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읽을 만한 책'에도 올려놓았지만 이마무라 히토시의 <화폐 인문학>(자음과모음, 2010)은 지난주에 나온 가장 눈길을 끄는 책이다. 하지만 바로 독서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가 분석하고 있는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을 아직 읽지 않아서인데(예전 번역인 <사전꾼들>이란 제목이 더 친숙하다), 이달 중에 사정이 나아질지는 모르겠다. 일단은 리뷰기사라도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1. 01. 01) 돈, 넌 대체 누구냐? 경제 밖의 돈 이야기 

‘김중개라는 남자와 박머니라는 여자가 만났다. 둘은 첫눈에 반해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어느 날 서로의 이상형을 각자 만나게 된다.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좇아가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둘 다 비극적 결말을 맞고 만다.’

통속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접하는 줄거리다. ‘눈물 없이도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인 셈이다. 한데 일본의 현대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이마무라 히토시(1942~2007)가 읽었다면 이 소설은 분명 ‘화폐 소설’로 자리매김됐을 것이다.

이마무라는 화폐를 향해 ‘넌 도대체 누구냐’라는 원초적 질문을 던진다. 원제 <화폐란 무엇인가>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화폐의 경제적 기능론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조건에서 화폐를 조명”했다. 화폐의 기능은 교환, 시장 등 여러 각도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화폐의 존재’는 다른 시각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이 같은 접근을 “화폐의 사회철학”이라 했다. 인간에게 화폐가 갖는 의미를 곱씹어보자는 것이다.  

그는 화폐의 사회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경제 전문서적을 찾지 않았다. 괴테의 <친화력>,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답을 구했다. 그는 이들 작품을 ‘화폐 소설’이라 명했다. “상식적 의미의 화폐가 등장하지 않는 곳에서야말로 화폐의 본질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뛰어난 소설은 예외 없이 인간의 근원적 경험에 접근하는데, 이러한 근원적 경험이야말로 화폐적 경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문학작품은 우수한 것일수록 화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와 결혼 문제를 다룬 소설로 볼 수 있는 괴테의 <친화력>. 주인공 미틀러는 문자 그대로 ‘매개자’를 뜻한다.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소설의 무대를 움직이고 등장인물들의 파국을 암시한다. 화폐는 평범한 얼굴을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경제생활은 마비된다. 이에 저자는 미틀러를 “인간의 형상을 한 화폐”로 봤다.

청교도 부르주아의 위선과 악덕을 다룬 소설 <위폐범들>에 등장하는 프로피탕디외는 ‘신을 이용해 이윤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름에서부터 이미 화폐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앞서 소개된 ‘김중개’나 ‘박머니’처럼 저자에게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인간관계의 매개자이자 화폐의 또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특히 지드가 위조화폐를 통해 경제현상의 이면에 펼쳐진 인간군상을 보여준 데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경제학이 경제적 사실밖에 말하지 않는다면 인간적 현실을 진실로 설명했다고 할 수 없다. 경제학의 이러한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드의 <위폐범들>은 하나의 경제학 비판서다.”  

이마무라의 말을 듣자니 아무 소설, 아무 쪽이나 봐도 돈 이야기가 나온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살인범이 여자를 죽이는 데 사용한 칼조차 그냥 칼이 아니라 ‘얼마짜리’ 칼이다. 생계를 위해 글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돈을 이해하고 돈의 막강한 역할을 꿰뚫어본 작가로 평가받는다. 이마무라였다면 그의 소설을 과연 어떻게 해석했을지 궁금해진다.

이마무라에 따르면 <친화력>에 등장하는 ‘무덤 파괴’ 이야기나 <위폐범들>에 나오는 일부 죄 없는 자들의 죽음은 규칙이나 관습 같은 ‘제도화한 매개 형식’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충돌의 결과다. 그는 화폐가 동물세계와 달리 인간들의 폭력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매개자임을 거듭 강조한다. “운명과 죄와 관련한… 신화적 자연의 힘을 덮어버리는, 누름돌 역할을 하는 매개자가 사라지면 인간관계는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그는 화폐 없는 인간사회를 부정한다. ‘화폐 폐기론’에 ‘재앙론’으로 맞선다. 인간은 상호 교류가 숙명적이므로 교환의 매개인 화폐를 폐기하면 인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다. 경제학적 차원에서는 이상적일지 모르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과 연결지으면 화폐 폐기는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역자의 말처럼 이 책은 “문학작품 독해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도 있다. 나아가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자신이 ‘화폐 소설’의 주인공이니 말이다.(고영득 기자) 

11. 01. 02.  

P.S. 저자도 언급하고 있는 책이지만 절판된 게오르그 짐멜의 <돈의 철학>(<화폐의 철학>)도 재번역돼 나오면 좋겠다("부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주고받는 나라에서 이런 책도 읽을 수 없다는 건 미스터리한 일이다). 한편, 2000년대 일본 사상의 지도를 그려주는 책이 출간됐다. 사사키 야쓰시의 <현대 일본사상>(을유문화사, 2010). '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가 부제다. 두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이라면 호기심이 발동할 만한 책이다. 바로 주문을 넣은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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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구 2011-01-03 00:12   좋아요 0 | URL
짐멜의 <돈의 철학>은 작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번역하신 김덕영 선생께서 번역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번역 작업에 들어 갔는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빨리 독일어 원전 번역이 나오기를 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실력있는 번역자께서 번역을 하셔도 좋겠지만, 김덕영 선생님이 베버와 짐멜 전공자이시고 신뢰할 만한 번역자이시니까 그 분이 하셨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로쟈 2011-01-03 09:07   좋아요 0 | URL
네, 번역계획을 갖고 계신 걸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