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됐다는 게 이맘때 쓰게 되는 표현이지만, 올해는 '지리한 장마'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무더위가 시작된 듯하다. 밤마다 잠깐씩 짬을 내어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왕복으로 걸어다니는 '걷기 운동'을 지난주부터 시작했는데, 비 때문에 거른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장마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지는 좀 됐다고 봐야겠다. 장마 스스로가 지레 지리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장마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으로 장마인가, 나는 이대로 장마여도 좋은가, 등등의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지도.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건 그때부터이다(물론 그 전에 일이 꼬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의 변주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나는 장남인가, 어쩌다 나는 가장이 됐는가, 에서부터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에 이르기까지. 대답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하이데거 말대로) 현존재의 특권이다. 그리고 여름에 피서는커녕 책읽을 시간도 감지덕지하는 인간은 그런 특권을 좀 남용해도 좋겠다(그런 소리가 피서지에까지 들릴 리는 만무하니까). 이왕이면 이런 엄포도 놓아가면서. "책, 내가 너 아니면 읽을 게 없을 줄 알아?!"



그런 엄포 때문은 아니겠지만, 책들은 휴가를 반납한 듯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그런 책들 가운데, 새로이 맘에 드는 얼굴, 그러니까 '뉴 페이스' 몇을 꼽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꼽는 건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얼마전에 나왔던 두툼한 전기 <빌헬름 라이히: 세상을 향한 분노>(양문)가 함께 읽어볼 만한 라이히 컬렉션이 되겠다(알라딘에는 6권의 책이 뜨는데, 이미지가 제공되는 건 위의 3권이다. 물론 거기에 적어도 두 권쯤은 더 추가되어야 한다.). 80년대에 출간됐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6)도 조만간 재번역되어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고. 흔히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라이히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할 만한 것은 <프로이트 급진주의 : 빌헬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The Freudian left)>(종로서적, 1981)이다. 내가 '라이히'란 이름을 처음 접해본 책이고 나에게 그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책이다(덕분에 만화로 된 라이히 전기도 읽었다).
프로이트 좌파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시켜보고자 한 이론가들을 가리키며, 라이히와 함께 거명된 이름들 중(로하임의 저작이 번역돼 있는가?) 마르쿠제를 떠올려보면 이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각자의 진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성해방과 계급투쟁을 연관지어 사고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들은 주류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모두 찬밥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물론 라이히의 경우가 가장 유별나지만(그는 말년에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학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미국 식품의약국에도 제소되어 복역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그 유별난 사람의 유별난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라이히의 책 두어 권쯤 들고 피서지로 향하면 되겠다(물론 연인과 동행하면서 <오르가즘의 기능>을 들고갔다간 라이히 이상으로 따돌림 받을 수 있다. 그 점은 주의하시압).


두번째로 꼽고 싶은 건 신간 들뢰즈 연구서로서 키스 안셀 피어슨의 <싹트는 생명(Germinal life)>(산해)이다. 부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인데, 들뢰즈 연구서를 좀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피어슨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니체와 베르그송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인데, 언젠가 한번 그의 논문을 읽고 믿음직 하다 싶어서 그의 연구서라면 모두 복사해둔 적이 있다. 그런 그의 책이 최초로 우리말 번역을 얻은 것(책의 원서는 내 책상 머리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중이다). 번역은 국내의 대표적인 들뢰지안의 한 사람인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가 맡았다. 같은 역자가 이전에 옮긴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이어지는 것일 텐데, 생명철학은 들뢰즈에 대한 나의 세 가지 관심사 중 하나이다. 다른 두 가지는 언어철학과 영화철학(국내에 소개가 좀 빈약한 건 언어철학쪽이다. 해서 르세르클의 <들뢰즈와 언어> 같은 책도 번역되어야 구색이 맞다고 본다).
역자는 후기에서 들뢰즈 철학의 요체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잠재적인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로선 '배아줄기세포'가 아닌가 한다(그건 '기관없는 신체'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이 윤리학적 함축도 가질 수 있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또다른 빼어난 들뢰즈 연구서로서 마누엘 데 란다의 저작을 거명하고 있는데, 이쯤에서 내가 기대하는 책은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재작년 내한 강연의 한 주제로 지젝이 다루기도 했다(<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참조).

세번째 책은 엔디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Metromarxism)>(시울)로 '도시 맑스주의'란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맑스가 살았던 18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맑스주의의 관계를 맑스를 포함한 엥겔스, 벤야민, 레페브르, 드보르, 카스텔, 하비, 버먼 등과 같은 일련의 맑스주의자들의 견해를 도시문화학이라는 필터에 맞추어 전기적이면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도시맑스주의 개괄서." 최근의 관심사 하나와 맞아떨어지기에 구미를 당기는 책이다. 이 '도시맑스주의'라는 건 적어도 나에겐 '사이버맑스주의'보다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네번째로 꼽을 책은 오규원 신간 두 권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301번째 책으로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가 그의 시집이고, <날 이미지와 시>가 그의 시론이다. 아마도 지난주에 신간 소개를 했더라면 이 책들을 제일 먼저 꼽고 좀 장황한 얘기들을 늘어놓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그 사이에 바람이 좀 빠져버렸다. 시집과 시론집은 내가 아는 '오규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시집의 해설을 쓴 정과리에 따르면 그 '오규원'은 '절대 관념의 탐구자'로서의 오규원이었다(흔히 김춘수와 비교되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는 한국시의 현상학자이며, 후설이다(한국시의 하이데거는, 릴케와 횔덜린은 누구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면 좀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과리만큼은 아닌데, 그는 70쪽 분량의 시집에 60쪽이 넘는 해설을 붙여놓았다.
그가 '독자'라는 주어로 그런 '민폐'를 독자 일반에게 떠넘기려는 건 좀 볼썽사나운 수작이다. 그는 오규원 시에 대해서 '안에서 안을 부수는 공간'이라고 이름붙인바 있는데, "하지만 독자는 얼마 전 <르몽드>의 기자가 케르테스의 소설에 대해 똑같은 명칭을 쓰는 걸 읽고는 혼자 즐거워한다."에서 혼자 즐거워한 주체(주어)는 정과리이지 독자 일반이 아니다. 그가 독자라는 제유를 통해서(라도) 독자의 자리를 독점하는 건 주제에 넘는 일 아닌가? 그는 마치 자신만이 오규원 시에 대해서 샅샅히 해부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그는 시집의 첫 시편들을 차례대로 분석해나가는데, 그런 방식으로 분석이 다 갈무리될 리 없다. 해서 숙제가 남는바, "그러나 시집 전체, 즉 모든 시편들의 구성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더 바람직했던 건 이 해설 자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지 않았을까? 오규원 시집에 걸맞는 해설은 투명하고 담백한 글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처럼.).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고른 미술책이다.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 부제는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본 초현실주의와 프로이트"이다. 저자는 프린스턴대 교수로서 저명한 미학지 <옥토버>의 편집자이고, 현대미술의 철학적 해명을 다룬 여러 저서를 갖고 있다. 그 중 <실재의 귀환(The Retun of the Real)>(경성대출판부, 2003 )가 번역돼 있고, 편저로 <반미학(Anti-Aesthetic)>(현대미학사, 2002), <시각과 시각성(Vision and Visuality)>(경성대출판부, 2004) 등이 소개돼 있다(이 중 <반미학>은 읽을 만한 번역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나머지 책에 대해서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은 면도 있고.)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저자는 '초현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초현실주의 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분야 내부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범주로는 초현실주의에 나타난 이질적인 작업들과 심리적 갈등, 사회적 모순 따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책은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개념을 불빛삼아 초현실주의 텍스트와 이미지의 동굴을 탐사한다." '언캐니'란 건 흔히 '기괴함' 섬뜩함'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의 용어이다(국역본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기이한 낯설음'이라고 옮기고 있다). 문학작품 분석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초현실주의 회화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한번 읽어봄 직하다.


한편, 저명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이데아>(예경)도 출간됐다(곰브리치와 쌍벽을 이루던가?). "도상해석학의 창시자이자 '독일 태생의 유태인으로 나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예술철학자', 파노프스키의 초기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파노프스키는 책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형 예술 이론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과 시대에 따른 변화상, 한 마디로 "미의 이데아란 개념의 역사적 운명"을 추적한다."고 소개돼 있다. 그의 책으론 이미 <도상해석학 연구>(시공사, 2002)가 소개돼 있다.
05. 07. 18.


P.S. 소개에서 빠진 책은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이전에 동아사이언스 북스 시리즈로 나오던 책들이 이번에 재출간됐는데, 그때 빠졌던 책으로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이 책 <섹스의 진화>이다. 이미 저자의 책을 한두 권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다. 그 다이아몬드의 최신간은 <붕괴(Collapse)>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알라딘에서 원서 구입이 가능하군). 575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어떤 사회가 왜, 어떻게 망하고 안 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국이란 나라가 망조가 든 나라인지(그래서 얼른 이민가는 게 상책인지), 기대를 걸어볼 만한 나라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물론 얼른 번역되었으면 더 좋겠다. 500쪽이 넘는 원서를 턱없이 읽어나가다간 사회생활 망가지기 십상이다...


P.S.2. '들뢰즈 책'에 신간이 더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가 쓴 <천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힘펼침)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매뉴얼인데, 별로 두껍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 책이 331쪽으로 나왔다. '매뉴얼'을 자임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위적인' 매뉴얼을 시도한 책이라 친절한 주석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전에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의해 나왔던 책은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로 유진 홀랜드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 가이드북이다. 보다 친절한 쪽은 이 책인데, 문제는 '전위적인' 책의 판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란 원제가 뜬금없이 <프로이트의 거짓말>로 옮겨진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트북 같은 판형을 고집한 탓에 161쪽 짜리 책이 539쪽으로 둔갑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이미 나온 걸 어쩌랴만). 이런 '전위적인' 책이 많이 팔렸을 리 없는 건 당연하므로 출판사쪽의 '계산'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나는 책 갖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좋은 번역만 가지고도 충분히 튄다. '예술'은 다른 데 가서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