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연평도 포격 훈련 때문에 '전쟁'에 관한 책들을 좀 뒤적이다가 '구조적 폭력' 문제로 방향을 틀어서 쓴 것이다. 참고로, 로스키와 피카소의 일화는 지젝의 근간 <폭력>(난장이, 2011)에서 가져온 것이다.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 '객관적'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하는데, '구조적 폭력'이란 말은 'systemic violence'을 옮긴 것이다. '체계적 폭력'이라고 옮기면 '체계의 폭력'이란 의미가 살아나지 않아서 '구조적 폭력'이라고 옮겼다. 구조적 폭력이란 어떤 사회체제(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가해지는 체제(구조) 자체의 폭력, 기초적 폭력을 말한다. 말하자면 게임에서 일어나는 폭력(반칙)이 아니라, 강요되는 게임의 룰 자체의 폭력성을 가리킨다.    

경향신문(10. 12. 21) [문화와 세상]‘구조적 폭력’에 둔감한 한국사회

러시아혁명에 뒤이은 내전이 종식된 후 1922년 소비에트 정부는 주요 반공주의 지식인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철학자와 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들이 ‘철학 기선’이란 배를 타고 독일로 쫓겨났다. 그들 가운데는 저명한 철학자 니콜라이 로스키도 포함돼 있었다.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그는 유모와 하인들을 거느린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안락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도 애썼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무엇이 문제였다는 말인가. 

하지만 어떠한 ‘주관적’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을지라도 로스키가 부당한 폭력의 희생자인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철학자 지젝은 로스키가 누리던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구조적’ 폭력이 지속되어야만 했던 현실에 대해 그가 놀랍도록 무지했다고 꼬집는다. 따뜻한 거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에 관해 고상한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는 제정러시아라는 억압적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돼야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비폭력주의만으론 부족하다. 사회체제의 기초적 차원에 놓인 구조적 폭력을 간과하거나 문제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울 좋은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무엇이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인가.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소리 없는’ 구조적 폭력의 원천이다. 현대자동차 울산 1공장에서는 73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이 중 23%인 1700여명이 사내하청업체 비정규직원이라고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같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함께 일하지만, 비정규직의 급여는 정규직의 50~70%에 불과하다. 이러한 차별적 임금에 더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에 대한 상시적인 불안에 시달려야만 한다. 이런 것이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폭력의 실상이다. 그 정도는 상식 아니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을 ‘상식’으로 용인하는 우리의 시선 자체가 대단히 문제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억울하면 정규직이 되면 될 거 아니냐?”는 시선이야말로 구조적 폭력의 방관자이자 대행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얼마 전 화제가 된 재벌회장 사촌의 ‘맷값 폭행’에 대해 “억울하면 재벌 사촌이 되면 될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맷값 폭행’에 대해서는 들끓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냉담한 게 우리의 여론이다. 주관적 폭력에는 발끈하지만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둔감하기 때문일까. 이런 둔감함의 표지는 술자리 건배사에서도 읽힌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의 약칭이기도 했다는 ‘이대로’는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득권자들의 구호다. 군사정권 때부터 내려왔다는 ‘위하여’란 구호는 일종의 ‘충성구호’라고 하지만, 뭔가 ‘대의’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겨진다. 무엇을 ‘위하여’란 말인가. 다수의 희생과 착취에 근거한 사회체제가 ‘이대로’ 지속될 리는 없다. 그렇다고 막연한 ‘위하여’로 사회가 변화할 것 같지도 않다. 우리에겐 ‘이대로’와 ‘위하여’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피카소의 사례가 교훈이 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장교가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화실을 찾았다. 나치의 무차별 학살을 고발한 ‘게르니카’를 보고 이 장교는 “당신이 그랬소?”라고 물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바로 당신이 그랬소!” 

10. 12. 21.  

P.S. 니콜라이 로스키의 일화는 레슬리 챔벌레인의 <레닌의 사적인 전쟁>(2007)에서 지젝이 인용한 것이다. 피카소 얘기가 나온 김에 검색해봤지만, 허다한 예술가 평전 가운데 피카소 평전은 눈에 띄지 않는다.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평전이 없진 않을 듯싶은데, 가장 유명한 현대 화가의 평전이 소개되지 않는 것도 좀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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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2010-12-21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구조적 폭력의 예가 부적절한 듯 합니다. 한국의 구조적 폭력의 예이니까, 다른 나라에는 없고 한국사회에만 특유한 사례가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정규직은 한국에만 있는 구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독일에도 비정규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융위기 당시 다이믈러(메르세데스 벤츠)사는 수천에 이르는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했습니다. 경제위기시 역시 비정규직이 총알받이이기는 마찬가지죠. 비정규직이 한국사회에만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벤츠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차이가 없습니다. 아주 바람직한데, 문제는 그들에게 연공서열에 의한 임극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연공서열에 의한 임금격차는 유럽이나 미국에는 없는 현상입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벌써 연공서열제도에 의해서 한국의 기업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연공서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요?
한국사회의 비정규직은 해결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현실문제를 분석하고 판단하셔야 의미있는 발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절대적인 비율의 비정규직은 20인 이하의 중소 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의 비정규직 숫자는 한국사회 전체의 비정규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작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소기업은 돈을 더 줄 능력이 없죠. 무슨 결단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네요.

로쟈 2010-12-21 08:39   좋아요 1 | URL
비정규직 한국사회의 문제라고만 적진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내지는 승자독식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고 했고요. 한국적 특수성이라면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제노동기구 보고대로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것(선진 27개국중 최고 하락속도라는군요), 그래서 '워킹푸어'가 점차 고착되고 있다는 것 등이겠죠. 결단은 이런 체제를 바꿔야겠다는 '다수'의 결단입니다...

mirror 2010-12-21 08:53   좋아요 0 | URL
실질임금의 하락은 요3년간 일 겁니다. 그 이전 정부에서는 도시근로자 상위 80프로의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하위 20프로도 줄지는 않고 제자리였습니다. 실질소득의 감소는 지금 정부의 문제일 뿐,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실질임금의 하락은 급격한 물가의 상승, 불경기등의 영향도 많이 받는데, 이런 문제는 정부가 잘했다면 회피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환율, 금리 등이 실제로 많은 영향을 미치거든요. 현정부에서 환율이 얼마나 올랐으며, 금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년의 한국은행 인플레이션 가이드라인이 4프로가 넘는데, 이건 정말 황당무계한 수준이죠.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정권의 특성을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mirror 2010-12-21 09:05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전반의 문제이고, 이에 대한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 알 수 없군요. 그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야 타인들의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이 원죄론에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인 세계화와 이에 따른 경쟁의 격화가 오늘날 많은 문제점의 원인이 아닐지. 그리고 이 세계화는 우리가 회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북한식으로 우리끼리 굶어죽자가 아니라면.

로쟈 2010-12-21 09:20   좋아요 1 | URL
생각건대, 아마 비정규직도 아니실 테고, 20/80의 80도 아니실 테니 현 체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실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mirror 2010-12-21 17:10   좋아요 0 | URL
소득분포에서 전 로자님 밑에 있습니다. 그리고 독해력좀 기르시기 바랍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12-21 22:30   좋아요 0 | URL
흠, 현 정부의 잘못과 구조적 문제를 혼동하지 말라. 이 글은 혼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득력이 없다.는 이야기신가요.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군요. 경제에 있어 '구조'와 '현상'이 그리 명백하게 구분됩니까? 또 '현 정부의 실책'과 '구조적 문제'를 혼동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게 그리 분명합니까? 만약 현 정부의 실책이 '구조적'이고 전 정부가 유난히 '잘 꾸려간' 케이스라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에 무심하다. 좀 다른 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안'까지 명백하게 제시해야 한다면 마르크스나 레닌, 케인즈와 히틀러가 아니고는 입도 뻥긋 못하겠군요.

로쟈 2010-12-21 08:54   좋아요 1 | URL
워킹푸어 문제는 용어 자체에서 알 수 있지만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담 최소한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죠. '지금 정부'의 문제로 더 악화되는 문제가 있다면 그 또한 바뀌어야 되겠고요. 제 방점은 '한국사회'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폭력)'에 놓여 있습니다. 제가 문제삼은 한국사회는 그런 문제에 대해 '둔감'하단 것이구요...

2010-12-21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마음 2010-12-2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010-12-21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igarion 2010-12-2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조적인 폭력에 둔감한 한국사회에서 피카소의 사례가 도대체 어떤 점에서 교훈이 된다는 겁니까? 나치의 무차별적인 학살이 한국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동일선 상에서 비유 가능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덕분에 나치가 패망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우리도 용산참사 현장이나 4대강 개발로 황폐하게 변해버린 풍경들을 그려대면 '구조적 문제(폭력)'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2010-12-21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xbook 2010-12-22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irror/ 한국의 임금소득자(일반 노동자)의 삶의 질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지표는 노동소득분배율(=피용자보수/GDP)입니다. OECD 자료를 보면 아실 수 있지만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1996년까지 꾸준히 성장하다가 1997년 IMF 사태 이후 급감해 대체로 하락 추세입니다. IMF 이후로 기업들이 구조조정과 임금 압박, 노동조건 후퇴를 강요했기 때문인데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변화는 이 전반적 추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mirror 2010-12-22 17:00   좋아요 0 | URL
노동소득분배율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나빠졌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다만 분배 구조가 악화되었다는 증거가 될 뿐이죠. 분배 구조의 악화, 즉 상위 자본계층이 더 많은 비율의 소득을 가져갔다고 해서, 반드시 하위 노동계층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 못하신다면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양극화 담론도 한국에서만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습니다. 양극화란 말을 한국 지식인처럼 자주 사용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양극화되었으나, 하위계층의 실질소득이 증가했다면, 그것이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양극화가 감소하는 것이 더 바람직지만, 하위계층의 실질소득이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입니다.
양극화란 노무현 정부 당시 좌우가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일 뿐이죠. 중산층의 실질 소득이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 특유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 아니었나요?

marxbook 2010-12-23 11:20   좋아요 0 | URL
노동소득분배율은 양극화 정도를 나타내고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로는 실질소득이 더 유용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양극화 담론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거나 실질소득이 어쨌든 증가했으니 괜찮다는 얘기는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치거나(IMF 직후와 2008년 직후의 한국) 정부가 급격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경우(1980~2000년 미국과 NAFTA 발효 직후 멕시코)가 아니라면, 웬만한 산업국가에서 실질소득은 대체로 상승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사실 삶의 질을 따질 때는 실질소득 상승률을 더 많이 참고하죠. 노무현 정부 때도 실질임금 상승률은 꽤 저조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벌어진 양극화가 "허구적 개념"이라거나 "한국 사람 특유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였다는 얘기에는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회고록에서 자신의 최고 실책이 양극화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현 정부를 아주 싫어하지만 전 정부의 한계와 잘못도 직시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길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