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제57회 칸느영화제가 폐막됐다. 나는 토요일밤 이곳의 심야뉴스를 통해서, 마이클 무어가 그랑프리를 받았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수상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TV뉴스를 들을 때는 일단 화면에 비치는 걸 토대로 ‘들리는’ 단어들을 재구성해보는 것인데,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의 수상에 대한 장황한 소식을 전하면서도 두 번째 상(심사위원상)을 받은 감독과 영화에 대해서는 단 한 장면도 할애되지 않았고,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화면에 장만옥(메이 첸)의 모습이 잡히길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나 짐작해본 정도가 뉴스를 통해서 내가 받은 ‘인상’의 전부였다(수상소감을 말하는 장만옥이 아니라 객석에 앉아 있는 장만옥만 카메라에 잡았기 때문이다. ‘메이 첸’이 장만옥의 이명(異名)이란 걸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이번주 월요일자 신문을 보면서이다).
-일요일 저녁에 사업을 하는 친구와 몇 주만에 만나서 같이 산책을 하고 맥주를 마셨다. 산책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인데, 그건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가장 흔하게 쓰는 회화표현이 “같이 차 마실래요?”와 “같이 산책할래요?”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도심에 나무와 숲, 공원이 많기 때문에 산책을 즐길 만한 여건도 된다. 우리처럼 매연을 마시면서 산책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대로에서 몇 걸음만 옆길로 새면, 바로 숲속이고 새들이 지저귀는 ‘자연’의 품이다. 물론 비가 오는 날 산책하는 건(영화제목대로, ‘우중산책’!) 권할 만하지 않지만.
-비가 흩뿌리지 않아도 잔뜩 흐린 날씨였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 출발하여 가까이에 있는 작은 호수(어느 정도 크기의 못이면 호수로 쳐주는지 모르겠지만)를 한 바퀴 돌아서 도로변을 걷다가 숲길로 빠졌다. 그가 자주 애용하는 산책 코스라고 하는데, 저녁에 혼자 돌아다닐 때는 골프채를 들고 간다고(혹 다섯 명이 시비를 걸어와도 문제없다고 한다!). 호수를 한 바퀴 돈 건 가끔 그곳에서 낚시를 즐기는 북한 외교관들을 볼 수 있다고 해서였다. 북한대사관 건물은 바로 호수 건너편에 있었는데, 이날은 흐린 날씨 탓인지(외교관들이 바쁠 일은 없을 것이기에) ‘북녘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다른 유학생의 말에 의하면, 크레믈린 광장에서도 가끔 북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번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었더니 황급히 자리를 피하더라고. 덧붙여, 이곳의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근래에 차를 새 걸로 다 바꿨다고 한다.
-숲길을 20분쯤 더 걸어가니까 바로 엠게우(모스크바대학) 정문 앞 광장과 연결되었다. 알고보니, 이전에 한 유학생이 한번 가보라던 산책로를 거꾸로 걸어온 셈이었다. 바로 앞이 참새언덕. 사전을 보면, 이 ‘참새언덕’은 엠게우가 위치하고 있는 ‘레닌언덕’의 옛 지명(地名)이다. 그렇다면 그 지명이 레닌언덕으로 완전히 대체되지는 않은 셈인데, 마치 ‘러시아 혁명’이 ‘미완의 기획’으로 남은 것과 상관적인,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레닌은 끝내 이 언덕에서 참새들을 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은 건 일종의 타협인데, 대로(大路)는 ‘레닌’이 차지하고 전망은 ‘참새’가 차지하는 식. 우편물의 주소엔 ‘레닌언덕’이라고 쓰지만, 전철역 이름은 또 ‘참새언덕’이다. 해서, 혁명은 혁명이고, 참새는 참새이다(유구한 참새들의 일상이여!).
-이전에 소개한 바대로, 참새언덕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고, 그런 만큼 가장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맑은 날이면 사람들이 북적대지만, 이날은 흐린 날씨 탓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다. 나는 친구가 안내하는 대로, 야외 레스토랑에서 러시아산 생맥주 두 잔과 러시아식 고치구이인 샤슬릭을 안주로 먹었다. 나중에 계산하는 걸 보니, 샤슬릭 한 접시에 250루블, 즉 만원이었다. 사업하는 친구도 굉장히 비싸다면서, 가격을 한번 더 확인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망’도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칸느영화제 소식을 아느냐고 물으니까(친구는 낮에 사무실에 들렀다가 오던 길이었다), <올드보이>가 심사위원상을 받아서 한국은 난리란 얘기를 했다(왜 아니겠는가?). 타란티노가 좋은 일 한번 한 셈인데, 사실 (타란티노의 취향을 고려한) <올드보이>의 수상가능성은 (한국에서야 더 잘 알겠지만) 이미 외국 언론쪽에서도 점쳐온 것이었다. <이즈베스찌야>의 영화제 취재기자이자 영화담당 기자인 마리야 쿱쉬노바에 의하면, 영화제 중간에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밀고 있다는 소식을 이미 <버라이어티>지가 보도했고, 쿱시노바 역시 <올드보이>가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고 예견했었다.
-그밖에 영화계쪽은 잘 모르는 친구가 전해준 소식은 일본의 14세 배우가 최연소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게 전부였다(나중에 신문을 보고 안 이름은 ‘이유라 야기라’인데, 러시아식 표기라 우리와는 다를 수 있다). 홍콩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했는데(아마 ‘장만옥’을 모르든가, ‘메이 첸’을 모르든가), 그건 그럴 만했다. 알고 보니까 프랑스 영화에 출연한 걸로 수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장만옥은 이전에도 프랑스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이마베프> 같은. 어쨌든 홍콩영화의 ‘디바’ 한 명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축하할 일이다(문득 든 생각이지만, 장만옥은 관금붕의 <완령옥>으로도 어디서 주연상을 받았는데, 그게 국내영화제였는지 국제영화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이 최초 수상이라면,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이마베프>(1996)는 <클린> 이전에 국내에 유일하게 비디오로 소개됐던 영화인데, 아샤야스가 찍은 영화라는 걸 나는 나중에 알았다. 영화는 장만옥이 주연을 맡았었는데, 감독과 주연배우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후 결혼에까지 골인하지만 3년 후에 다시 헤어진다고. 즉, <클린>(2004)는 헤어진 전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뒤늦게) 찍은 영화이다. 그 사이에 아샤야스가 내놓은 영화가 <데몬러버>(2002)인데, 나는 작년 겨울인가 모스크바에서 TV로 이 영화를 보았다. '산업스파이에 관한 사이버스릴러'인데, 씨네21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데몬러버>는 일본 성인 아니메의 세계배급권을 협상하는 프랑스 다국적 기업의 여성 간부가 거대 인터넷 기업의 사주를 받아 스파이활동을 하며 야심을 키우다가 온라인 SM클럽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이야기"인데, "관객과 평론가들은 <데몬러버>의 형식적 '자폭'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영화가 포르노적 이미지를 비판하는 것인지 탐닉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꼬집었다."(김혜리 기자)



나 또한 내가 유일하게 본 아사야스의 영화를 불쾌하게(더불어 정신없게) 보았기에 그에 대한 인상이 그닥 좋지 않았다. 해서, 가스파르 노에나 프랑수아 오종, 아샤야스 등이 프랑스 영화의 '장래'라면 참 암담하다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재치나 파격만으로 영화의 장래를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여하튼 장만옥에 대한 생각은 그녀가 나온 영화들을 꼽아보는 순서로 이어졌는데, 내가 본 최초의 영화는 주윤발과 공연한 <로즈>(1984)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유금세월>(1988) 같은 게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이다(모두 극장에서 봤다). 미인대회 출신으로 기억되는데, 글래머라는 것 말고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었다.




그러다 장만옥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왕가위의 <아비정전>(1990) 덕분이다. 아주 오래 전 대학가에서 하숙할 때, 가끔 비디오가게에서 아예 비디오와 함께 테이프 5개를 빌려다가 밤새 보곤 했는데(보다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어느 날 빌린 5개의 테이프 중 하나가 <아비정전>이었고, 나는 이 영화를 그 자리에서 연거푸 봤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봤고, 지금은 테이프를 아예 가지고 있다(그때 이후로 물론 ‘왕가위의 모든 영화’이다!).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1988)와 관금붕의 <완령옥>(1991)은 그 이후에 본 걸로 기억된다.
장만옥의 베스트로 많은 이들이 꼽을 만한 영화는 역시나 왕가위의 <화양연화>(2000)이겠지만, 개인적으론 홍콩영화의 또다른 디바 임청하와 공동으로 주연한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임청하에게 장만옥만큼 좋은 영화운이 따르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왕가위의 <동사서독>(1994)이 그것이다(그런 영화로 서극의 <신용문객잔>도 있다. 두 여우 주연의 연기 대결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 이 영화에는 물론 장국영이 주연으로 나오며(<아비정전> 이후의 해후인가?) 다른 조연들도 모두 홍콩영화 최강의 배우들이다. 그렇게 1990년대 전반기가 (주로 왕가위의 영화들에서) 장만옥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내가 경탄하는 이미지와 연기의 장만옥은 그때 그 시절의 장만옥이다.
언젠가 나는 <동사서독>이 개봉하던 날 혼자 을지로 3가의 명보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그 길로 종로로 가 명보아트홀에서 연이어 같은 영화를 또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겨울이었던 것 같은 그날 저녁 을지로에서 종로까지 걸어가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혼자였지만 적어도 그런 날만큼은 덜 행복하지 않았다. 이후에 이 영화를 나는 비디오로도 소장하게 됐다. 하지만, 집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다(이 영화는 집안에서 보는 영화로 적절하지 않다. '집밖'에서 봐야한다). 한번 사그러진 시간의 재(Ashes of Time)는 다시 쓸어담을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건 일상일 뿐. 마약의 습관과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 고통,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고통, 그리고 아들을 볼 수 없는 고통. 이 외로운 마음의 감옥에서 아들을 데려올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에밀리처럼.


05. 11. 21.
P.S. <동사서독>에 나오는 장만옥의 가장 아름다운/처연한 대사: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나는 혼자였어요..."
P.S.2. 장만옥 대사의 풀버전은 이렇다: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난 이겼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