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스크랩해놓으려던 기사가 몇개 있었는데 '얼리 버드'가 된 김에 그중 하나를 챙기도록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을 기린 '김현 문학 전시관'이 고향인 목포에 세워져 지난달 30일에 개관했다는 소식이다. 20주기를 맞은 작년의 특집기사도 같이 묶었다. 개인적으론 대학 1, 2학년 때 가장 많이 읽은 저자의 한 사람이라 내겐 항상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사실 김현 자신이 4.19세대로서 평생 그 나이에 멈춰 서 있었다고 고백한 걸 보면, 우리는 여러 개의 나이를 갖고 사는 게 맞다. 내겐 그 한 가지가 하숙방에서 김현의 평론집을 읽던 나이다.   

서울신문(11. 10. 01) ‘이상 다음의 근대인’ 평론가 김현 문학전시관 가보니…

평론은 문학 작품을 쓰지 못한 자의 자존심의 발로로 여겨졌다. 하지만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아름다운 문체와 감수성 넘치는 글로 비평을 문학의 한 장르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그의 매혹적인 문장은 ‘김현체’로 명명되었다.

그의 고향 전남 목포에서 4·19 세대이자 한글 세대로 한국 문학 비평의 새 장을 연 김현을 기리는 문학 전시관이 30일 개관했다. 김현은 진도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목포에서 구세 약국을 열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목포를 실질적인 고향으로 삼게 된다.

‘김현 문학 전시관’은 목포 출신 문학인 김우진, 박화성, 차범석 전시관이 있는 목포의 갓바위 문화타운에 터를 잡았다. 목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시관에 들어서니 어린 시절 김현이 가르며 뛰어다녔던 바닷바람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김현이 꿈꾼 것은 ‘억압 없는 사회, 억압하지 않는 문학’이었으며 그는 평생 이를 실천했다. 김현 문학 전시관에는 그의 육필 원고, 동료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평소 아끼던 문구류, 생전에 사용하던 안경, 책상과 컴퓨터 등 그간 유족들이 보관해오던 유품 300여점이 곱게 전시되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를 위해 김병익, 김주연과 함께 ‘문지4K’로 불리며 현재 김현문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김현 20주기에 맞춰 유품을 전달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세상을 떠난 김현의 문학 정신을 전시관에 살려 놓은 느낌”이라며 “거울 등으로 김현 비평의 핵심적인 이미지를 구현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7살에 진도국민학교에 입학한 김현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복고로 전학하여 친형과 함께 서울에서 생활했다. 김광남이란 본명 대신 김현이란 필명을 사용한 것은 스무 살인 1962년 ‘자유문학’ 평론 부문에 ‘나르시스 시론’이 당선되면서다. 같은 해 김승옥, 최하림과 함께 소설 동인지 ‘산문시대’도 창간했는데, 동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곳이 수산시장 옆 목포 오거리의 한 허름한 다방이었다.

김현은 글 실력뿐 아니라 술 실력으로도 유명했는데, ‘산문시대’를 계속 발행하면서 술 실력이 늘고 사람을 ‘조직’하는 역량도 발휘되었다. 김현과 함께 ‘한국문학사’를 쓴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를 “이상(李箱) 다음의 근대인”이라고 말했다. 30대의 김현은 1977년 서울 구반포 삼거리의 반포치킨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여기서 동료, 제자, 문인들과 어울려 자주 술을 마셨다. 아직도 영업 중인 반포치킨은 공지영 작가를 비롯한 많은 문인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문학 전시관 개관식과 함께 열린 심포지엄에서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김현이 목포로 이사해 ‘독서 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목포는 김현에게 사회이자 규범과 규칙으로 이루어진 제도였다.”고 설명했다.(목포 윤창수기자)   

서울신문(10. 06. 19) 이 세상 다 읽고 간 사람… 그 이름 김현

김현(1942.7.29~1990.6.27).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꼭 20년이다. 반복되는 노동과 휴식 등 일상의 삶에 치여 사는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다. 그는 문학평론가다. 한자 또는 식민지 언어가 아닌, 모국어로 사유하고 그 감성으로 글을 쓴 첫 세대인 ‘4·19세대’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의 짧은 삶을 아쉬워하는 것은 단순히 한 세대의 빼어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왕성한 독서욕과 성실한 읽기로 한국 평단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를 두고 “이 세상을 다 읽고 간 사람”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문체로 전개되는 그의 감수성 넘치는 비평은 훗날 수사학적 인상 비평이라는 일각의 비판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비평을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첫걸음이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지금도 그의 매혹적인 문장과 문체는 ‘김현체(體)’로 불리며 후학들의 전범으로 통한다.

●‘문학과 지성’ 창간… 48세 생애에 저서만 50권
순수·참여 문학 논쟁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던 1970년 가을, 그는 문학평론가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이들은 ‘4K’로 불렸다-과 함께 계간지 ‘문학과지성’을 만든다. 이른바 ‘문지’가 또 다른 대척점에 섰던 ‘창작과비평’(창비)과 함께 한국 문단의 묵직한 성처럼 우뚝 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학주의 이데올로그’인 그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비평가”(황지우 시인)라는 찬사에 걸맞게 그는 한국 문학사에 굵직한 획을 그었다.

김현은 담배만을 안주 삼아 거의 매일 문인들과 그리고 제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대학 3학년 때 늦깎이로 배운 술이었지만 그는 1980년대 ‘불꽃의 말’이라는 에세이에서 “술자리의 분위기를 지워 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했을 정도로 술을 예찬했다. 심지어 몸이 너무 아플 때조차 “나 대신 마시라.”며 주변에 술값을 건넬 정도였다. 



●건강 나빠지자 술값 건네며 “대신 마셔 다오”
그럼에도 1990년 마흔여덟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뜨기까지 23권의 책과 6권의 공저(共著), 7권의 편서(編書), 19권의 번역서를 남겼다. 어디 그뿐인가. 무수한 논문에 소설까지 몇 편 얹었다. 김현식 표현을 빌리자면 ‘아, 놀라워라.’다. 문청들의 가슴에 시(詩)의 지독한 우울함과 설렘, 외로움을 심어 놓고 떠난 시인 기형도(1960~1989)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만들고 해설한 이도 그다. 그러고는 이듬해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기형도처럼 숱한 문청들에게 좌절과 동경을 함께 안겨준 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면 ‘김현 신화’는 얼추 완성된다.

김현은 전남 목포에서 약품공급업을 하는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덕분에 구김살 없이 특유의 다독(多讀) 습관을 익힐 수 있었지만, 이는 또한 쉼 없는 갈등의 배경이 됐다. 김현은 언젠가 사석에서 “판사나 검사를 하지 않고 문학 나부랭이를 했다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를 꾸짖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이 같은 갈등이 없었다면 뒷날 그가 정립한 ‘무용한 문학의 유용성론(論)’이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김현은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라고 설파했다. 창조적인 문장과 수사적 표현은 평단(評團)을 넘어 작단(作團)까지 넘겨봤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66년 발표한 단편소설 ‘노숙’ 등이 대표적이다. 



●고향 목포에 문학관 건립… 김현문학상 제정 주장도
20주기를 맞아 추모 열기도 뜨겁다. 문학과지성사는 18일 서울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말들의 풍경과 비평의 심연’이라는 주제로 ‘김현 20주기 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다. 주제발표자로 나선 박성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김현 비평은 인식론에서 논증의 구조, 그리고 문체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개성과 특이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유명사로 통용이 가능하다.”며 김현의 문학사적 좌표를 명확히 했다. 이어 “일방적인 찬사를 통해 옹호하는 일이나, 수사적 전략으로 폄하시키는 일 모두 그를 특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는 일인 만큼 폭넓은 연구를 통해 세대론적 시각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현의 서울대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은 스승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을 공개해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1977년 9월8일 날짜가 적힌 편지에서 김현은 “바 선생(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지칭)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다.”고 근황을 밝힌 뒤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라고 적었다. 너무 심각했다 싶었는지 “이러니까 교과서를 쓰는 것 같소.”라며 “일요일쯤 심심하면 놀러 오시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애주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문학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김현의 고향인 전남 목포시는 올 연말까지 ‘김현문학관’을 세워 주요 저서와 필기도구, 편지, 일기장, 그림, 병상일지, 영수증 등 수천점의 유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김현문학상’을 제정하자는 주장도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다.(박록삼기자) 

김현

▲1942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 출생(본명 김광남) ▲1957년 목포 문태고 입학한 뒤 서울 경복고로 전학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 입학 ▲1962년 ‘자유문학’에 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으로 등단. 필명 ‘김현’ 처음 사용 ▲1968년 4·19세대 문인들이 대거 참여한 ‘68그룹’ 동인 결성 ▲1970년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등과 함께 ‘문학과지성’ 창간 ▲1974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임용 ▲1990년 간경화로 타계

11. 10. 03.  

P.S. 작년에 20주기를 맞아 김현 비평에 대한 비평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얼추 생각난 건 <4월 혁명과 한국문학>(창비, 2002), <김현 신화 다시 읽기>(자음과모음, 2008), 그리고 임영봉의 <청년 김현과 한국문학>(경진, 2009) 등이다. 잡지의 특집들을 제외하고도 더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이 세 권으로도 실마리는 잡을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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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2011-10-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지역따지고 어디 학교 졸업 몇 회입니다~ 이런 것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김현이 중학교선배신 것은 자랑스럽네요.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하네요. 평소 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올 가을에 꼭 기념관은 가봐야겠네요.

로쟈 2011-10-04 20:54   좋아요 0 | URL
고향이 목포시군요.^^

Daniel 2011-10-04 23:55   좋아요 0 | URL
예, 광주와 목포, 무안을 오고 갑니다.^^ 주소는 무안군인데 사실상 목포권인지라 어디 사냐고 하면 목포 옆 무안이라 해야 빨리들 알아들으시더군요. 아무래도 무안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시네요.;;

philocinema 2011-10-05 11:23   좋아요 0 | URL
남악 신도시!

알케 2011-10-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때로 멀고 먼 최전방에서 병정살던 시절 한달이나 지나 읽은 고종석이 쓴 네 매짜리 김현 오비츄어리를 떠올리곤 합니다. 저에게도 김현은 청춘의 상징같은 것이죠. 그의 책을 읽던 봉천동 자취방의 비 오던 날도 생각나고...

로쟈 2011-10-04 20:53   좋아요 0 | URL
전 신림동에 있었습니다.^^

anathema 2011-10-0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 신화 다시 읽기>에 실린 최강민의 김현의 신화와 우상의 탄생을 추천하고 싶네요.


로쟈 2011-10-04 20:53   좋아요 0 | URL
20년이 지나도 넘어설 '우상'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울프심 2011-10-0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의 비평집을 용돈 모아 사던 시절이 그립네요..!!그 책들이 지금 다 어디 가있는지?오래간만에 청춘이었던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로쟈 2011-10-04 20:52   좋아요 0 | URL
문청들의 한 시절이었죠.^^

미국사람 2011-10-04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이 죽었을 때 처음 느낀 것은 나와 동시대인이 죽었다는 생각이었는데 벌써 20년이 됐군요. 4.19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는 김현의 이야기에서 80년 서울의 봄을 안고 살고 있는 나를 봅니다.

고종석의 글이 있어 링크 걸어둡니다.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10/h2006100317263285150.htm

로쟈 2011-10-04 20:52   좋아요 0 | URL
생존했다면, 지금 어느덧 명예교수네요...

허스키 2011-10-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찮게 <행복한 책읽기>를 읽고 있는 요즈음이라 눈여겨 읽어봅니다.

로쟈 2011-10-04 20:51   좋아요 0 | URL
유작으로 나온 때가 어느덧 20년 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