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권력의 시대와 멍텅구리들
'삼성 문제'에 대한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일반화해서 말하면, 기업이 권력화된 시대이고, 자본의 국가지배가 더 강화된 시대로 접어들어서이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전략적 접속'의 결과 국가가 기업에 대한 제어능력, 혹은 제어의사를 상실했다면, 남은 것은 시민사회인가? 조정래의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2010)의 결론도 그렇고, 최근의 초점은 시민사회 역할론으로 모아지는 듯싶다. 학술적인/이론적인 언어로 이 문제를 짚은 책의 제목이 <민주주의 체체하 '자본의 국가지배'에 관한 연구>(한울, 2010)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자본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전멸시킬 수 없고, 민주주의의 형식만으로는 자본을 해체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통상의 '민주주의 강화론'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생각된다.
한겨레(10. 11. 05) 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업은 어떻게 권력을 키웠나
민주주의 체제가 이뤄진 뒤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주된 분석은 “절차적 민주화는 이뤘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못 이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전망들은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왜 못 이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렷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최근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이종보 박사(사회학)가 써낸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권력 지배를 심화해왔는지 분석한 책이다. 삼성그룹으로 대표되는 자본세력이 민주주의를 형식화시키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썼는지 세밀하게 밝혀, 앞선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출발점은 “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기업권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느냐”는,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의문이다. 이를 풀기 위해 지은이는 ‘복합관계론적 계급지배론’을 우선 제시한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벌어지는 세력 사이의 경쟁을 본질적으로 불균형적인 계급 적대라고 파악하면서도, 이를 단지 경제적인 관계로만 보지 않고 복합적이고 다양한 관계들을 함께 살핀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는 민주주의 체제를 ‘형식화’하려는 전략과 ‘실질화’하려는 전략의 각축이 존재한다고 설정했다. “민주주의 체제를 형식화해 최종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식민화하려는 자본 분파 등 지배블록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파들의 실천과, 그에 맞서 민주주의의 수준을 심화해 실질화하려는 시민사회 운동세력 사이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각축장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오며 열린 공간들, 곧 국가기구·제도정치·시민사회 등이다.
그러나 이런 각축은 불균형적이다. 자본세력이 불평등한 현실 권력을 활용해 민주주의 체제에 전략적으로 접속하려 들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곧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 협상 테이블에 저항 세력들이 초대되는 것을 거부할 순 없지만, 협상 결과는 자본에 이익이 되는 정책이 산출되게 하는 것”이다. 연구대상인 삼성그룹의 전략을 살펴보면, 이런 전략적 접속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요 각축장인 제도정치에서 삼성은 전체 정당체제를 아우르며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을 폭넓게 제공했고 이는 선거경쟁에서 시민사회 운동세력의 전략을 압도했다. 행정·사법 관료에 대한 매수·포획 등의 방법으로 국가기구내에서도 기업권력의 거점을 만들었다.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시민사회도 예외가 없었다. 삼성은 자본의 주요 대립축인 노동조합을 애초부터 배척하고, 언론과 대학·지식인 등 가능한 많은 자원들을 동원해 시민사회로부터 ‘지지·동의’를 조직해내는 전략을 썼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친기업 담론의 유포나 대규모 사회공헌활동 등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물론 자본세력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전략을 관철하기만 하지는 못했다. 엑스(X)파일 공개,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등을 계기로 시민사회 운동세력의 저항 역시 꾸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돌파하는 삼성의 전략은 되레 자본의 전략적 접속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줬다고 본다. 각종 문제 제기가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삼성은 삼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기업의 문제로 치환하는 등 ‘분산 파편화 전략’을 썼고, 불법 경영권 승계 문제 등에 대해서는 기업권력으로 기울어진 사법부를 활용한 ‘사법 적극주의’를 써서 저항 세력의 발목을 잡았다. 또 대국민 사과 등으로 시민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능동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시도도 벌였다. 반면 시민사회 운동세력은 비대중적 수단인 사법부의 결정에만 기대는 등 한계를 드러냈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대자본 헤게모니와 공존하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결말은 비극인가? 지은이는 “자본은 민주주의의 형식을 전멸시킬 수 없고, 민주주의의 형식만으로는 자본을 해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계급 지배가 계속되지만, 그것은 분명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질화 전략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저항 세력으로 하여금 사법 영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사법관료의 자본 편향적 판결 앞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정치’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의 실질화는 운동정치와 제도정치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맞서는 ‘대중적 헤게모니 담론’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시민사회 운동세력들이 ‘정체성 구분하기’에서 벗어나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대안적 전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최원형 기자)
10. 11. 07.
P.S. 현단계 '자본의 국가지배'가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유구한 '전력'을 갖고 있다. 히로세 다카시는 기업권력이야말로 제1권력이라는 사실을 진즉에 폭로한 바 있다. 하지만, <기업권력의 시대>(난장이, 2009)의 저자에 따르면 기업권력이 오늘날만큼 극대화된 적은 없었다. '전면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 상응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자기계발 담론이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는 기업권력의 시대가 곧 자기계발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2004년부터 국립국어원의 신조어로 등록되었다는 '스펙'은 그런 점에서 언제부턴가 통용어가 된, 그리고 장래희망의 대명사가 된 'CEO'와 함께 기업권력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징후적 키워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