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자음과모음>(봄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김사과의 소설집 <영이>(창비, 2010)를 다루고 있다. 리뷰를 쓰게 된 김에 전작 <미나>(창비, 2008)와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까지 읽는다고 꽤나 시간을 끌다가 결국엔 모스크바에서 쓴 글이다. 얼마 안되는 분량이지만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자음과모음(11년 봄호)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영이’라고 읽지만 ‘02’라고 쓴다. 아니 표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김사과의 첫 소설집 <영이>(창비, 2010)의 표지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의 제목은 <02(영이)>인가? 표제작 「영이」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전체를 뭉뚱그린 제목으로 작가는 ‘02’를 선택한 것인데,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장난을 좋아하는 나의 아이디어”라고 밝혔다. 물론 말장난은 당사자가 직접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때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건 <02>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02’는 ‘영이’란 고유명사에 X선을 투과시켜서 얻은 이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사과는 ‘영이’라는 ‘현실’을 다루는 작가가 아니라 ‘02’라는 어떤 ‘실재’를 투시하려는 작가로 보인다. 그가 포착하고 있는 실재란 어떤 것인가.   

시작은 「영이」였다. 2005년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그렇게 등단한 지 5년만에 낸 창작집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이미 <미나>(2008)와 <풀이 눕는다>(2009), 두 장편소설을 펴낸 경력에 견주면 소설집 출간은 늦은 편이다. 절반 이상은 장편들보다 먼저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장편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02>는 김사과의 전사(前史)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로도 읽을 수 있겠다. 나로선 <02>를 계기로 작가의 장편들까지 같이 읽어보게 됐는데, “우리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소설”(김영찬)이란 평에 공감할 수 있었다. ‘죽고 싶어’ ‘죽이고 싶어’란 말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일찍이 없지 않았을까.  

“죽어라, 둘 다 죽어라. 둘 다 죽어버려라! 하고 영이는 생각했다.”(「영이」)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걸 보고서 영이가 갖는 생각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시작의 시작’이다. 이때 ‘영이’는 ‘0이’다. ‘둘’이 ‘2’를 가리킨다면 영이네 가족은 ‘0과 2’가 동거하는 가족이다. 보통은 부모(2)와 아이(1)가 결합하여 가족을 구성하고, 그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애증이 ‘가족 로망스’의 기원이자 소설의 기원이었다. 이 이야기의 기원에는 물론 부친살해에 대한 욕망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오이디푸스가 그러한 욕망의 주체이고 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가족 서사의 모형이었다. 일반적인 가족 서사를 ‘1+2’의 이야기란 의미에서 ‘12’라고 한다면, 김사과의 ‘02’는 ‘0+2’의 이야기이다. 부모 중 한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증오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둘 다를 증오하는 이야기. 따라서 발을 딛고 존재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이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깨진 그릇’의 이야기가 ‘영이’ 혹은 ‘0이’의 이야기다.  

술주정꾼인 영이의 아빠는 아이가 듣는 자리에서 아내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너 같은 에미가 키운 딸년이 어떨지 진짜 걱정된다. 저년도 똑같아. 저 씨발년도 지 에미랑 아주 똑같아.” 해서 아이는 ‘아, 난 이제 더럽혀졌구나.’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느낀다. 작가 화자는 독자 또한 그런 걸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는 게 그의 바람이고,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으니까.”라는 게 그의 경고이다. 우리는 한 ‘더렵혀진’ 아이의 이야기를 읽고 함께 더럽혀졌다고 느껴야 한다. 그것이 김사과 소설의 독법이다.  

평론가의 해설을 빌면, 김사과의 소설은 “한국사회의 현실에 절망적인 분노로써 반응하고 분열증으로써 싸우는 소설”(김영찬)이다. 무엇이 한국사회의 현실인가. 영이의 시각으로 축소해서 말하자면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가 그 ‘현실’이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현실’로 은유되거나 곧바로 등치될 수 있을까. “월세를 내지 못한 조선족과 외국인노동자가 매달 몇명씩 쫓겨나는 다 무너져가는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나의 삶”(「이나의 좁고 긴 방」) 같은 진술이 예외적일 만큼 김사과의 소설에서 ‘현실’의 지표는 왜소하거나 빈약하다. 그것이 ‘어떤’ 현실은 될 수는 있을지언정 ‘한국사회’의 현실로 일반화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이유다(김사과식 가족 서사를 일반화시켜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사과 소설의 인물들이 앓는 분열증의 근원에 ‘한국사회 시스템의 억압성과 폭력성’이 놓여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좀 추상적이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고 질문을 던진 한 인물은 “주위의 모든 것”이 그 분노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셀로판지 같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셀로판지가 되기엔 너무 두껍고 또 인간이 되기엔 너무 얇은 뭔가다.”라고 규정한다. 즉 그는 셀로판지와 인간 사이의 두께를 가진 존재(뭔가)다. 이러한 존재성이 김사과 소설의 모든 인물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아닐까. 그 인물들의 반사적인 의식과 발작적인 행동은 그러한 (보통의 인간보다는) ‘얇은 존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김사과 소설에서 문제적인 것은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유독 그런 분노를 폭발시키는 ‘얇은 인간’의 발명이다. 이 ‘얇은 인간’은 많은 걸 쌓아둘 수 없기에 토해내고 쏟아낸다. 그들에게 분노의 폭발이 잦은 것은 그 때문이다.  

「움직이면」의 ‘나’는 국밥집 여주인을 난데없이 칼을 휘둘러 죽이며, 국밥을 먹으러 온 중학생까지도 맥주병으로 쳐서 죽인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없이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어 인생을 망친다.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다. 알겠냐? 이게 바로 삶이라는 거다.”라는 게 나름대로의 인식이고 자기 행동에 대한 변호다. 요컨대 우리 모두는 살인자이거나 피살자라는 것. 그러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김사과 소설은 생생한 ‘현실’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한 단순화이며 소설은 삶의 중간영역에 대한 탐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미니어처적인 소설세계는 부피와 두께를 더 키울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가 다 똑같이 좆같다고 생각해.”(「나와 b」)는 ‘현실’이 아닌 ‘기분’의 세계다.  

11.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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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1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덜컥 겁이 나요. 그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괴물이 된 것만 같고, 전혀 이해를 못할 것 같으면 이번엔 그들이 괴물처럼 느껴져서요. 정말이지 그 분노는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들이 돌연변이 취급을 당하면 안 될 텐데요...

로쟈 2011-03-11 09:22   좋아요 0 | URL
분노가 힘을 가지려면 리얼리티가 있어야 하고, 축적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발작적 폭력으로 해소되고 마니까요...

Mephistopheles 2011-03-11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아주 뻔한 이야기로 하자면...요즘 세태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쟈 2011-03-11 09:23   좋아요 0 | URL
'세태'의 추상적 반영 같습니다...

달담이와Anne 2011-03-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으니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억압'이군요. 물질적인 환경, 사회적인 환경, 신체적조건의 원인이든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의지'와 '억압'사이에서 분투하는 존재들인것 같아요. 민주주의 사회, 경제적인 요건, 사회적 제도는 향상 되었지만 정신적 빈곤, 체면, 사회적 통념, 악습, 냄비근성, 권위의 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군요. 아니, 모든 세계가 다 그런가요?

로쟈 2011-03-13 22:46   좋아요 0 | URL
음 '억압'도 좀 추상적이긴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문제 같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