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쌓인 책들을 좀 덜어내다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자와 국가>(도서출판b, 2011)에 손이 갔다. 여느 때 같으면 바로 읽었을 책이지만 다른 일들에 밀려 아직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 출간 소식은 포스팅해놓았지만 본격적인 서평을 본 기억이 없어서 기사를 검색해봤다. 주간한국의 '이 장르 이 저자' 코너에서 가라타니 고진 편을 다룬 게 눈에 띄는 정도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문자론' 정도는 오늘내일 안으로 읽어둘 참이다.
주간한국(11. 04. 06) <근대문학의 종언> 쓴 일본대표 지성
근대문학의 종언. 최근 10년간 국내문학계 담론의 축을 한마디로 요약한 이 말은 기실 문학평론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제목이다. 그의 말에 동조하며 협소한 문학의 지평을 비판하든, 그의 말을 부정하며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긍정하든, 국내 문학계의 다양한 목소리는 그의 선언 안에서 맴돈다.
가라타니 고진. 1941년 태어나 문예비평에 근현대 철학사상을 접목시키며 사상가로 발전한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다. 1969년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평론으로 문학비평을 시작한 그는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통섭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체제를 관통하는 사유를 선보인다. 예컨대 대표작〈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헤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한다. 문학을 통해 국민이란 개념이 생긴 과정을 보여준 셈이다.
그의 책을 관통하는 생각은 '자본주의=민족(Nation)=국가(State)'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다. 이성의 시대, 근대는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 양식(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당시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이란 제도 아래 생긴 사회상이고, 이 제도들이 얼마나 견고하게 맞물리며 이 시대를 구성하는가, 이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소외되는가를 말하는 것이 그의 책의 요지라는 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그는 비평적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 일례로 지난 주 국내 발간된 그의 강연집 <문자와 국가>(도서출판b 펴냄)는 1992년 걸프전 전후 가라타니 고진의 강연을 기록한 책인데,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같은 세대의 사람은 소설이나 시가 철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종교보다도 강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말하자면 문학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문학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작가의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작가가 정열을 잃었다거나 현실과 격투를 회피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이 문학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문학이 그때까지 부여되었던 과잉된 의미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에 사망선고를 내린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난 2004년 국내 번역된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읽히는 사상서, 문학비평집이 됐다. 그리고 한국문학 비관론과 '종언론'에 대한 반론이 이어졌다. 국내 반응에 대해 그는 지난해 본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 책에서 끝날 수 없는 정치(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학이 끝났다고 읽었다. 내가 계속 말하는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문학' 안에는 문학이 없다는 말이었다. 끝나지 않는 정치로서의 문학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문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문학이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국내에서 1만여 부가 팔렸다. 5000권을 넘으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국내 인문, 사회과학 출판시장에서 이 같은 사상서가 1만 부 판매를 달성했다는 건 경이적인 사실이다.
그의 신작 <세계사의 구조>가 올해 여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다.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에 대해 저술한 노작(勞作)으로 일본에서 지난해 중순 출간돼 1만 5000부가 판매됐다. 이 책 역시 국내 지성계에 문제작이 될까? 기다려 볼 일이다.(이윤주기자)
11. 04. 16.
P.S. <문자와 국가>는 원래 <전전(戰前)의 사고>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다. 1992년 걸프전쟁 전후의 강연을 묶은 강연집으로 <트랜스크리틱>의 전사(前史)를 이룬다. 어느새 20년 전이 돼버렸는데, 그맘때 나온 책으론 새뮤얼 헌팅턴의 <제3의 물결>(인간사랑, 2011)도 있다. 1991년에 나온 책이고 부제는 '20세기 후반의 민주화'. <문명의 충돌>(1996)이 나오는 건 5년 뒤의 일이다. '동시대' 미국과 일본의 정치학자와 비평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엿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국가와 민주주의가 공통의 관심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