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1932.2.27~2011.3.23)
구매리스트를 확인해보니 알라딘에서 산 책이 1950권을 넘어섰다. 기억에 몇 권은 소장도서 리스트를 만든다고 다른 곳에서 구입한 책을 구매리스트에 옮겨놓기도 했으니 '순구매'는 그보다 조금 적을 테지만 여하튼 아이 참고서를 제외하고도 1900권은 확실히 넘었고 조만간 2000권에 도달할 듯싶다. 얼추 소장도서의 1/5 가까이를 알라딘에서 구입했다는 계산이다(사실 내가 몇 권을 소장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대략 1만권이 좀 넘겠다고 추정할 따름이다).
맨처음 주문한 책이 뭔지 궁금해 찾아봤다. 알라딘과의 '첫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2000년 10월 25일이 알라딘과 거래를 튼 날짜인데, 네 권을 주문했다. 장 에슈노즈의 <금발의 여인들>(현대문학, 1999), 최수철의 <매미>(문학과지성사, 2000), <카프카 문학사전>(학문사, 1999), 그리고 이스마엘 카다레의 <H서류>(문학동네, 2000) 등이다(카다레의 <H서류>도 품절이군).
당시 한 학원에서 토요일 오전마다 주부들을 위한 교양강좌를 꾸렸고, 나는 한 선배와 격주로 강의를 맡았었다. <매미>와 <H서류>는 내가 고른 강의교재였고, 기억에 <금발의 여인들>은 선배가 쓴 교재였다. <금발의 여인들>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나는 책을 구하기만 하고 읽진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둔 곳을 알지 못하니 내겐 잃어버린 '여인'이 됐다.
'사라진 여인'의 근황이 궁금해 작가 에슈노즈의 책을 더 찾았다. <일년>(현대문학, 1997)이 <금발의 여인들> 이전에 소개된 책이고, 이후엔 <나는 떠난다>(문학동네, 2002), <달리기>(열린책들, 2010)가 더 나왔다(하지만 <달리기>를 제외하곤 모두 품절이다). 르몽드의 평이 아주 그럴 듯하다.
50년대는 드와노의 사진, 60년대는 고다르의 영화, 70년대는 앤디 워홀의 그림을 통해 그 시대를 포착할 수 있다. 80년대는 장 에슈노즈와 그의 네 권의 소설 속에서 찾아야 한다. 에슈노즈가 80년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말하는 것은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간단한 사실 확인일 따름이다.
'80년대'를 포착하게 해주는 네 권의 소설이라, 부쩍 궁금하지 않은가. 물론 <금발의 여인들>은 1995년에 나온 책이어서 그 네 권에 포함되는 건 아니다. 하여간에 '금발의 여인들'이 궁금해서원서의 이미지를 찾아봤다. 에슈노즈의 책은 주로 미뉘출판사에서 나왔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안되는군. 어디에 여인이 있는 것인가?
원제에 충실하자면 '금발의 여인들'에다 '키가 큰'이 추가돼야 할 듯하다. '장신의 금발의 여인들'.(설마 '거대한 금발의 여인들'일까, 아니면 '위대한 금발의 여인들'? 혹은 '금발의 여신들'?) 영역본(1997)의 제목이 'Big Blondes'이다.
음, '금발의 여인들'을 표지에 싣고는 있지만, 웬 '게슴츠레' 형인가? 차라리 클림트의 그림인 듯싶은, 국역본의 표지가 낫다. 그럼 이젠 구하기도 어렵게 된 <금발의 여인들>은 어떤 소설인가?
인기 절정에서 스스로 사라진 여배우를 찾아가는 이야기. '세계 지도에서 자신을 지우고 지하세계를 선택한` 그 여배우는 그같은 자발적 실종으로 인해 매스컴의 추적 대상이 된다. 이쯤 되면 현대 문명과 개인성의 대립을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은 애매모호한 내면화의 길을 걷는다. 작가의 시점은 그 추적 과정에 등장하는 여러 사물과 풍경에 주목하면서, 작중 인물의 희미한 내면 풍경을 독자들 의식의 수면 위로 띄운다. 작가의 전략은 추리 기법으로 독자들을 스토리 속에 밀어넣으면서 동시에 이 소설을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의 내면 초상을 마주보게 하자는 것이다.
사실 <금발의 여인들>이란 제목을 다시 보면서 내가 떠올린 이름은 엊그제 세상을 떠난 '리즈 테일러'이다(그녀가 금발이었나? 아니면 또 어떤가). 기억에 남는 영화는 록 허드슨, 제임스 딘과 공연했던 <자이언트>(1956).
은퇴한 지 오래 됐으니 '인기의 절정에서 사라진 배우'라곤 할 수 없지만, 세기의 여배우와 '죽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사라졌다'라고 말해야 맞는 것 아닌지. 그렇게 그녀 또한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11. 03. 27.
P.S.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영화 몇 편을 떠올려본다. 두 번 결혼한(그래서 두 번 이혼한) 리처드 버튼과 만난 계기가 된 <클레오파트라>, 폴 뉴먼과 공연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그리고 자신의 연기를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했다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