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교양서와 학술서 가릴 것 없이 '이거다!'까지는 아니어도 눈길이 가는 책이 많은데, 일본의 두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의 대담을 담은 <지의 정원>(예문, 2010)도 그 중 하나다. 지식과 교양론 수준에서만큼은 일본이 우리보다 한발 앞선다고 생각하는 쪽이어서(출판의 규모도 규모이지만) 이런 종류의 책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책도 출간 즉시 구입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사토 마사루가 '러시아통'이라는 점도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호감을 갖는 이유다. 서평을 써야 할 다른 책들에 독서순위는밀려 있지만, 소개기사 정도는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7. 17) 독서의 두 고수책을 통해주고 받다…이 세계가온 길과 갈 길
책읽기 고수 2명이 만났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독서광이자 저널리스트다. 그는 작업실이자 개인 도서관인 ‘고양이 빌딩’(건물 외벽에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어 붙은 이름)에 7만권이 넘는 장서를 갖고 있다. 요즘도 한 번에 3만~4만엔(약 40만~55만원), 한 달에 네 번쯤 책을 산다.
사토 마사루는 다치바나보다 20세가 적어 50세다. 한국에선 생소한 인물인데 다치바나가 자신의 ‘후예’로 인정했다. 사토가 소장한 책은 1만5000권 정도이며, 한 달에 20만엔(약 270만원)을 책 사는 데 쓴다. 사토가 다치바나보다 조금 더 많은 책을 사는 셈이니 언젠가 다치바나의 장서량을 따라잡을지도 모르겠다.
사토는 주러시아 일본대사관 근무 경력을 가진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북방 4개섬 반환 문제를 놓고 개방적인 입장을 지키다가 우익의 극렬한 반발에 부딪힌다. 사토와 친밀했던 중의원 스즈키 무네오가 부패 스캔들에 말려 구속되자, 사토도 검찰 수사를 받고 유죄를 선고받는다. 사토는 우익의 음모라고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후 ‘돈키호테식 좌충우돌 논평가’가 돼 일본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독설을 쏟기 시작했다.
두 애서가가 각자 200권의 책 목록을 들고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눈 내용이 <지의 정원>에 담겼다. 100권은 각자의 서재에서, 100권은 서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고와 신서에서 골랐다. 둘은 독서의 효용성부터 칸트 철학의 현대적 의미,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일본 좌익의 흥망성쇠 등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선택한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다치바나가 화제를 던지면 사토가 오랫동안 설명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사상과 정치적 광기’를 주제로 걸고서는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교리문답>, 히틀러의 <나의 투쟁>,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얘기한다. 다치바나는 “광기의 정치사상은 모두 유토피아 사상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사토는 “휴머니즘은 위험한 사상이다. 인간이란 본래 어디서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는 생물”이라고 화답한다.
직업 외교관이었던 사토의 감각이 빛나는 대목도 있다. 다치바나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대중 능력’이라는 대목을 언급하자, 사토는 “푸틴은 유도를 좋아해 정치가로서는 달라붙어 겨루는 타입이다. 결국 이쪽도 상대 논리에 따라 함께 달라붙어야 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둘의 독서 취향과 평가는 미묘한 지점에서 어긋난다. 예를 들어 다치바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현대에 읽는 것은 난센스라고 단언한다. 뉴턴 세계관에 근거한 칸트의 논리는 아인슈타인 이후의 세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사토는 정치적 세력균형론이나 유엔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기본적으로 칸트적 세계관에 바탕하기에, 칸트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방대한 지식은 모두 인터넷이 아니라 책에서 나왔다. 다치바나는 “인간은 독서를 하면서 진화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며 “인터넷에서 찾아낸 최첨단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본이 되는 책을 먼저 읽어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토는 “교양이란 지금 자신이 어떤 미지의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일본 좌익이나 근대 개화사상가들의 행적이 많아 한국 독자들에겐 낯선 대목이 있다. 다치바나와 사토가 뽑은 400권의 책 목록이 간략한 설명과 함께 게재됐는데, 한국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책이 많아 씁쓸하다.(백승찬 기자)
10. 07. 17.
P.S. 기사의 마지막 "다치바나와 사토가 뽑은 400권의 책 목록이 간략한 설명과 함께 게재됐는데, 한국에는 번역조차 되지 않은 책이 많아 씁쓸하다"는 멘트에는 나도 공감한다. 덧붙여, 대담 중 한 대목만 옮기자면, '엘리트 교육과 교양 교육'을 화제로 삼으면서 다치바나가 "요즘에는 고등학교의 상위권 학생들이 외국 대학에 진학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도쿄대나 교토대에 가지 않고 외국의 일류 대학에 바로 입학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경로를 개척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요.(...) 머지 않아 그쪽이 주류가 되리라고 봅니다. 그럼 일본 엘리트가 만을어지는 경로도 크게 변하겠지요."라고 운을 떼자 사토는 이렇게 답한다.
"MBA 코스를 밟거나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코스는 표준적인 엘리트를 만드는 데는 좋은 수단입니다. 그러나 톱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독일보다는 역시 영국이나 러시아로 가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126쪽)
그 이유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