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가을에 쓴 두 개의 짧은 글을 편집해서 옮겨온다.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는데, 요즘의 관심사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읽을 만했다. 새롭게 몇 마디 보탰지만, 보탠 말들에 따로 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2002년 가을의 글이면서 2005년 가을의 글이기도 하다.
<비평>(2002년 가을호)에 주제서평으로 '피에르 부르디외'가 실렸다.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과 함께 산 책인데, 부르디외는 내게 언제나 안티-철학을 연상케 하는 사회학자라는 점에서 들뢰즈와 부르디외란 조합은 아이러니컬하다.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다룬 홍성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부르디외의 고백(나는 그 책의 서반부밖에 읽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지식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고 진정으로 느껴본 적이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의 사유에서 철학적 주지주의 같은 그런 위상에 연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추방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지식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부르디외의 철학(적 주지주의) 비판이 비록 바깥으로부터의 비판이긴 해도 철학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판(철학을 흡수/해소시키려는 전략) 못지 않게 문제적이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담에서 부르디외는 마르크스를 철학화(philosophizing)하는, 그래서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으로 만드는 알튀세르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는데(아마도 고종석과의 대담이었던 듯하다. 기억에 대담은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에 실려 있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의 관념론적 인류학에 대한 마빈 해리스의 유물론적 비판과 짝지을 만하다(해리스는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한길사, 2005)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무려나 부르디외의 고백은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단적으로 말해서 철학은 자신이 말해지는 장소(where)에 대해서 무지하며 둔감하다. 그래서 철학은 어디에서나(everwhere)나 적용가능할 걸로(이게 소위 보편성이다) 착각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나는 아무데서나(nowhere)의 다른 이름이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와 같은 착각과 패권의 남용이 철학에도 작동하고 있는데, 이름붙이자면 '팍스 필로소피카'쯤이 될까?
근대 철학적 인식론의 경우에도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란 물음의 무엇(what)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소위 형이상학의 '고질'이다). 그 인식의 주체는 보편적 주체이지 (고진이 말하는) 단독자가 아닌다. 즉 그 주체는 아무도 아닌(noman) 모든 사람(everyman)이다. 거기엔 그것이 누구에게 진리인지, 어디에서 진리로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에게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철학의 결함에 대한 추궁으로 읽힌다. 그의 장이론이 얘기하는 것이 바로 모든 상징적 재화가 거래되는 장소(where) 아닌가? 철학적 담론이 그 자신이 통용되고 정당화되는 장소의 상대성에 주목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상대화되고 사소화된다. 이에 대한 가장 신랄한 문학적 사례는 안톤 체홉의 단편들과 희곡들에서 찾을 수 있다(동완 선생의 체홉 번역을 나는 좋아한다. 재작년에 신원문화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철학이 그 장소의 문제에 그나마 관심을 기울여 얻어낸 것은 자신의 기원으로서의 '그리스'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다: "철학자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리쾨르) 데리다 밝혀놓고 있는 것은 이 그리스적 기원으로부터 철학이 탈출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철학의 언어들이 갖고 있는 그리스적 기원 때문이다. 그 탈출가능성을 말하는 언어들이 이미 그리스적 기원의 언어들이라는 것. 따라서 탈출은 말이 아닌 제스처로써만 가능하다. 마임으로만. 따라서 그리스와는 다른 기원의 철학을 모색하는 들뢰즈의 철학은 언어로써 언어의 바깥을 지향하는 '마임의 철학'이다. '아무데서나(nowhere)' 대신에 들뢰즈가 내세우는 것은 '지금-여기(now-here)'이고 '에레혼(erehwon)'이다.
서동욱의 '경험론과 철학'이란 글은 철학의 다른 가능성으로서 유대적 기원(레비나스)과 노마드적 기원(들뢰즈)을 암시한다. 나는 그것이 또다른 철학으로 불려야 할지 아니면 철학을 넘어선(비철학) 다른 무엇가로 호명되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들뢰즈의 철학은 'non-philosophy'로 지칭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원에 대한, 장소에 대한 물음 앞에까지 철학이 도달해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물음은 철학이 충분히 사회학화될 때 더 잘 규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톤 체홉의 사할린 섬 리포트도 그런 의미를 갖는 건 아닐까?
참고로, 철학에서 누구(who)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니체이다. 그에게 동일한 사태 혹은 진리는 주체의 존재양식에 따라 다르게 현상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1962)의 서두에서부터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니체가 원했던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는 의미와 가치의 철학이 비판이어야 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칸트가 가치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참된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니체가 저작에 착수하게 된 동기들 가운데 하나였다... 가치철학이란 참된 비판의 실현이며, 전면적인 비판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 다시 말하자면 철학을 '망치질'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한 니체 자신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유일무이한 심리학자' 도스토예프스키이다. 문학사가인 치제프스키를 따르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칸트 비판에 있어서도 니체와 같은 전선에 선다. 아니 보다 더 철저하다. 치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서 분신의 주제'란 논문(르네 웰렉 편,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열린책들, 184-210쪽)에서 이렇게 말한다(이 글은 가장 훌륭한 도스토예프스키론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장하는 사랑은 보편적/추상적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가르친 성경이야기> 류에 상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르침이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진정한 주제이다. "여러분 사랑해요!"라는 말보다 쉬운 고백은 없다. 그것은 제스처이다. "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고 일기에 적어놓는 일도 기분나면 매일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자기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작 어려운 사랑은 바로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그리스도는 말했다. 그는 그 외에 다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말하는 순간, 철학은 그 구체적인 사랑을 철학화한다. 그게 철학의 본성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건 '크라잉게임'이다). 그러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철학은 좀 변신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온갖-되기를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는 없을까? 들뢰즈의 다양체(multiplicity)를 '나'도 '인간'도 아닌 '이웃'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그렇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내재성의 공간이 주어진다면, 거기서 니체를 통과해온 도스토예프키는 들뢰즈와 대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지에 입을 맞추면서 자신을 놓아버린 익명적, 비인칭적 주체로서...
05. 11. 10.
P.S. 이 글의 원 재료는 '철학이냐 사회학이냐"와 "칸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해서 "철학이냐 문학이냐"란 제목으로 통합하려고 했으나 '이웃'을 사랑해야겠기에 OR 대신에 AND를 넣어, "철학 또는 문학" 혹은 그냥 "들뢰즈와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해둔다...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세 가지 양상을 가진다. <누군가가(Someone) 어디에서(Somewhere) 어떻게든지(Somehow)>가 어떤 윤리적 행위에 필연적으로 연루된다. 처음의 두 요소는 완전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러나 세 번째 것은 추상적으로, 즉 논리적인 용어로 채택될 수 있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우리는 도덕철학의 역사에서 윤리적 행위의 첫 번재 두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추상적 사유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도식화하든가 하는 경향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윤리적 행위의 <어떻게(how)>는 <누가(who)>와 <어디에서(where)>로부터 완전히 추상화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립하게 되는 형식적 윤리와 법사상에 대한 예리한 분석/해명은 서동욱의 <차이와 타자>(민음사, 2000)의 제6장 '들뢰즈의 법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이다). 이때 명시적으로 참조되는 작품은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편이 될 수 있지만, 치체프스키-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마저도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영원회귀'라는 반복이 또다른 '보편화' '형식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영원회귀'를 주제로 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이다. 문학작품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1990), 그리고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도 읽을 만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치체프스키: "우리가 의식적으로 윤리적 합리주의자들이 아닌 사상가들 속에서조차도 윤리적 주체에 대한 그런 강조의 결핍을 발견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칸트의 '정언명령'조차 윤리적 주체의 개인적 구체성을 무시하고 있다. 칸트에게는 <도덕적 법칙들은 자연의 일반법칙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윤리적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이다... 게오르그 짐멜이 명확하게 제시했던 것처럼 '영원회귀'에 대한 그(니체)의 가르침은 도덕적 세계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에 대한 칸트의 개념에 단지 또 하나의 형식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 피히테, 니체, 이들 세 사람의 사상가들 속에서 윤리적 주체는 개인적 구체성의 주요한 특징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복될 수도 복제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판의 요점은 칸트나 니체의 윤리학이 윤리적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윤리적 행위를 추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자유의 영역이란 건 윤리적 주체의 구체성의 영역이다. 보다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철학이 인간의 자유를 충분하게 다룰 수 있느냐는 것, 혹은 철학이냐 문학이냐(문학적인 니체가 언제나 철학적인 니체를 넘어선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장소', '자유의 영역'은 달리 해석되고 있다. 즉, 그는 '이웃'이라는 기독교적 개념, 다시 말해 다수의 윤리적 주체들의 구체적인 개인적 존재를 기본적인 윤리적 전제사항으로 받아들이고서 출발한다. 윤리적 합리주의는 일반적으로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만을 이해할 뿐 '이웃'은 낯설고 멀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이웃'이라는 구체적 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