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나티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의 '제1부 칸트'를 지난번에 이어서 계속해 읽으며 정리해본다, 아니 읽은 걸 정리해둔다. 제1장의 2절 '문예비평과 초월론적 비판'의 내용을 따라가 보려고 하는데, 고진은 어떤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칸트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리부터 챙겨두자. 서양근대철학회 편 <서양근대철학>(창비, 2001)에서 칸트에 관한 장의 한 대목이다(아마 다른 서양철학사들에서의 정리도 엇비슷할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이 순수이론적 이성에 대한 고찰로서 진리(眞)의 인식 문제를 다루고, <실천이성비판>이 도덕(善)의 실천문제를 논한 것이라면, 남은 문제는 이론과 실천, 현상세계와 이념세계는 서로 어던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술에서의 미적 판단(美)과 자연의 합목적성의 문제로 집약되어 1790년에 출간된 <판단력비판>에서 논의된다. 이 세 비판서는 인간의 이론적 인식과 도덕적 실천 그리고 감정과 정서를 다룸으로써 진․선․미 또는 인간의 인식과 의지와 감정의 세 영역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357-8쪽)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것으로 고진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러한 세 영역의 구분이 칸트의 비판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칸트의 세 비판은 각기 과학 인식, 도덕, 예술(과 생물학)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칸트는 각 영역의 특이성과 그것들의 관계구조를 밝힌다. 그러나 칸트 이후의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은 그런 구분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칸트의 ‘비판’으로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칸트 이전과 이후에 과학 인식, 도덕, 예술 등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분에 기초해서 칸트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구분 자체를 초래한 칸트의 ‘비판’을 읽어야 한다.”(74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영역본에 "One should read the Kantian critique that itself created the categorization."라고 돼 있다. 내가 읽기에 이 문장은 "우리는 그러한 구분(범주)를 창조해낸 칸트의 비판 자체를 읽어야 한다" 정도의 뜻이다. 고진의 논점을 다시 확인하면 이렇다: 칸트가 과학, 도덕, 예술의 관계를 명시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칸트가 제1비판, 제2비판에서 드러낸 ‘한계’를 제3비판에서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칸트가 드러낸 것은 이들 셋이 구조적인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상, 물자체, 초월론적 가상이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외해도 성립하지 않는, 라캉의 비유로 말하자면 '보로메오의 고리'를 이룬다는 것과 대응하고 있다.”(75쪽) 

 

라캉의 '보로매오의 고리'는 흔히 ‘보로메오의 매듭’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상상계(I)와 상징계(S), 그리고 실재계(R)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는 모델. 칸트에게서 감성과 오성, 그리고 상상력(구상력) 간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인데, 만약에 그렇다면, 칸트의 '비판'은 순차적인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제3비판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미 완결을 본 것이 된다. 이에 착안하여 고진은 <순수이성비판>에서 <판단력비판>의 문제틀을 독해/확인하고자 하는 것. 그렇다면, <판단력비판>과 마찬가지로, <순수이성비판>의 기원 또한 예술의 문제에 놓여 있다.

"칸트의 '비판'은 애초에 예술의 문제에서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칸트의 비판이 어디서 왔느냐에 대해서는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어원적 탐색이 이다. 하지만 어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흔히 가까운 기원을 은폐한다. 오히려 나는 칸트의 비판(critique)은 말 그대로 비평(cirticism)에서,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초한 고전 미학이 통용되지 않는 상업적 저널리즘에서 성립하는 비평, 즉 누구도 결말을 지을 수 없는 평가를 둘러싼 ‘아레나’(투기장)에서 왔다고 생각한다.”(75쪽, 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흥미롭다:"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 학파의 형이상학 아래 있던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인성론>의 흄이라고 썼다.(...) 파이잉거에 따르면, 칸트 자신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칸트를 깨어나게 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사상가 홈(Henry Home; 1696-1782)의 <비평의 원리>(1762)였다고 한다(<순수이성비판 주해>, 1921)." 흄의 <인성론>, 즉 <인간본성의 논고>에 대한 해제는 이준호 교수의 <데이비드 흄>(살림, 2005)를 참조. 그런데, 보다 문제적인 인물은 이 아니라 이라는 것(위의 사진).  

참고로 한 백과사전의 짤막한 설명은 이렇다. "KAMES, HENRY HOME, LORD [Kames, Henry Home, Lord] , 1696-1782, Scottish judge and philosopher. A man of broad interests and a wide-ranging intellect, his works included dissertations on Scottish law, agriculture, and problems of moral and aesthetic philosophy. Among his writings were Introduction to the Art of Thinking (1761) and Elements of Criticism (1762)."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이는 한스 파이잉거(Hans Vaihinger)인데(세번째 사진), 그가 근거로서 인용하고 있는 것은 <논리학>(1782)의 이런 대목이다: "홈이 미학을 비판이라고 명명한 것은 옳다. 미학은 판단을 충분하게 규정하는 선천적 규칙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역본에는 "Home has more correctly called Aesthetics Criticism, because it does not, like Logic, furnish a priori rules."(37쪽)이라고 돼 있다. 여기서 칸트의 비판(critique)이 유래했을 거라는 얘기.  



 

 

  

지나가는 김에 번역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예전에 일역본을 따라 '선천적'으로 번역되던 'a piori'는 요즘 '선험적'이란 역어로 옮겨진다. (백종현 교수의 제안에 따라) '선험적/선천적'이 '초월적/선험적'이라고 옮겨지는 식이다. 하지만, 아직도 시중에 나와 있는, 국내 1세대 칸트학자들의 <순수이성비판> 번역본들은 '선험적/선천적'을 취하고 있고, 칸트철학을 '선험철학'으로 규정한다. 백종현 교수 등에 따를 경우엔 '초월철학'이라고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용어상의 혼란은 정리된 게 아니어서, 가장 최근에 나온 <순수이성비판> 해설서로 백종현의 <존재와 진리 - 칸트 순수이성비판의 근본문제 >(철학과현실사, 2000/2003)와 바움가르트너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읽기>(철학과현실사, 2004)는 각각 '초월철학'과 '선험철학'으로 옮기고 있다. 해서 번역서들에서 '선험적'이란 말이 나오면 어떤 계열에 따른 번역인가를 확인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두 가지 '체계'가 있는 걸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일반 독자들로선 불편하다.

아무튼 국역본 <트랜스크리틱>은 일역본의 용례를 따른다. 아직 새로운 관례에 따르는 새 번역본 <순수이성비판>이 아직도 출간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다(백종현 교수의 <실천이성비판> 번역은 2002년에 출간된 바 있다. 개인적으론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을 '윤리형이상학'으로 '의역'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들만의 철학', '그들만의 칸트'는 언제쯤 '우리의 칸트', '우리 세대의 칸트'가 될 수 있을까?   

다시 고진으로 돌아오면, “칸트가 홈에게서 배운 것은 ‘취미판단’, 즉 미학적 취미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반성과 그 근거에 대한 연구였다. 홈은 취미판단의 보편성, 즉 미추의 기준을 찾아 그것을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원리에서 도출해내려고 애를 썼으며, 미추에 관한 인간 감수성의 선천성(=선험성)을 주장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칸트가 모범으로 삼았다는 얘기.  

칸트 전공자들의 문헌들을 별반 읽어본 바 없지만, 헨리 홈에 대한 내용은 국내 학자들에게서 거의 다루어진 바가 없지 않나 싶다(국내에 나와 있는 해설서들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해서 고진의 이러한 주장은 신선한데, 사실 이러한 견해는 고진 자신도 일본의 칸트 학자 하마다 요시후미에게 힘입은 것이다. 하마다의 <칸트 윤리학의 성립>(1981)이란 저작이 말하자면, '연기자' 고진에게 차려진 '밥상'인데, 하마다에 따르면 칸트가 '비평'이란 말을 인간의 이성 능력 자체의 근본적 음미를 의미하는 독자적인 '비판' 개념으로 다시 파악하여 자신의 용어로 사용한 것이라고. 

 

 

 

 

 

 

 

 

 

홈과 칸트에게서 문제된 것은 취미판단의 주관성(개인성) 주장과 보편성 요구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때 칸트가 도입하는 것은 일반성과 보편성의 구별이다. 그는 "미에 관한 취미판단이 확립하려는 것이나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 규칙이 아니라) 보편적 규칙"임을 <판단력비판>에서 적시한다(이 <판단력비판> 또한 새로운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만한 새 번역본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어떤 무언가를 '미'라고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규칙"은 없지만, 단순한 쾌적함과 구별되는 취미판단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보편성의 보증을 칸트는 '공통감각(common sense; sensus communis)'에서 찾는다.    

 

<새로운 학문>(동문선, 1997)의 저자 G. 비코(1668-1744)에 따르면, 공통감각이란 "어떤 계급, 어떤 민족, 어떤 국가, 인류 전원이 공유하는, 조금의 반성도 수반하지 않는 판단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감각은 역사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라면, 보편성을 보증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보편성이 있다면 그러한 다수의 공통감각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딜레마가 취미판단의 영역으로서 예술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확실히 칸트는 자연과학, 도덕성, 예술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 자체는 그의 목적지점(terminus ad quem)이 아니다. 왜냐하면 칸트는 어디서든 보편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80쪽, 굵은 글씨는 국역본에 빠진 부분을 영역본 39쪽을 참조하여 채워넣은 것이다). 따라서, 미적 판단에서 보편성이 의심스럽다면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칸트는 거기서 출발했다. 칸트의 '비판' 근본적인 것은, 우선 모든 것을 취미판단에서 마주친 문제에서부터 다시 생각한 데 있었다."(80쪽, 강조는 나의 것)

 

이 점이 고진의 칸트 읽기에서 일차적으로 강조되는,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나로선 이것을 고진의 첫번째 테제라고 부르고 싶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판단력비판>과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읽어내기'이다). 영문으로 반복하자면, "The radicalism of his[=Kant's] critique exists in that he reconsidered the question of universality from the vantage of the judgment of taste."

 

이어지는 내용은 그렇다면, 공통감각이란 무엇이냐 라는 것. 고진은 이 공통감각을 개인의 쾌/불쾌, 쾌적함과는 구별하면서 '공동의 언어게임'의 문제로 재규정한다(이에 대해서는 조금 나중에 '타자'의 문제와 함께 상술된다). 이럴 때 "취미판단에서의 보편성은 서로 다른 규칙체계를 소유하는 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이다."(81쪽) 그리고 이 취미판단에서의 보편성 요구는 모든 종합판단에 흐르는 공통된 문제이므로 흔히 '대상에 대한 몰관심성'에서 미가 발견된다고 할 때의 몰관심성, 혹은 관심을 괄호 안에 넣기는 지적, 도덕적 관심의 경우에도 두루 적용된다.

 

그러니까 "칸트가 취미판단의 특성으로 삼은 것은 인식에 대해서도 도덕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82쪽) 어떤 식으로? 과학에서의 대상인식에서는 도덕적, 미적 판단을 괄호에 넣고, 도덕적 영역에서는 쾌나 행복을 괄호에 넣는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 참인가 거짓인가, 선인가 악인가, 쾌인가 불쾌인가라는 적어도 세 영역에서 동시에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괄호넣기(몰관심성)에 의해서 세 가지 영역을 구분해내는 것이다.

 

즉, "인식적, 도덕적, 미적 영역은 어떤 태도변경(초월론적 환원)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고진의 두번째 테제라고 해둔다. 반복하자면, "[C]ognitive, moral, and aesthetic domains are all constituted by a change of attitude (i.e., transcendetal reduction); and in the beginning these domains do not exist in and of themselves."(41쪽)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순수이성비판>에서 <판단력 비판>으로의 이행을 찾아내는 것은 옳지 않다. <순수이성비판>은 이미 문예비평이 준 곤란함에 입각해서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순수이성비판>을 그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는 일이다."(83쪽) 고진이 리오타르를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아렌트는 <판단력비판>을 정치학의 원리로 읽으려고 했고(<칸트의 정치철학강의>), 리오타르는 거기서 '메타언어의 설정이 없는 언어게임간의 조정'을 보려고 했다(<열광>). 그것은 사실상 휴머니즘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보편성을 기껏해야  '공통감각'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일이다."(83쪽)

 

마지막 문장엔 착오이긴 하지만 문제가 되는 오역이 포함돼 있는데, 영어본을 옮기면 이렇다: "But Lyotard's reading is a regression to Hume insofar as it considers the issue of universality to be simply one of the coalition among common senses."(42쪽) 즉, 국역본은 '흄'을 '휴머니즘'으로 잘못 옮겼다. 역자는 후기에서 국역본 <트랜스크리틱>이 실질적으로는 일어본보다 영역본에 더 가깝다고 했지만, 영역본과의 대조는 소홀히 한 것 같아서 아쉽다(대조했더라면 '음역' 과정에서 생기는 이런 오역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글을 너무 오래 끌었다. 이 2절도 아직 다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이어지는 3절 '시차(視差)와 물자체'와 함께 다음에 마저 다루기로 한다. 앞에서 고진의 두 가지 테제를 내 식으로 정리했는데, 반복하자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순수이성비판>을 그러한 관점에서 다시 읽는 일이다."

 

06. 01. 20 -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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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2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진도가 팍팍 나갔으면 좋겠네요:)

로쟈 2006-01-2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을 가방에 다 싸들고 다닐 수가 없는 데다가(학교에 놔두고 왔습니다) 인터넷 사용에 제한이 있어서 진도는 아마 더디 나갈 것 같습니다. 양해해주시길...

yoonta 2006-01-24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랜스크리틱은 아직 읽지않고 있어서 일단 님이 정리한 글로 간접적으로 트랜스크리틱을 겸험하고 있는데요..

님의 글을 읽다가 한가지 의문점이 떠오르는데...
칸트가 취미판단의 '보편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취미판단의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공통감각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인가요...아니면 취미판단의 주관성과 보편성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취미판단의 보편성을 공통감각을 통해 제시하는 것인가요?

전자와 후자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보이는데요..취미판단의 주관성이 공통감각을 통해서 취미판단의 보편성속으로 환원할수있다고 보는 것인지(공통감각=취미판단의 보편성이라고 보는건지 아니면 공통감각을 통해 취미판단의 보편성으로 이행되는것인지도 애매하네요) 아니면 취미판단의 주관성/보편성의 이원적 대립이 공통감각이라고 하는 제3의 어떤것을 통해 해소되는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군요...

고진이 강조하고 싶은 칸트의 중요지점으로 '공통감각'이 제시되는 것 같은데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a priori)이라는 말이나 초월적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와도 연결되는 문제인것도 같고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과도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고 보니 아직 이 페이퍼가 완료가 된게 아니네요.. 로쟈님 페이퍼가 완성될때까지 좀더 지켜봐야겠군요..^^

로쟈 2006-01-2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좀더 지켜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책들이 학교에 있어서 매번 지체되는군요(오늘도 휴업입니다). 물론 <트랜스크리틱>을 직접 읽어보시는 게 더 빠르겠네요. 칸트에 관한 건 20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금방 읽힙니다...

lastmarx 2006-02-1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너무나도 즐겁게 일독했습니다. 다시 정독을 할 생각입니다. 앞부분 칸트의 '비판'은 솔직히 낯설었으나 고진의 비판, 비평은 명쾌했습니다. 뒷부분 맑스의 비판, 비평은 지금까지 그 어느 맑스 해설자보다 넓고 깊은 인식을 보여줍니다. 이 책을 읽고 다른 맑스주의자들의 논리와 주장을 보면 시시하게 느껴질 듯합니다. 로쟈님의 노트와 영역본 대조는 큰 도움이 됩니다. 천천히 전개되더라도 정확하게 논평, 정리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거의 완벽한 리뷰를 하셨지만 특히 이 책만큼은 더욱 기대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로쟈 2006-0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을 '발견'하신 건가요? 맑스에 대한 2부를 정리해주시면, 저랑 '계산'이 맞을 거 같습니다.^^ '완벽한 리뷰'라기보다는 '굼뜬 리뷰'인데, 언제 다 기어가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장애물들이 워낙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