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신간 러시아 판타지 소설 <나이트 워치>를 소개하면서 러시아 입문서 두 권에 대해서도 덧붙인바 있는데, 그걸 조금 보완하고자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의 '강정의 나쁜취향'에서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다루어지기도 해서 대략 '분위기'도 좋은 걸로 간주하고 말이다. 물론 우호적인 분위기만 형성돼 있는 건 아니다. 며칠전 뉴스에서는 극동러시아에서 가짜 술을 마시고 주민 19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타전됐으니까.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마가단 시에서 가짜 술을 마신 주민 23명이 복통증세로 입원해 이가운데 19명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독주(毒酒)를 제조하고 또 그걸 마신 것인데, 지역 내무국(우리의 경찰)은 '사마곤'이라는 가내 술을 제조해 판매한 지역 주민 4명을 검거했다고(대낮에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나라가 러시아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해서,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웬만해야 말이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1866)는 사실 19세기 러시아의 표도르 이바노비치 츄체프(1803-1873)의 시구이다(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시도 제목이 없는 경우 대개 1행을 제목처럼 사용한다). 츄체프란 이름을 영어로 음역하면 'Tjutchev'가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튜체프', '츄체프', '쮸체프' 등 다양하다('쮸쳅'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귀족출신에다 외교관이었는데 시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좀 나이가 들어서이다. 해서 '철지난 낭만주의' 경향의 철학적인 시들을 주로 썼다.
하지만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후한 편이어서 푸슈킨(1799-1837) 이후의 19세기 최대 시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 이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츄체프와 도스토예프스키>란 연구서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사실, 둘의 친연성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시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도스토예프스키 왈, "유럽은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러시아는 유럽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아니겠어?).
츄체프의 시들은 더러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지만 시집으론 <말로 표현한 사상을 거짓말이다>(새미, 2001)가 유일하다. 어차피 시란 (잘) 번역되지 않으므로 아쉽지만 유감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 번역시집은 내가 안 갖고 있는데, 지금 인용하고자 하는 번역은 예일 리치먼드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107쪽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
매우 유익한 러시아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까지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만큼은 부정확하게 번역되었다. 음역한 원문과 영역, 그리고 나의 번역을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다:
Umom Rossiju ne ponjat',
Arshinom obshchim ne izmerit';
U nej osobennaja stat' -
V Rossiju mozhno tol'ko verit'.
One cannot understand Russia with the mind;
She cannot be measured with a common yardstick.
She has a special image.
One can only believe in Russia.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보편적인 척도로 잴 수 없다.
러시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니
러시아를 우리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시 흉내를 내느라고 '러시아'란 두운을 맞추었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이란 번역(특히 2행)이 부분적으로 엉뚱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어제 날짜 한겨레의 칼럼 '유레카'는 '영혼의 모독'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작가는 <백치>에서 토로한다. '선고문이 낭독되면 이젠 죽음이 기정사실화합니다. 바로 여기에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가혹한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진다: "상상이 아니었다. 절절한 체험이다. 38살 때다.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논의하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체포됐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대에 올랐다. 집행하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특사가 내렸다.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짧은 문장들로 아주 긴박했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문제는 '38살 때' 아니라 '28살 때'라는 것('38살'은 필자의 착오 혹은 상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생이고 그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는 것은 1849년의 일이다. 팩트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겠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혹은 '러시아 백치'는 들뢰즈 읽기에서도 종종 마주치게 된다. 들뢰즈의 철학극장, 혹은 철학의 경연장에서는 두 종류의 백치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적 백치'('방법론적 백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와 '러시아 백치'이다. 라이크만이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 2005)에서 정리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데카르트의 경연에서는 '백치'라는 새로운 개념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 백치는 프랑스어 같은 이성적 언어를 선호하는 인물로, 프랑스어는 학술어인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들뢰즈는 이 인물이 독창적인 형상임을(비록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해 예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인물과 그 빛은 동시에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를 철학의 최초의 출발점, 즉 전제조건 없는 출발점으로 만들려는 데카르트의 시도 안에 있는 암묵적인 가정을 드러낸다. 이 가정은 데카르트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통념'이라는 가정을 말한다."(77쪽)
비문인가 싶어 다시 읽어보니 굵은 글씨로 내가 표시한 대목은 오역이다(아무래도 역자의 '영어'에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an Idiot who prefers a rational language like French, which anyone can understand to learned Latin."(37쪽) 표시한 대로 'prefer A to B' 구문이고, 여기서는 A에 해당하는 것이 '프랑스어' 그리고 B에 해당하는 것이 '학문어로서의 라틴어'이다. 데카르트적 백치는 현학적인 라틴어 대신에 프랑스어 같이 합리적인 언어를 선택한다는 것.
반면에 '새로운 인물(new persona)'로서의 '러시아 백치'란 데카르트적 백치의 '암묵적인 가정' 마저도 벗어던진 백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통념이라는 사유학적인 기본전제 없이도 해나갈 수 있도록 나타나게 되며, 대신에 러시아문학에서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라 불리는 인물 형태의 조건에 근접하게 된다."(78쪽)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는 'Idiot or unlearned thinker'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백치는 데카르트적 백치를 더 극단에까지 밀어붙인 형상이라 할 만하다. 그는 프랑스어 같은 자연어의 규칙마저 기꺼이/즐겁게 포기하는 것이다(참고로, 러시아문학에서 가장 철저한 '데카르트적 백치'의 형상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의 <참회록>(1882)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참회록>은 러시아적이기보다는 프랑스적이다. 톨스토이에게서 <참회록>은 새로운 삶을 위한 '방법서설'격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백치보다는 러시아의 백치를 보는 데서 출발한다."(In philosophy, we start to see a Russian rather than a Cartesian Idiot.) 그 백치는 "프랑스어와 같은 '자연어'에서조차도 개념적으로 낯선 어떤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들뢰즈가 예시하는 사례는 "폴란드어로 글을 쓰거나 철학적인 독일어를 '춤'으로 만들려는 니체의 꿈"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라이크만이 들고 있는 사례는 "늘 공적인 교수직과 새로운 분석철학의 '스콜라주의'의 도래에 대해 안절부절"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이다. 거기에 내가 들고 싶은 사례는 실제로 춤을 추었던 러시아의 무용수 니진스키이다(그의 일기 <영혼의 절규>를 보라. 러시아어 원제는 <감정>). 그리고 영화의 용도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타르코프스키. 하면, 니체도 비트겐슈타인도 니진스키도 타르코프스키도 모두가 백치였던 것. 러시아 백치.
다시 들뢰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실제로 철학에서 '전제들 없이 시작하는' 유일한 길은 일종의 러시아 백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념이라는 가설을 포기하고, 자신의 '해석 나침반'을 던져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의 '백치짓'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특이한' 스타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그런 백치가."(79쪽) 그런 러시아 백치는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백치가 보여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철학이 자유롭게 창조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나 규칙에 따라 놀이할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규칙이 무엇이며 놀이자가 누구인지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 대신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되는 개념과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과 함께 등장할 때다."(79-80쪽)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백치가 최소한의 규칙을 갖고서 출발한다면, 러시아 백치는 그마저도 빼먹고서 춤을 춘다. 이어지는 문장은 좀 길다.
"다시 말해 이런 백치들은, 처음에는 직관에 의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많은 복합된 방식으로, 들뢰즈가 인용하기를 좋아한 라이프니츠의 격언, 즉 '우리는 항구에 닿았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라는 격언이 암시하는 방식으로 다른 개념들과 얽히게 되는 개념들을 창조함으로써, 더이상 고정된 방법들이나 선행하는 형식들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조차 없으며 그 대신 자신의 특이한 문제들로 작업하는 데 만족하는 철학을 통해 '실천학적으로 가정'된 것을 극화하도록 돕는다."(80쪽)
이해를 돕기 위해서 줄거리는 굵은 글씨로 표시했는데, 다소 부정확한 대목이 있다. 굵은 글씨로 표기한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Such Idiots help dramatize, in other words, what is 'pragmatically supposed' by a philosophy that no longer even purports to be derived from fixed methods or prior forms, that is instead content to work out its pecular problems..."(38쪽)
역자는 'content to'를 '-에 만족하는'으로 옮겼는데, 'content to-inf'는 ('willing to-inf'처럼) '기꺼이 -하다'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백치들은 사전의 어떤 공식이나 방법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고유한(그리고 아주 복잡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기꺼이 달려드는 것. 해서 이 백치들은 난생 처음 수박을 먹어보고(물론 '수박'이란 개념도 갖기 이전에), 난생 처음 헤엄을 쳐본 이들이다(물론 '수영'의 방법도 배우기 이전에). 아무도 가르쳐주기 전에.
그렇다면 이 백치와 유사한 형상, 혹은 인물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나오는 손재주꾼(handyman)이겠다. 국역본 번역으론 "우리는 이것저것 긁어보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불어로는 'bricoleurs'. '개념 없는 자들', 하지만, 개념 대신에 재주를 갖고 있는 자들. 그래서 아무런 개념도 없이 기꺼이 자르고 오려붙이고 해서 무얼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자들. 아이들. 백치들. 이쯤이면 들뢰즈가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그토록 경탄해마지 않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에게, 혹은 진정한 경험론자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 '원더랜드'인 것!
'앨리스'의 러시아식 이름은 '아냐'이다. 그리고, '아니시야', '안토니나' '안나'가 다 같은 이름들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 대목에서 얼마전 장정일 선집의 한권으로 다시 나온 소설 <보트 하우스>(김영사, 2005)를 잠시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다(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다). IMF가 배경인 소설에서 주인공 애라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05. 11. 08.
P.S. 들뢰즈의 '백치'는 영어로 Idiot(백치)로 옮겨지고 어떨 땐 fool(바보)로도 옮겨진다. (라이크만도 혼용하고 있는) 이 '백치'와 '바보'가 같은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나는 아직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전에 '바보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에서 헷갈렸던 이유이다. 어쨌거나 들뢰즈에 관한 페이퍼들이 몇 주째 밀려 있다. 머리속에서 웅성대는 말들을 얼른 쫓아내고 싶은데, 그간에 그럴 만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오늘은 또 '백치들' 때문에 공치고. 하긴 이런 글에 공연히 시간을 축내며 '목숨 거는'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하긴 '로쟈'는 러시아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