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지인의 블로그에 갔다가 어제 열렸던 한국과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축구 경기를 빌미로 발칸의 나라 (구)유고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글을 읽었다. 과거 걸출한 공산주의자였던 티토에 의해 스탈린식 사회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을 진작에 모색하기도 했던 유고 연방은 1989년부터 몰아친 동구권 사회주의의 연쇄적인 몰락과 함께 해체되어 현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으로 분할돼 있다. 그간에 축구강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나라는 크로아티아였지만, 알다시피 내년 독일 월드컵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출전하며 어제 우리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진 것.


지난 90년대 초반 민족간/종교간 갈등 문제로 불거진 보스니아 내전으로 언론에서 자주 접하기도 했던 나라이고 지역이지만, 유고란 이름을 내게 처음 각인시켜준 이는 영화감독 에미르 쿠스투리차(1954- )이다('에밀 쿠스트리차'로 처음 소개되었었다). 기억에 88년쯤에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에서 <아빠는 출장중>을 보았고 단번에 쿠스투리차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것(영화의 끝장면에 유고 대표팀의 축구 경기가 TV로 중계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작년까지 25년 동안 7편의 장편영화를 찍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차례로 나열하면, <돌리 벨을 아십니까?>, <아빠는 출장중>, <집시의 시간>, <아리조나 드림>, <언더그라운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삶은 기적이다> 등이다. 이 중 맨처음 영화와 마지막 영화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고, <아리조나 드림>은 수입됐지만 내내 창고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듯하다(이기팝의 주제가만이 드라마 등에서 자주 흘러나왔다).


알라딘에 이미지가 없어서 영화의 타이틀 이미지들은 아마존에서 따왔는데, 마지막의 <검은 고양이, 흰고양이>와 <삶은 기적이다> 두 이미지는 러시아판의 것이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나는 몇년 전에 동숭아트홀에서 봤었고, 국내에서 아직 개봉되지 않은 영화 <삶은 기적이다>는 작년 연말에 모스크바에서 비디오CD를 구해서 봤다(영화는 작년 칸느영화제 출품작이었고, 모스크바에도 일찍 소개됐다). 그때 쓴 모스크바 통신의 내용을 잠시 옮겨온다.

-‘Life is a miracle’은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최근작 <삶은 기적이다>(2004, 155분)의 영어/공식 제목이다(러시아어 제목을 영어로 옮기면, ‘Life as a miracle’). 이 영화는 지난 봄에 칸느영화제에 출품됐었고(내 기억에, 쿠스투리차는 <아빠는 출장중>과 <언더그라운드>로 칸느에서 두 차례 작품상을 받았으며, <집시의 시간>으로 감독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신작의 돈줄도 프랑스이다), 지난 6월에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되었고(이 영화제에서 그는 ‘공로상’을 받았다) 이어서 8월에 공식 개봉되었다. 나는 최근에 비디오CD로 출시된 걸 사서 봤다(영화관람료의 1/2로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출시되기를 기다렸었다).



-감독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의 패러독스와 부조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 영화는 에미르 쿠스투리차 종합선물세트 같다(*발칸의 운명을 다룬 영화들로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꼭 비교해서 보아야 할 영화들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과 밀코 만체브스키의 <비포 더 레인>이다). 나는 그의 영화 <아빠는 출장중>을 오래 전 피카디리극장에서 처음 보고서 한 방 얻어맞았고(그날 밤의 종로 3가를 아직 기억한다. 나는 비틀거리며 하숙방에 돌아오자 마자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집시의 시간>을 개봉되기도 전에 조야할 필름으로 여러 번 보면서 넉다운됐었다. 그는 ‘영화는 기적’이란 걸 내게 보여주었다.

-<집시의 시간> 이후의 그의 영화들은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기엔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친숙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나는 그의 데뷔작 <돌리 벨을 아십니까?>와 미국에서 찍은 <아리조나 드림>을 보지 못했다. 그 영화의 주제가가 이기 팝의 노래이다. 나중에 국내의 드라마 주제가로도 쓰인). 모스크바에 곧잘 들르는 그가 지난 17일에는 자신이 조직한 밴드 를 이끌고 와서 연주공연을 했는데(영화감독들 중 열렬한 ‘밴드부원’들이 몇 있는데, 쿠스투리차와 함께 우디 알렌, 짐 자무시, 아키 카우리스마키 등이 내가 아는 사례들이다), 이를 계기로 언론에 게재된 인터뷰를 보고서 나는 이 ‘친숙한 세계’에 대해서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세계, 혹은 ‘집시의 시간’을 그는 ‘중세적 세계’라고 불렀다(물론 자신에 영화에 등장하는 집시들은 언제나 ‘은유’라고 그는 <아피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리고 인터뷰어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세르비아에 다녀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쿠스투리차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리얼리스트’라고 말한단다. 쿠스투리차의 영화세계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르비아에 한번 가볼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을 ‘새로운 중세’라고 불렀지만, 쿠스투리차에게 있어서 이 둘은 서로 대조/대립된다. 하지만, 에코와 쿠스투리차의 ‘중세’가 동일한 외연을 갖는 건 아니므로 이러한 의견차이는 수긍할 만하다. 즉,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중세가 ‘중심부’ 중세라고 한다면, 세르비아(구 유고) 사람 쿠스투리차의 중세는 ‘주변부’ 중세이기 때문이다(역사상 집시들이 중심부에 있었던 적은 없지 않은가). 하여간에 쿠스투리차에게 2004년은 아주 뜻 깊은 한 해였는데, 그건 그의 신작 ‘영화’ 때문이 아니라 그의 ‘도시’ 때문이다. ‘도시’라고는 부르지만 우리식 명칭으론 ‘마을’이라고 해야 할 텐데(우리로 치면 ‘민속촌’ 같은 ‘집시촌’이다. 한번에 50여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는 실제로 영화 <삶은 기적이다>의 배경으로 나오는 이 마을을 직접 건설하여 자신의 소유로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 마을의 시장이자 촌장이다(그가 꿈꾸는 마을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이나 히피공동체이다).
-쿠스투리차의 그 중세적 마을은 베오그라드로부터 200킬로쯤 떨어져 있으며, 여관/호텔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구경꾼들) 사절이다. 쿠스투리차는 자신의 말마따나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지만, 자선(自選) 시장으로서 자신의 ‘시민들’을 직접 뽑아서 살게 할 계획인데, 주로 영화나 미술, 문학 등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2달 정도씩 (집시적으로 혹은 히피적으로) 함께 살면서, 전통 제련술부터 개념주의(예술사조로서의 개념주의를 말한다)까지 배우면서, 한마디로 ‘Culture and agriculture’하면서, 연구와 세미나, 잔치(축제) 같은 걸 벌이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도시/마을의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쿠스투리차’란 이름은 한 거장의 이름이면서 이젠 한 지명(地名)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구글 어스에서 찾을 수 있을까?)

-쿠스투리차가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는 ‘집시 테크노록’ 밴드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의 지난번 모스크바 방문은 유럽 투어의 일환이었는데, 이들의 새 앨범이 바로 <삶은 기적이다>의 사운드트랙이었고, 이 앨범 출시를 계기로 이루어진 투어의 타이틀은 “삶은 그냥 여행(투어)이 아니라 기적이다”였다. 그런 걸 말하기 위한 ‘투어’였으니까 이들의 투어는 수행적 혹은 화용론적 모순의 일례라 할 만하다. 인생은 여행길이고 나그네길이고 소풍길이란 얘기들을 하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의 이면이 ‘기적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피가 아닌가 싶다. 누가 여행을 하는가?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기/연출하기가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기적과 남들의 기적을 ‘구경’하러 다닌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남들의 기적이 자신에게 옮기를 바라는 듯이.




-세르비아인으로서 쿠스투리차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보 안드리치이다. <드리나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유고 작가(안드리치의 허름한 작품집을 헌책방에서 봤지만 사지는 않았다). <도서평론>이란 저널에서 한 해를 결산하는 설문들을 명사(名士)들에게 돌렸는데, 그가 거기에 답한 내용이다. 연말이고, 이미 이달 초부터 발행년도가 2005년이라고 찍힌 책들이 나오고 있다. 내게 2005년이 갖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다. 2005년의 책들이 나온다는 것. 이미 나온 2005년의 책들 가운데는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책도 있고, ‘라캉 노트’ 포켓북 시리즈로 지젝과 류블랴나 학파의 책들도 있다. 지젝의 것은 <상호수동성>이란 제목으로, 돌라르와 보조비치, 주판치치 글을 묶은 책은 <사랑이야기>란 제목으로 나왔다(*주판치치의 글은 얼마전에 번역서가 나온 <정오의 그림자>에 부록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이다)...


그랬던 게 작년말이니까 어느새 일년이 지나고 있다(곧 2006년의 책들이 나온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는 (무거운) 러시아어본을 구해왔었고, 지금은 친구에게 빌린 국역본과 함께 내 서가에 누워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들처럼(로쟈 왕자는 내내 일없이 출장중이다). 안드리치에 이어서 내가 떠올리는 이름이 슬라보예 지젝인데, 그는 과거 유고연방을 구성했던 슬로베니아가 낳은 최고의 스타 지식인이다. 슬로베니아 사람 지젝이 세르비아 사람 쿠스투리차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는 대목이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의 한 절 '인공청소의 시'이다(123-130쪽; 'The Plague of Fantasies', 60-64쪽). 이에 대한 정리는 물론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가능하다...
05. 11. 17.
P.S. 쿠스트리차와 자주 같이 작업을 하고 있는 고란 브레고비치의 집시밴드도 내한 공연을 했던 듯한데,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의 음반이 국내엔 나와 있지 않은 것인가? 음악을 같이 올려놓지 못해 약간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