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재의 컴퓨터가 다운되고 아직 복구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거실에 있는 아이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다. 같은 집구석이긴 하지만 뭔가 일을 하려니 좀 '고급한' 난민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파일이나 즐찾은 모두 남겨두고 빈손으로 몸만 빠져나와 있어서 그렇다. 기사 검색도 부자유스러운 가운데, 자서전에 관한 칼럼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내달까지 마무리지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자서전 쓰기'이기도 해서다. 러시아에 잠시 다녀올 수도 있는데, 가방에 자서전 몇 권을 챙겨가야겠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에도 흥미가 생긴다...
경향신문(10. 12. 04) [서재에서]자서전 이야기
삶 자체나 작품보다 솔직담백한 자서전 덕분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인물이 르네상스 예술가 벤베누토 첼리니(1500~71)다.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그의 자서전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돼 있을 정도다. 기행(奇行)을 일삼은 그의 자서전은 르네상스라는 시대적 상황에 걸맞게 진솔하게 써내려간 문체로 인해 오늘날까지 뛰어난 자서전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첼리니의 자서전을 처음 독일어로 번역한 문호 괴테는 낯 뜨거운 정사 장면들은 아예 빼버렸을 정도다. 이렇듯 자신의 이름에 치명적인 사실도 솔직하고 대담하게 드러낸다. 심지어 적과 경쟁자를 살인한 사실도 숨김없이 기록했다. 괴테는 첼리니야말로 르네상스 정신의 실체를 보여준다고 여겼다. 첼리니는 자서전의 집필 자격을 언급하기도 했다. “상당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면 누구든 출신에 관계없이 자기 업적을 기록한 자서전을 남겨도 괜찮다. 다만 나이는 적어도 마흔 이상이어야 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89)도 홍보 전략의 하나로 자서전을 출간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대부분의 화가가 책을 쓴다는 생각조차 못하던 때다. 글 솜씨도 뛰어난 달리는 책 출판이 예술가의 이름을 선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는 자서전이 잘 팔리도록 자위행위, 성체험, 10살 연상이며 유부녀인 갈라와의 운명적인 사랑과 결혼, 독특한 예술관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얘기로 가득 채웠다.
흔히 세계 5대 자서전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 괴테의 <시와 진실>, 한스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한 혁명가의 회상>을 꼽는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에 대해선 덴마크 작가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큰 발자취를 남긴 대가들의 자서전은 크게 3가지 가운데 하나다. ‘이제까지 나는 길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참다운 길을 발견했다.’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보다 낫다고 감히 나설 수 있는 자는 누구냐.’ ‘천재는 바로 이런 좋은 환경에서 내면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해 왔다.’ 첫 번째 사례는 아우구스티누스이고 두 번째는 루소이다. 세 번째는 괴테다.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은 3가지 유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내가 본 자서전 중에서 최고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의 자서전은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자서전과 더불어 3대 고백록으로도 일컬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명실상부한 최초의 자서전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힌 자서전은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같이 작품성이 탁월하면서도 솔직하게 썼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손꼽히는 자서전이 모두 서양에서 나온 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자서전이 동양에선 20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영향이 크다. 흥미로운 일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마하트마 간디가 1925년 무렵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중단하라면서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어째서 모험을 시작할 마음을 먹었는가? 자서전을 쓰는 일은 서양에만 있는 관습이라네. 알다시피 동양에서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서전을 쓴 사람이 없다네.” 중국에서도 1933년 후스(胡適)가 40세 때 쓴 <사십자술(四十自述)>이 사실상 첫 자서전으로 꼽힌다.
자서전처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저술도 없지만 자서전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부풀리는 저술도 없다. 자서전이 ‘반(反) 자서전’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긴 듯하다. 이청준의 소설 <자서전들 씁시다>에 나오는 대필업자 윤지욱이 의뢰자인 인기 코미디언 피문오에게 대필을 중단하겠다며 보낸 마지막 편지가 무척 시사적이다. ‘과거가 아무리 추하고 부끄럽더라도 솔직히 시인할 정직성과 참회할 용기, 자신의 것을 사랑할 애정이 없으면 자서전 발간을 단념하십시오.’(김학순 대기자)
10. 12. 05.
P.S. 가장 최근에 구한 자서전은 앙드레 지드의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나남, 2010)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강만길 선생의<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올해는 두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 연말 독서계획에 자서전을 포함시켜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