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자 한겨레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 칼럼은 4주에 한 차례씩 실리며 첫회에 다룬 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냥 '번역서'에 대한 리뷰면 되는 코너인데, '번역'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본다고 애를 쓴 게 됐다. 참고로 '위버멘쉬'란 표기가 '위버멘슈'로 고쳐진 것은 편집부의 손을 거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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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10. 06. 05) 우리, 적어도 ‘말인’은 되지 말자!
국내에서 출간되는 인문사회과학서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이며, 학술교양서의 경우에는 번역서의 비중이 60%를 넘는다. 어지간한 독자에게 ‘번역서 읽기’는 독서의 일상이고 다반사다. 비일비재한 일에 대해 굳이 정색한다면 그건 우리의 독서를 좀 ‘의식화’해보자는 뜻이다. 최소한 절반의 독서는 ‘번역서 읽기’라는 점에 주의를 환기해보자는 것이다. 번역이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니 필연적으로 차이를 낳는다. 의미의 불가피한 변형과 왜곡이 빚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의미가 생산된다. 그래서 번역서 읽기는 변형된 의미를 보정하는 읽기이고, 새로운 의미를 음미하는 읽기이다.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사례로 읽어보자.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구절이다. 청하판 니체전집(최승자 옮김)에서 각각 “보라,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와 “그러므로 나 그들에게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에 대해 말하려니, 그것은 곧 최종 인간이다.”라고 옮겨진 대목이다. 여기서 ‘초인’과 ‘최종 인간’은 대립적인 개념으로 독일어의 ‘위버멘슈’(Ubermensch)와 ‘der letzte Mensch’를 옮긴 것이다. 영어로는 보통 ‘슈퍼맨/오버맨’(superman/overman)과 ‘라스트 맨’(last man)으로 옮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라고 말할 때 차라투스트라가 지향으로 삼는 것이 ‘초인’이다. 반면에 ‘최종 인간’은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냈다!”고 자위하고 현실에 안주함으로써 차라투스트라의 경멸을 사는 인간 유형이다.
이 두 단어를 책세상판 니체 전집(정동호 옮김)은 각각 ‘위버멘슈’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옮겼다. ‘위버멘슈’는 음역한 것이고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의역한 것에 가깝다. ‘초인’이란 관례적 번역어가 ‘슈퍼맨’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전공자들은 ‘위버멘슈’란 음역을 선호하는데, 사실 니체의 ‘위버멘슈’를 가장 오용한 사례가 나치 독일이었던 걸 고려하면 궁색한 선택이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구색을 맞춘다면 차라리 ‘넘어가는 인간’(김진석) 같은 ‘파격’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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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는 민음사판(장희창 옮김)에서는 ‘초인’과 ‘말종 인간’을 상대어로 골랐고, 펭귄클래식판(홍성광 옮김)에서는 ‘초인’과 ‘최후의 인간’으로 짝을 이루게 했다. 다른 번역본을 더 살펴보아도 ‘위버멘슈’의 번역은 대략 ‘초인’으로 합의가 돼 있지만, ‘der letzte Mensch’는 번역어가 딱히 정착돼 있지 않은 형편이다. 독자들에겐 다소 불만스러운 상황인데, 개인적으론 중국의 문예이론가 류짜이푸의 <얼굴 찌푸리게 하는 25가지 인간유형>(예문서원)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25가지 인간유형’의 하나가 바로 ‘초인’의 대응개념인 ‘말인'(末人)이었다. 그에 따르면 “일반인들보다 하급으로 퇴화하여 위축되고 창조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인’이란 번역어를 루쉰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루쉰의 ‘아Q’가 사실 그런 ‘말인’이었다. 중국에서도 ‘최후의 인간'(最後的人)으로 번역된 사례가 있는데, ‘초인’의 대응어가 되기에는 그 의미가 모호하다. 반면에 ‘말인’은 우리에게도 그 의미가 전달되기에 ‘초인’의 상대어로는 최적이다. 니체의 초인사상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초인과 말인’이란 짝으로 접근하면 조금은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초인 되는 거 어렵지만, 말인은 되지 말자!”
10. 06. 05.
P.S. 지면에서 다시 읽어보니 원고에서 한 문장이 빠졌다. 짐작엔 분량 때문이었을 듯싶은데, 빠진 문장은 '말인'에 대한 설명 이후에 '소인'과의 차이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그에 따르면 “일반인들보다 하급으로 퇴화하여 위축되고 창조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천박한 짓을 할 만한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소인’과도 구별된다.
'말인'에 대한 류짜이푸의 설명을 조금 더 보태자면(그는 초인이 '백조'라면 말인은 '까마귀'와 같다는 비유까지 든다), "'소인'은 생리적이거나 지적인 면에서 일반 사람과 동일하지만 품격이 떨어지고 인격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살아 숨쉬지 않는 게 아니라 그저 지저분할 뿐이다. 그러나 '말인'은 대부분 우매하면서 선량하다. 그들에게는 천박한 짓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말인'은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창조인지, 무엇이 희망이고 무엇이 별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들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반대쪽에 있으면서 작은 것에 만족하고 앎이 없는 사람들이다."
'말인'이란 번역어를 만든 루쉰은 니체와 달리 이들을 '멸시'하는 대신에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개탄했다. 사실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더라도 그러한 개탄에 이유가 없지 않다. 류짜이푸의 결론은 이렇다.
'말인'은 지혜가 없는 대신 어느 말에나 순종한다. 힘은 없는 대신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춘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대량의 '바보 언니'가 세세 대대로 뒤를 이을 것이며 미래 사회는 말인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미래에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들이 한사코 말인의 대량 출현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