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캉길렘에 관한 메모

국내에는 미셸 푸코의 스승으로 처음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철학자(혹은 의학철학자) 조르주 깡귀엠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아카넷, 2010)이 출간됐다. 타이틀은 책 제목이라기보다는 논문 제목에 더 어울릴 만한데('학술서'의 티를 팍팍낸다) 마침 교수신문에 책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는 역자의 글이 실렸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필자의 동의하에 옮긴이의 글을 재수록했다고 하니까 '프랑스 의학철학의 계보와 조르주 깡귀엠'이란 역자 해제를 따온 것인 듯하다. Canguilhem이란 저자명이 이번엔 '깡귀엠'이라고 표기됐지만, 주저인 <정상과 병리>(한길사, 1996) 혹은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 1996)이 나란히 출간됐을 때는 '캉길렘'과 '깡길렘'으로 각각 표기됐었다(역자 자신이 '깡길렘'이라고 옮겼다가 이번엔 '깡귀엠'으로 바꿨다). 같은 저자의 책 세 권이 모두 저자명을 다르게 표기하고 있으니(당연히 검색은 다 따로따로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는지(각자의 표기 '원칙'을 고집하는 것이 이런 소모적인 혼동을 무릅쓸 만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거물급 학자의 책이 소개되었기에 최소한의 관심을 표해둔다(푸코와 깡귀엠, 혹은 캉길렘에 대해서는 먼댓글을 참조).     

 

교수신문(10. 05. 06) 프랑스 의학철학의 전통 속에서 생명체의 내적 규범 성찰  

이 책은 깡귀엠(Georges Canguilhem, 1904~1995)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 그가 이전에 발표한 비슷한 주제의 글들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 발간한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한 권의 책을 염두에 두고 저술한 것은 의학박사 학위논문인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과 철학박사 학위논문인 「17·18세기 반사개념의 형성」의 두 권이다. 여기에 번역한 이 책은 시기적으로 보자면 깡귀엠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이다(최근 의학에 관한 그의 글들을 묶어 Ecrits sur la Me´decine로 출판한 바 있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과학사와 인식론의 역할을 다룬 서론과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1장이 이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고, 뒤에 실린 글들은 앞에 실린 이론적 글들에 대한 예증의 성격이 강한 글들이다. 여기서는 그가 다룬 이론적 문제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깡귀엠이 과학사에서 가장 경계하고 비판하는 것은 용어의 연속성을 개념의 연속성으로 혼동하지 말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선구자의 신화를 비판한다. 즉 이는 개념적 차원의 단절을 인식하지 못하고 용어의 동일성이나 외관상의 유사성만으로 연속의 과학사를 쓰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다음으로 그가 제기하는 것은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과학과 이데올로기라는, 외견상 대립되는 두 개념을 하나로 연결시킨 이 말은 깡귀엠 자신이 인정하듯 멀게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으로부터 가깝게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론은 어찌 보면 과학의 담론을 손쉽게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려는 “부유한 사회의 약화되거나 빈곤한 마르크스주의”인 사회구성주의로부터 과학적 담론을 지키기 위한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깡귀엠이 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엄밀히 분리시켜 ‘순수한’ 과학을 확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또 과학을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그는 과학사가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작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학의 담론 안에 이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그는 과학적 이데올로기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상대 개념으로 깡귀엠이 제시하는 것은 합리성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아울러 합리성의 형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생명과학에서의 합리성은 달리 말하면 그가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생명체의 내적인 규범으로 볼 수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과학에서의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생명체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외적 규범이고, 그 합리성은 생명체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내적인 규범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문제의식은 그의 마지막 저서에까지 지속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와 과학적 담론
그런데 생명과학의 합리성과 의학적 합리성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의학은 생명과학에 포함될 수 있지만 의학은 궁극적으로 개체가 앓는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생명과학의 다른 분야들과는 구별된다. ‘치료’란 의학의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료의 근거를 어디에서,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치료의 근거를 이론에서 찾는 경우도 있지만 의학에서 사용되는 치료법들 중에는 어떠한 이론의 매개도 없이 “써보니까 듣더라”는 경험에 근거한 경우도 많다. 이처럼 치료가 개인적 경험과 그에 따른 신념에 근거한 경우 그 치료가 합리성에 근거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치료에서의 합리성이란 치료의 근거가 설득력 있는 합리적 이론에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치료의 전략이 유기체에 대한 보편적 지식, 즉 해부학이나 생리학에 근거해 짜인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연결 관계를 깡귀엠은 의학적 합리성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학적 합리성은 근대 서양 의학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르네상스 이후 새롭게 발달한 해부학 지식을 임상적 지식과 결합시킨 파리 임상의학파, 병리학을 생리학에서 연역하려 한 클로드 베르나르의 기획, 그리고 병원성 세균의 발견과 이를 죽이는 항생제 개발로 완결되는 병인설과 치료의 패러다임은 근대 이후 서양에서 확립된 의학적 합리성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의학의 합리성은 그 내부에 한계도 함께 들어 있다. 생리학에서 병리학을 연역하려 한 베르나르의 기획은 ‘객관적 병리학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객관적 병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깡귀엠 자신의 언명에 의해 부정당한다. 그리고 세균에 대한 화학요법의 발전은 그러한 발전이 화학요법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저항균주의 출현을 유발함으로써 스스로 한계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한계에 직면한 근대의 의학적 합리성은 그 돌파구를 어떻게 찾고 있는가.

깡귀엠은 최근 의학의 발달 양상에서 새로운 의학적 합리성이 형성되는 전조를 본다. 그는 의학적 합리성의 장애물로 보아온 생물학적 개체성을 원인론과 대립시키지 않고 새로운 의학적 합리성에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분자생물학과 면역학의 발전에서 본다. 아쉽게도 이러한 학문의 발전과 그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깡귀엠의 생애 말년에 이루어졌으므로 그는 이 주제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末年에도 분자생물학·면역학에 주목
깡귀엠의 책을 처음으로 번역한 지 14년이 지나 그의 또 다른 책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의 번역본을 세상에 내보내게 됐다. 사실 이 책의 번역 작업은 깡귀엠의 대표작인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 출판되고 난 이후 이내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간 이런저런 개인적인 사정이 겹쳐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 시간상으로만 본다면 번역에 거의 10년쯤 걸린 것 같다.  



사실 깡귀엠의 이 책을 두 번째 번역 대상으로 택한 이유는 이 책이 출판된 그의 책 중 가장 얇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대표작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번역하며 만만찮은 그의 문체로 상당히 고생한 기억이 있어 다소 분량이 있는 그의 다른 책들은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내용이나 문장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문장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고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아야 의미가 파악되는 문장이 많았다. 간신히 의미가 파악되더라도 표현 방식이 한국어와 워낙 달라 가능한 덜 어색하면서도 이해 가능한 우리말로 옮기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간 적지 않은 학술서들을 번역했지만 역시 깡귀엠 글의 번역이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다시 그 고통의 기억이 희미해져가면 해산의 고통을 망각하고 또 덜컥 임신한 여자처럼 깡귀엠의 또 다른 책을 들고 만지작거리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여인석 연세대 의과대학·의사학과) 

10. 05. 12.  

P.S. 찾아보니 캉길렘의 책은 두어 권 더 영역돼 있다. 인식론이나 과학철학 쪽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챙겨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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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5-12 21:44   좋아요 0 | URL
어 저 본과 1학년 때 의학사 가르치신 강사 분이네요.ㅋㅋㅋ 수업은 재미없었지만.ㅋㅋㅋ 다른 과목이 바닥을 길 때 유일하게 A 학점 받아서 간신히 유급을 모면하게 만들어준 과목...ㅋㅋㅋㅋ

로쟈 2010-05-12 23:16   좋아요 0 | URL
의학사에 소질이 있으신 건 아닐까요?^^

헛헛헛헛 2010-05-12 23:19   좋아요 0 | URL
ㅎㅎ 의학사, 의철학 분야에서 '깡귀엠'을 간과하고 지나갈 수 없죠.

참, 이름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번역할 때는 깡길렘으로 번역을 했지만

이후, 그가 살았던 동네 사람들이 그를 '깡귀엠'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깡귀엠'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

로쟈 2010-05-12 23: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게 왜 '깡기엠'이 아니라 '깡귀엠'이 되는 건지는 좀 의문인데요...

헛헛헛헛 2010-05-13 15:21   좋아요 0 | URL
아~ 그러네요.. 기회가 있을 때 한번 여쭤봐야겠습니다.
(불어 잘하시는 분들, 코멘트 좀 부탁...)

그나저나,

기사 내용 중에 오타가 있네요.
베르나르의 기획을 부정하는 깡귀엠의 언명을 언급하는 부분..

'객관적 병리학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객관적 병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 '객관적 생리학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객관적 병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렇게 바꿔야 맞는 말~ '-'

로쟈 2010-05-14 00:08   좋아요 0 | URL
교수신문은 보통 원고를 안 건드리는데, 아마 원고의 오타 같습니다. 책에선 교정이 됐나 모르겠네요...

헛헛헛헛 2010-05-16 16:03   좋아요 0 | URL
지나가던 '길손' 님께서 남겨주신 댓글을 옮겨옵니다. '-'
로자님 서재에 외부인이 글을 남길 수 없어서 제게 글을 옮겨달라고 부탁을 하셔서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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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사람들이 철자에 상관없이 그렇게 '깡귀엠'으로 불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름의 철자가 'Canguilhem'이니 '깡길(귈)렘'으로 발음하는 게 맞다고 보여집니다. 이름의 발음기호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서 옆집 프랑스 사람에게 여쭤보니 '깡길(귈)렘'이라고 분명히 'L'을 발음 하는군요. 만약에 철자가 'canguillem'이라면 '깡귀옘'으로 발음이 되겠는데(마치 'gentille(착한)'의 발음이 '장틸러'가 아니라 '쟝띠여'인 것처럼), 혹시 촌사람들이 철자 중의 묵음 'H'를 'L'로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군요.

그리고 위의 로쟈의 의견에 대해서: '~guil~'에 숨은 'U'는 발음을 '질(gil)'이 아닌 '길(guil)'로 하기 위한 도구적 기호에 불과하므로, 로쟈의 지적처럼 '귈'이 아니라 '길(깡길렘)'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맞겠지만, 눈에 보이는 'U'에 속아서(?) '귈(깡귈렘)'로 흔히 발음하는 듯 합니다 .

로쟈 2010-05-16 16:2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궁금증이 해소됐습니다. 고유명사는 발음 규칙의 예외도 간혹 있는 듯해서요. 저는 하던 대로 '캉길렘'이라고 표기해야겠습니다...

헛헛헛헛 2010-05-17 14:55   좋아요 0 | URL
최근에 한국의철학회 학술대회 때 마침 이와 관련된 문제가 언급되어서, 간략히 그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한희진 선생님의 토론 내용을 허락없이 정리한 것입니다. ㅎ

(자꾸 댓글이 길어지네요. 요게 마지막 댓글입니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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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깡귀엠(Georges Canguilhem)의 이름은 여전히 통일된 한글 표기법이 없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표기법과 이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가능한 표기법은 아래와 같다.

1. 캉귈렘(깡귈렘), 캉길렘(깡길렘)
2. 캉귀엠(깡귀엠), 캉기엠(깡기엠)

1은 파리를 기준으로 한 프랑스어 표준어 발음이고,
2는 그의 출생지인 프랑스 남중부의 소도시 카르셑노다리Castelnaudary의 현지 발음이다.

한글의 외래어 표기의 기본 원칙을 따르자면, 된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깡' 보다는 '캉'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결국, 프랑스어와 한글의 원칙을 모두 준수하면,

캉귈렘 또는 캉길렘으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참고로, 여인석 선생님의 답변 : 아직 이름 표기에 대한 정리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추후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