜드에서 열리고 있는 G8(러시아언론은 ‘G7+1’ 대신에 ‘G8’이란 표현을 쓴다) 정상회담 얼마 전에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상황을 주제로 미의회에서 열린 청문회(헬싱키위원회)에서도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은 도마에 올랐었다.



이 청문회에는 세계 체스챔피언으로 이름을 날렸던 카스파로프가 푸틴을 맹비난하는 증인으로 나서 눈길을 끌었는데, 이 소식을 전하는 <이즈베스찌야>의 기사 타이틀은 ‘카스파로프 대 푸틴’이었다. 카스파로프는 푸틴이 임기중에 개헌을 밀어붙이고 다음 대선에 또 나올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미리부터 전개하고 있다. 현행 러시아 헌법상 대통령은 1회에 한하여 연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난 3월의 대선에서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은 다음 대선(2008년)에는 출마할 수 없다. 푸틴에 대한 불만의 대부분은 몇몇 기업인들과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는바, 탈세혐의로 체포된 러시아 최대의 부호(富豪)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요컨대, 일부 러시아의 지식인들과 미의회 지도자들이 보기에, 러시아는 정치적 경쟁자라고 해서 (무죄한!) 기업가를 감금하는 나라, 그래서 아직도 ‘덜 민주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국같이 ‘민주적인’ 나라에서는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기업인들의 기부금으로 정치하면서 대통령도 되고, 대통령이 되어선 기업들 뒤를 봐주기 위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전쟁도 서슴지 않는 나라야말로 ‘자유주의’의 천국 아닌가?(이 ‘천국보다 낯선’ 천국의 일상에 대해서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자세하게 보고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민주적인’ 나라가 ‘덜 민주적인’ 나라보다 과연 ‘더 좋은’ 나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사실, 러시아에서 ‘자유’나 ‘민주주의’는 이제 겨우 십수 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걸음마 단계인 셈. 다른 한편으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공부해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현장학습장’이다. 여기선 ‘민주주의의 발생과 진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민주주의의 ‘빅뱅’ 현장처럼. 그러니, 민주주의를 공부하려면 미국에 갈 게 아니라, 러시아에 와야 할 것이다(물론 한국도 민주주의의 생생한 ‘학교’이지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민주주의가 어떤 공모관계에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유에 대한 ‘원자론적’ 이해가 아니라(“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란 숭고한 구호들에서처럼), 자유라는 가치가 놓여있는 시스템에 대한 ‘체계론적’ 이해이다.



지난 화요일(6월 8일) <이즈베스찌야>의 쟁점란의 주제도 요즘 유행하는 ‘자유’였다. 거기에서는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짐작하게 하는 설문결과도 제시됐는데, 열거된 단어들 가운데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는 무엇인가란 설문의 결과, 1위는 질서(61%)였다. 이어서 2위가 정의(53%)이고, 자유(43%), 애국심(40%), 안정성(40%), 러시아인(34%) 등이 뒤를 이었다. 민주주의(19%)가 15위이고, 시장(13%)이 19위로서 20위인 사회주의(12%)와 비슷했다. 35개의 단어 중 1%로 공동 꼴찌를 차지한 단어들은 개인주의, 혁명,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혁명’이며, 러시아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자본주의’ 모두 ‘혁명’적인 걸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이 ‘자본주의 혁명’에 대한 콘찰로프스키의 견해를 상기해 보라).

러시아인들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는 “정의-안정성-노동-평등-집단주의”를 내세우는 사회주의(19%)였고, 민족주의(12%), 자유주의(8%), 공산주의(5%)의 순이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지만, “자유-시장-서구-비즈니스-민주주의”라는 개념쌍들로 구성된 ‘자유주의’보다는 ‘사회주의’를 훨씬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콘찰로프스키의 견해는 특별히 ‘도발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정의나 평등이 없는 자유주의’보다는 ‘자유나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주의’에 더 호감을 갖고 있는 다수 러시아인들의 ‘주류적인’ 정서를 ‘역설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겐 ‘병역’만큼이나 신성한 ‘민주주의’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지지는 생각보다 낮다. 장년세대는 아직도 1970년대 브레즈네프 시대에 대한 ‘시대착오적 환상’을 갖고 있다. 얼마전 이 브레즈네프와 그의 시대에 대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기도 했다. 우리의 ‘박정희 판타지’와 비슷한 현상).

자유(주의)에 대한 체계론적 이해라는 것은 그것을 “자유-시장-서구-비즈니스-민주주의”처럼 일련의 개념적-가치론적 사슬 속에서 이해하는 걸 말한다. 이러한 사슬은 물론 다른 모든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발생론적, 계보학적 근거를 갖는다. 이것이 자유에 대한 나의 논점이다. 그에 따를 때,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는바, ‘장사꾼(부르주아)들의 자유’와 ‘농부들의 자유’(러시아의 경우엔 ‘나로드의 자유’)가 그것이며,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그걸 뭉뚱그려 ‘시민의 자유’라고 하는데(이 ‘시민’은 오지랖이 넓어서 재벌도 시민이고, 백수도 시민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다른 ‘자유’가 혼종돼 있어서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러시아어에서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용하게도 두 종류의 자유를 적절하게 구별해서 표시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 ‘볼랴(volya)’와 ‘스바보다(svoboda)’가 그것이다. ‘볼랴’는 ‘의지로서의 자유’이며, ‘스바보다’는 ‘법적인 권리로서의 자유’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농부들이 요구하는 자유는 ‘볼랴’이며, ‘스바보다’는 장사꾼들이 요구하는 자유이다. 영어의 경우 ‘freedom’과 ‘liberty’가 거의 구별없이 쓰이는 듯하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각각 ‘볼랴’와 ‘스바보다’에 대응될 수 있다. Free-will이란 조어에서 볼 수 있듯이, freedom에는 생래적/자발적 의지의 관철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으며, 'liberty'는 'liberalism'(자유주의)과 연계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이 리버럴리즘은 콘찰로프스키가 이의를 제기하는바, ‘진보주의’란 함의도 갖는다.



 

 

 

자유가 하나의 이념으로서 전면화되는 것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이다(*대혁명의 이념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에도 파급되며, 1825년 12월의 ‘제카브리스트 봉기(=12월당 봉기)’를 낳는다). 그리고 이념으로서의 자유, 혹은 ‘자유주의’는 혁명의 주체인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농부들도 장사꾼(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요구하지만, 그 요구는 내 생각에 ‘이념화’될 수 없다. 그러니까 ‘농부들의 자유주의’란 말은 넌센스이다. 즉 ‘스바보다’는 ‘이즘’이 될 수 있지만, ‘볼랴’는 ‘이즘’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콘찰로프스키가 들고 있는 예에서처럼, 농부들에게 자유란 자기 말과 천막이 있는 걸로 충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논밭을 소유한 걸로 충분한 것이 농부의 자유이다. 그것은 ‘더 많이!’(볼셰)라는 요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더 많이!’라는 건 장사꾼들의 요구이며, 볼셰비키들의 요구이다.



 

 

 

<근대성의 구조>의 저자가 잘 보여준 바대로, ‘기업가 정신’과 ‘혁명가 정신’은 동일하다. 레닌은 탁월한 혁명 사업가이며, 예컨대 정주영은 비즈니스에서의 특출한 레닌주의자이다. 그들은 밀가루 없이도 빵을 만들어낸다. 그들을 묶어주는 키워드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투(project)로서의 헌신이고 투자(project)이다. 그리고 이 헌신/투자는 중단 없는 과정이다. 편집증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공산주의’란 미래, ‘초일류기업’이란 미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멀미’를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비즈니스로서의 혁명’의 질주, 혹은 ‘혁명으로서의 비즈니스’의 질주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농민의 마인드, 나로드의 마인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닷새 일하고, 이틀 쉬는 걸로 더 바랄 게 없는 (순환적인) 삶! 

‘자유’는 언제 ‘자유주의’가 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주어졌다. 그것이 ‘돈(=근대 자본주의)’과 결합될 때이다. 농민의 자유가 ‘농민-영주’, ‘나로드-국가’라는 2자적 관계에서 문제되는 것이라면, 장사꾼의 자유는 돈을 매개로 한 3자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모든 형이상학의 문제가 1이냐 2냐의 문제로 환원된다면, 모든 정신분석학의 문제는 2냐 3이냐의 문제로 환원된다). 즉, ‘부르주아-돈-국가’. 라캉-지젝이 즐겨쓰는 도식을 빌어와서 말하자면, 농민의 자유는 충동적 자유, 즉 충동으로서의 자유라면(2자적 관계에서 욕망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에), 장사꾼의 자유는 욕망으로서의 자유이다(이때의 자유는 항상 자유에 대한 금지로서의 ‘법’과 연관된다. 금지가 없으면 욕망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의 제한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그래서, 법과 자유는 서로 길항하지만 공모적이다). 이 ‘자유에 대한 충동’과 ‘자유에 대한 욕망’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중요한 건 모든 사람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콘찰로프스키는 같은 생각을 캐비어와 거위간에 대한 ‘요구’는 다를 수 있다는 사례를 들어서 말했다(욕구로서의 자유!). 비록 요구(필요)와 욕망이 구별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나는 콘찰로프스키의 논변이 궤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보 이반’의 나라 러시아에는 욕망으로서의 자유(=돈)에 대한 요구가 없다는 것이며, 그런 자유(=돈)는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발상의 근거가 장사꾼도 아니고 인텔리겐치아도 아닌 ‘나로드’(=농민)이다. 나로드의 자유는 인텔리겐치아나, 시민(부르주아)의 자유와는 다르다는 것(러시아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19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형성되며, 서구에 비해서 상당히 미약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나는 그에게 동의한다(물론 한국은 러시아와는 또 사정이 다르지만)...

06. 0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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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06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워 어려워요

로쟈 2006-02-0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좀 길어졌지만, 제 의견은 '자유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happyant 2006-02-0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ostrov 2008-12-29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재미있어서 훔쳐다 놓(http://blog.naver.com/ostrov/140060310614)습니다!

헛헛헛헛 2009-09-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