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에 일어나서 계속 머리를 굴리고 또 끼적이고 있지만, 밀린 원고들의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는다. 머리가 무거워 잠시 서가에서 옛날 시집을 꺼내 뒤적이다가 내가 쓴 걸 내가 재밌다고 또 읽어보았다. 전에 한번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꽃들이 비에 젖는다'란 시다. 새벽처럼 오늘 낮에도 비가 왔더라면 어울릴 뻔했다. 이번엔 시에 붙여놓았던 말들도 같이 옮겨놓는다(1996년에 쓴 것이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막연히 기다린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그친다 꽃들은 언제나 다그친다 비는 푼돈을 벌러 다시 빗속으로 나간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이건 일종의 '불행한 의식'이다. 비는 본의 아니게 모든 것을 젖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그렇게 젖은 꽃을 팔러다니는 모습이 눈물겹다. 너무 과장인가?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여자를 다루는 B의 솜씨가 형편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도 싶다. 

어느 책에서 본 것인데, 여자를 '세뇌'하려면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한다(남자를 세뇌하는 요령은 책에 나와 있지 않았다. 남자들은 멍청해서 별다른 작전이 필요 없는 것일까).  

1. 작은 선물을 계속 보내라.
2. 연애 드라마의 시간대를 이용하라.
3. 서투르게 행동해서 경계심을 풀어라. 
4. 두 사람만의 비밀을 만들어라. 
5. 꿈을 이야기하라.
6. 콧대 높은 여자에게는 철저하게 야단을 쳐라.
7. 질투심을 이용하라 등등.
 

이게 연애 세뇌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런, 너무 상식적인가? 그래도 새겨두어야 한다. 나중에 고작 이런 일로 후회하면 곤란하니까.(이런 건 대학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학교육의 이념을 정초한 사람들은 내 생각에 대단한 연애 혐오론자들이었다.) 저자가 덧붙이는 바에 의하면, 이별의 세뇌는 연애 세뇌의 반대라고. 

말이 나온 김에 '고작 이런 일'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겠다. 내가 하는 말은 곧이 듣지 않을 테니까, 믿을 만한 여류 작가의 입을 빌려서.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차피 그 여자를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이고, 여자가 남자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역시 그 남자 품에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일 것이다. 머릿속에 든 것이나 용모도 이런 종류의 건전한 욕망을 보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건전하고 자연스럽고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이다."(시오노 나나미, <남자들에게>)  

아주 간명해서 좋다. 어련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다시 생물학인 것이다!  

10.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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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2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도 좋지만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는 시구도 좋군요.
'언제나'라는 부사가 시에 모두 일곱 번 나오는데 단호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잘 살려주네요. 낭송해보면 일곱 번의 '언제나'를 모두 다른 톤으로 발성하게 됩니다.
제목이 <언제나>였어도 좋았을 뻔했어요. 좋은 시를 감상했네요^^

로쟈 2010-09-27 18:41   좋아요 0 | URL
'언제나' 꼼꼼히 읽으시네요.^^

반딧불이 2010-09-2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말씀 나누는 것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이런 대화를 나누셔서 저 좀 웃게 해주세요.

로쟈 2010-09-28 11:20   좋아요 0 | URL
웃음이 헤프신 게 아닐까요?^^

책읽는아저씨 2010-09-2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에게 로자님의 시를 읽어주니 재미 있다고 웃네요. ^^

로쟈 2010-09-29 08:11   좋아요 0 | URL
목적은 달성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