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게 가라앉은 하늘만큼이나 마음도 가라앉은 주말 오후다. 엊저녁에 마신 맥주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그런 경우는 아주 드문데) 낮잠도 잤다. 저녁의 가족모임에 나가기 전 잠시 자투리 시간에 정신을 좀 가다듬을 요량으로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는다. 어느새 10월이군...  

1. 문학 

이달부터 문학분야 추천위원이 신경숙 작가에서 정과리 교수(연세대 국문과)로 바뀌었다. 첫 추천작은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지>(문학과지성사, 2010). 작가의 문학적 이력을 소개하면서 추천자는 이렇게 적는다. "...광주항쟁을 총체적으로 재현한 <봄날>(1997)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이후 임철우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듯이 보였으며, 꽤 오랫동안 침묵에 빠졌다. <등대>와 <백년여관>을 상자했으나 언어 훈련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 소설 <이별하는 골짜기>를 통해 임철우는 자신의 필력이 결코 소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야가 한층 넓어지고 언어의식이 깊어졌음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임철우란 작가의 존재를 다시금 증명해주는 소설이란 얘기다.   

80년대 작가의 존재증명에 견주에 90년대 작가의 속깊은 얘기도 들어봄직하다. 윤대녕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푸르메, 2010)이 그것. 나로선 그의 산문집이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가들이 있는 반면에 자기 생을 소진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윤대녕은 후자 쪽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쓰는 창작형 작가들에 반해서 소진형 작가들은 한 가지 이야기만 반복해서 쓴다.   

그런 소진형 작가로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레전드'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을유문화사, 2010)도 빼놓을 수 없겠다(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4160605 참조). 소설은 알코올 중독자인 주인공이 기차여행을 하며 늘어놓는 '성스런' 횡설수설담인데, "보드카가 흥건한 이 고전은, 절대적으로 부패한 사회에서 이곳이 아닌 그곳에 도달하려는 어느 망가진 남자의 시도를 그리고 있다." 작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니 눈물겹다...  

2. 역사  

역사분야의 추천자도 바뀌었다. 김기덕 교수(건국대 문화컨텐츠학과)의 추천작은 정수일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창비, 2010). 추천의 변은 이렇다.  

초원 실크로드는 일찍이 찬란한 초원 문명을 잉태하고 전파시킨 소통의 길이며, 문명 교류의 최초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선구의 길이었다. 더욱이 우리에게 이 길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추적해 볼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이다. 민족의 이동, 찬란한 청동기문화, 금관으로 대표되는 황금문화 등이 전부 이 길을 통해 한반도로 전파되었다.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 정수일은 연구도 되지 않고 가기도 힘든 이 길을 2년여에 걸쳐 꾸역꾸역 답사하며, 단순한 답사기가 아닌 문명사적 시각에서 초원 실크로드의 흔적과 역사적 교훈, 현재의 과제까지를 잘 제시해 주고 있다. 정말이지 글로벌시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저자에 대한 설명은 군더더기일 테고, 관심있는 독자라면 문명교류학 교과서격인 <문명담론과 문명교류>(살림, 2009), 실크로드 개관이라 할 <실크로드 문명기행>(한겨레출판, 2006) 등도 챙겨놓아야겠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최훈의 <변호사 논증법>(웅진지식하우스, 2010). 부제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4가지 실전논리'. '네 가지 논증법'에 대한 추천자의 정리는 이렇다.

최훈 교수는 ‘변호사 논증법’이란 다소 생소한 용어를 동원해서 우리에게 논리의 중요성을 주창한다. 변호사는 네 가지 논증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고객을 옹호한다. 첫째, 자비로운 해석과 역지사지의 원칙이다.(...)  둘째, 근거제시와 근거확인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셋째, 입증의 책임과 권리의 원칙이 있다.(...) 넷째, 논점일탈 금지의 원칙에 따르면, 동서문답처럼 상대방의 예리한 질문을 비켜나가는 방법은 부당하다. 최훈 교수는 대화의 이종격투기 현장에서 합리적으로 승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조련사이다.

'변호사 논증법'이 법정 바깥의 일상생활에도 어떻게 효용이 닿는지는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저자의 다른 책을 보건대, 논리학 교양의 대중화를 위해서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데, 지난 4월에도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뿌리와이파리, 2010)가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된 바 있는데, 같은 저자의 책이 이렇듯 자주 추천되는 것도 드문 일이지 싶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정치/사회 분야의 책은 앤서니 루이스의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간장, 2010)다. '민주시민의 필독서'로 추천하고 있는데,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언론인이자 법학자인 미국인 앤서니 루이스가 미국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적용되어 왔는가를 구체적 사례들을, 가령 선동법, 간첩죄, 사생활, 언론의 면책특권, 애국적 히스테리, 성적 표현,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들(나치 옹호와 이슬람 극단주의 등)을 검토하면서 알기 쉽게 집필한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옹호하는 자유 못잖게, 사회 이면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건 어떨까. <암행기자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프로네시스, 2010)가 그런 책인데, "자신만의 독특한 잠입취재 방식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독일의 대표적 언론인 귄터 발라프의 책. 2007년부터 2년여에 걸쳐 취재한 7건의 르포를 묶은 것으로 40년 암행기자 인생을 살아온 그의 최신작"이라고 소개된다. 덧붙여, 오늘 배송받은 책 가운데 하나로 브루스 액커만 등이 쓴 <분배의 재구성>(나눔의집, 2010)은 기본소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관심을 갖게 된 주제의 책이라 조만간 읽어보려고 한다.   

5. 경제/경영 

경제/경영 분야도 추천자가 바뀌었다. 박원암 교수(홍익대 경제학부)가 추천한 책은 니얼 퍼거슨의 <금융의 지배>(민음사, 2010). 한번쯤 추천될 거 같았던 책이다. 소개는 이렇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융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 때, 세계 금융의 역사를 한 눈에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과 니얼 퍼거슨 교수가 <돈의 부상: 세계의 금융 역사>란 제목으로 출간한 책을 민음사가 <금융의 지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하였다. 저자는 역사적 사건과 사료를 인용하며 세계 금융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학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금융의 역사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겠다.

절판된 책이지만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3세기 동안의 세계를 움직인 돈과 권력의 역사를 다룬 퍼거슨의 <현금의 지배>(김영사, 2002)도 나란히 읽어봄직하다. 금융 가문의 흥망을 다룬 <세계를 움직인 돈의 힘>(현암사, 2010)도 같은 분야의 책으로 눈길을 줄 만하다. 금융 왕조는 보통의 은행가 가문과 달리 권력과 공생하여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행사한 가문을 말한다. "스물한 개 금융 가문의 성공과 실패 이야기를 돈과 권력의 결탁에 초점을 맞추어 들려준다"고.    

6.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경영기획실장이 추천한 책은 <이덕환의 사이언스 토크토크>(프로네시스, 2010). 과학책 번역가로도 유명한 이덕환 교수가 지난 6년간 디지털 타임스지에 연재한 과학칼럼을 모은 책이라 한다.  

저자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이웃과 소통하고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과학적 인성을 길러 주는 것이 과학교육의 목표이며 이러한 과학적 인성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소재가 바로 뉴스라고 말한다. (...) 다양한 뉴스 속에 등장하는 과학적 개념과 오류를 집어낸다.

개인적으론 수전 블랙모어의 <밈>(바다출판사, 2010)이 이달에 읽을 과학책이다. 원제는 '유전자 기계'를 염두에 둔 '밈 기계'이고, 10년쯤 전에 나온 책이다. '문화 복제자'를 뜻하는 '밈'은 리처드 도킨스의 신조어이며 출처에 대해선 <이기적 유전자>를 참조할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서문이 붙어 있는 책의 원서를 나는 아주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기억이 있다(물론 구경만 하고 반납했지만). 그사이에 밈에 관한 새로운 책이 더 나오진 않았는지 이 책이 소개됐다. 개정판이 나올 만하지 않나 싶다.   

7. 예술 

예술분야의 추천자도 바뀌었다. 이주은 교수(성신여대 교육대학원)가 추천한 책은 김순배의 <클래식을 좋아하세요?>(갤리온, 2010). 클래식 음악 안내서는 드물지 않은데, 공감할 수 없는 음악도 사랑할 수는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눈길을 끈다.  

상대방을 샅샅이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듯이, 음악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공감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굳이 억지스럽게 교감을 끌어내고자 애쓰지 않아도 음악은 얼마든지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주변의 삶과 연관시켜 선별한, 음악 감상을 위한 무겁지 않은 안내서로서 지나치게 지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센티멘탈한 감성에 치우치지도 않은 읽어봄직한 책이다.

음 클래식도 좋지만, 내가 요즘 즐겨듣는 노래는 이문세다. 7080세대가 아니랄까봐 요샌 '40대를 위한 노래 40곡' 이런 컨셉에 눈길이 간다. 가장 자주 듣는 건 '가로수 그날 아래 서면'과 '그녀의 웃음소리뿐'.

 

8. 교양 

교양 분야의 추천자도 철학자 탁석산으로 바뀌었다. 추천도서는 오세정, 조현우의 <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이숲, 2010). 일단 재밌단다. 

이 책은 재미있다. 골치 아픈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고 우리의 고전과 지금의 대중문화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의 지평을 넓혀준다. 예를 들어보자. 선과 악의 문제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이런 문제는 철학적 문제이거나 종교적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은 악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과거의 영웅소설의 독자들이나 현재의 우리가 왜 영웅이 악의 화신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이야기를 만들고 즐기는가를 묻고 있다.

요즘 '한국고전문학전집'(문학동네)도 나오고 있는 판이니 우리 고전을 읽기 위한 여건도 상당히 좋아졌다. 개인적으론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구운몽>을 다시 읽고픈 생각도 있다.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도 곁들여서. 꿈인가.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책은 서명숙의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북하우스, 2010)이다. '제주올레길'이란 말을 나는 작년엔가 처음 들었는데, 저자는 바로 그 '제주올레 이사장'이다.  

놀멍 쉬멍(놀며 쉬며) 걷는 길, 꼬닥꼬닥(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길 '제주올레길'. 대한민국에 '올레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걷는 길 내는 여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전하는 제주올레를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 제주올레를 사랑한 올레꾼들 이야기, 날마다 올레스럽게 진화 중인 제주올레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다.

제주올레길과 많이 견주어지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해서도 많은 책이 나와 있는데, 최신작은 작가 세스 노터봄의 <산티아고 가는 길>(민음사, 2010)이다. 여행문학의 '걸작'이라는 게 어떤 것인가 엿봐도 좋겠다. 이런 책들은 사실, 직접 그 길을 걸으며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독서법일 텐데...  

10. 책을 읽을 자유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책을 읽을 자유'다. 자신의 책을 추천하는 건 팔불출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실상 대부분 발표한 서평들을 모은 책이니 지나치게 겸손을 부리는 것도 오만이다. 게다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은 어떤 안내 표지판이자 이정표일 뿐이다. 간혹 가이드 몫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책을 통과하여 계속 꼬닥꼬닥 걸어가시길 바란다. '고전을 설명하는 고전'으로 소개되는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연암서가, 2010)도 그렇다. 우리의 독서 여정은 평생의 여정이다. 거기에 덧붙여, 폴란드의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위대한 질문>(열린책들, 2010)도 가방에 끼워넣고 싶다. 부제는 '의문문으로 읽은 서양철학사'. 그 질문은 '우리는 왜 악행을 저지르는가?'에서 '어째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를 거쳐 '물질은 악한가?'까지 두루 걸쳐 있다. 철학사는 곧 철학적 질문의 역사라는 걸 깨닫게 된다. 

10. 10. 02.  

P.S. 10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을유문화사, 2009)이다. 후기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다 보니 자주 쇼펜하우어와 마주치게 되는데, 좀 부담스런 독자라면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시아, 2009)로 대신해도 좋겠다. 일종의 '다이제스트 쇼펜하우어'다. 그리고 '우리시대의 쇼펜하우어'라고 부름직한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도 쇼펜하우어 이상으로 우리의 기운을 빼놓는다. 때론 인간과 삶에 대한 낙담과 절망이 거품 같은 희망보다 우리에게 요긴하다. 날씨가 쌀쌀해진다고 하니 낙엽이 질 날도 곧 닥쳐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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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딘 2010-10-0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덕분에 좋은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지면 당연히 그 날은 책에 대한 과소비가 있는 동시에 그 여파로 지갑이 다이어트 해야 하는 날이다. 로쟈는 나로 하여금 책에 대한 소비를 중독시킨 것과 아울러 내 기억속의 사어인 러시아어를 일깨우게 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그런데 나와 같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닐진대 로쟈는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으려나? 출장을 앞 둔 토요일 저녁 시답지 않은 글로 로쟈에 대한 부러움을 토해 내본다.


로쟈 2010-10-03 08:43   좋아요 0 | URL
법적 '책임'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2010-10-03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3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10-0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그림이나 열매보다 풍성하고 알차고 차분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0-10-03 08: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