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 바깥의 연구공간이나 지식공동체, 하면 떠올리기 쉬운 건 '수유+너머'이지만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곳이 조금 더 있는 걸로 안다.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도 그런 경우인데, 자세하게 소개해주는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특히 올해의 세미나 주제인 ‘자본·미국·한국 지식인’의 성과가 빨리 묶여서 나오길 기대해본다.
한겨레(11. 01. 07) ‘진보적 지식’ 나누는 제도 밖 연구 공간
“인도 웨스트벵골주에서는 인도 공산당이 20년째 장기 집권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개입한 공산당 대학살 이전, 전성기 때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에 주목하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식인이 과연 우리나라엔 얼마나 될까요?”
많은 지식인들이 대학, 연구소, 국가기관 등 이른바 공식적인 ‘지식의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제도를 벗어나 ‘대안적인 지식 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지식인들 역시 자본이나 미디어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느냐는 항상 체제의 요구에 따라가기 마련이다. 체제는 또 전문 지식인에게 권력을 주는 방식으로 지식 생산의 위계적 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독립적인 연구 공간을 표방하는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seumnet.com)은 이러한 지식 생산의 체제를 거부하는 곳이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커짐에 따라 그동안 대중이 모여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아카데미나 연구 공동체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설립 취지와 운영 방식을 볼 때 새움만큼 급진적인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4일 서울 합정동 새움 세미나실에서 만난 새움 회원 한형식(43), 유승민(34)씨는 인터뷰 내내 “우리는 각각 한 명의 회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신들의 말이 마치 새움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우려한 탓이다. 새움에는 대표나 상근자, 실무자 등이 따로 없다. 또 회원에 대한 자격조건도 따로 없다. “전문적 지식인에서부터 일반 대중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으며, 오직 참여와 공감만이 회원이 되는 최소한의 자격조건”이라고 한다. 강좌와 세미나 등 모든 활동은 무료로 이뤄지며, 오직 회원들의 자발적인 분담 노력만으로 재정을 충당한다. 세미나실 청소나 도서 정리, 문단속 등 모든 크고 작은 일들도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다. 새움의 유일한 의사결정 기구는 한 달에 한 번,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뿐이다.
새움이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해 온 한형식씨는 “대안적인 지식을 만들어내려면, 대안적인 삶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존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권력과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대안적인 지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새움의 시초는 8~9년 전 연세대에서 학생들이 만들었던 정치철학 세미나라고 한다. 그 뒤 유승민씨와 같은 정치경제학 전공자들이 합류하면서 공부의 영역이 확장됐고, 점차 지금과 같은 틀이 만들어졌다. 새움이라는 이름을 단 지는 올해로 5년째라고 한다.
자발적인 회비로 굴러가는 곳에서 안정된 생활의 근거를 찾기란 불가능할 터. 그동안 새움을 거쳐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학과 같은 제도 안으로 편입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학생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꾸준히 새움을 찾아온다고 한다. 유승민씨는 “고등학생 자녀를 둔 중년의 여성 회원이 꾸준히 ‘<자본론> 강독’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며 “(새움의 운영이)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으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현재 강좌·세미나에 참여하는 인원은 70~80여명. 지난해에는 ‘새움총서’ 시리즈의 첫 책으로 한형식씨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정체성 때문이겠지만, 새움에서 이뤄지는 세미나 주제들은 대부분 제도권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다. ‘아시아 저항운동’, ‘라틴아메리카 사상’ 등의 주제가 눈에 띈다. 한씨는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자’는 것이 우리의 모토”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 첫번째고, 학계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서구 담론이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전해나간 마르크스주의를 연구 주제로 삼는 것이 두번째다. 국가와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권 학계가 주목하지 않는 지점이 되레 새로운 대안의 싹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씨는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짚기 위해서는, 서구의 주류 담론을 붙들고 있지 말고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맥락에 처했던 지역에서 일어났던 움직임들을 포착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움의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는 올해 처음 시작하는 ‘자본·미국·한국 지식인’ 세미나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지식이 생산되고 유포되는 과정에서 어떤 계획과 제도들, 그리고 정치경제적 힘이 작용했는가”를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다. 곧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가 형성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다. 한씨와 유씨는 “지식에 대한 권위를 물려받아온 제도권 학계에선 절대 손댈 수 없는 주제”라며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연구의 결과들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엔 새움의 역량이 아직 미비한 것이 아닐지? 독립적 연구 공간으로서 이제 미약하나마 자리를 다졌다고 보는 새움 회원들은, 앞으로 다른 단체 및 개별 연구자들과의 연계와 협력을 통해 콘텐츠를 더욱 확대해나갈 계획을 짜고 있다. 비록 새움에 직접 참여하진 않더라도, “지식은 조건 없이 나눠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할 연구자들은 없을 것이란 기대다.(최원형 기자)
11. 01.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