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에서 '범죄'로

문학 분야의 신간들은 자주 둘러보지 않아서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가 작년말에 출간된 걸 뒤늦게 알았다. 알다시피 마조히즘(매저키즘)이란 말의 빌미가 된 작품인데, 이전에 나온 <모피를 입은 비너스>(열림원, 2006)는 이미 품절 상태다. 사드와 자허마조흐의 책들은 다 어디에 두었는지 행방이 묘연하지만, 이 참에 찾아서 읽어볼까란 '몽상'도 하게 된다. 관련기사를 찾아보다가 <사랑의 범죄>(열림원, 2006)과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나란히 나왔을 때 이를 다룬 최재봉 기자의 기사 또한 뒤늦게 읽었다. 타이틀이 그럴 듯하다. 때릴 것인가, 맞을 것인가? 

  

한겨레(06. 12. 29) 때릴 것인가 맞을 것인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합쳐서 사도마조히즘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학적 음란증’으로 해석되는 사디즘과 ‘피학적 음란증’으로 풀이되는 마조히즘이 각각 두 사람의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디즘은 흔히 ‘마르키 드 사드’로 불리는 프랑스 작가 도나티앵 알폰스 프랑수아 드 사드(1740~1814)에게, 그리고 마조히즘은 사드보다 한 세기 가까이 늦게 태어난 독일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1836~1895)에게 각각 연원을 두고 있다.

상대방에게 (육체적)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는 사디즘, 그리고 상대방에게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은 정신분석학의 비조 프로이트에 의해 주목받은 이래 정신병리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회현상 일반을 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인문학에서 인간 심층심리의 비밀을 파헤친 선구자들로 평가받는 사드와 자허마조흐는 그러나 자신들의 당대에는 미치광이와 범죄자로 취급당해 수십년 동안 옥살이를 하지 않으면(사드), 다만 미미한 작가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사드의 실명으로 펴낸 2권 중 한권
그 두 불운한 선구자 사드와 자허마조흐의 대표작 두 권이 최근 나란히 번역돼 나왔다. 출판사 열림원이 세계문학의 숨은 걸작들을 발굴해서 소개한다는 취지로 내고 있는 ‘이삭줍기 시리즈’의 19, 20번째 권으로 나온 <사랑의 범죄>(사드)와 <모피를 입은 비너스>(자허마조흐)가 그것들이다.

<사랑의 범죄>를 사드의 대표작으로 꼽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다. 사드의 대표작이라면 자주 영화로 만들어지곤 하는 <소돔 120일>과 <규방 철학>,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 같은 작품을 우선 꼽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에서 사드는 파격적인 상상력과 잔혹한 묘사로 뒤틀린 욕망의 해방을 끝 간 데까지 밀어붙였으며 그런 ‘사랑의 철학’을 현실에서 실천한 것이 그의 수십 년 옥살이의 까닭이 되었다. 문제는 사드가 이 작품들을 대부분 익명으로 발표했다는 데에 있다. 사드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발표한 작품은 서한체 소설 <알린과 발쿠르>(1795)와 이 소설집 <사랑의 범죄>(1800)가 유일하다. 제 이름을 내걸고 공개 출판한 만큼 묘사의 수위와 문제의식은 다른 익명의 소설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라는 부제 아래 11편의 단편을 묶어 펴낸 <사랑의 범죄>에서도 사드 특유의 ‘어두운 욕망’은 충분히 만날 수 있다. 한국어판에 수록된 세 단편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팍스랑주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의 경우, 아메리카에서 온 부유한 신사로 위장한 프랑로는 실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도적떼의 우두머리일 뿐이며, 속아서 그와 결혼한 팍스랑주 양은 절망과 후회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포로들의 처형을 지시하는 등 남편을 대신해 악덕에 몸을 담근다. <플로르빌과 쿠르발, 혹은 운명론>에서 주인공 플로르빌은 뒤늦게 자신의 오빠로 확인된 과거의 연인 센느발을 향해 “그대 아들의 살인범이자 그대 아버지의 부인이며 또 그대의 어머니를 교수대로 보낸 추악한 여자가 바로 나예요”(194쪽)라고 절규한다. 선의와 미덕으로 생에 임하고자 했던 여주인공이 자신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고 끔찍한 운명을 떠안게 되는 과정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극한까지 몰고 간 듯한 느낌을 준다. <외제니 드 프랑발, 비극적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프랑발은 자신의 딸을 사랑하게 된 ‘패륜’을 당당하게 변호한다: “미의 제국과 사랑의 신성한 권리는 인간의 하찮은 규범 따윈 염두에 두지 않아. 한낮의 태양빛이 밤 동안 지구를 덮고 있던 안개를 말끔히 걷어내듯이, 미와 사랑이 지평선 위에 떠오를 때 규범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지.”(236쪽)

육체적 학대와 배신 통한 치유
그렇지만 사드의 ‘공식적인’ 소설들에서 악덕의 주인공들은 결국 ‘죗값’을 치르고 파멸해 간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드가 소설집 <사랑의 범죄>에 서문으로 실은 ‘소설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을 참조할 만하다. 이 글에서 사드는 자신이 죄악을 과도할 만큼 끔찍하게 그린 까닭은 독자들로 하여금 “죄악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46쪽)이라고 밝혔다. 



사드의 ‘공식’ 소설집이 그의 사상의 핵심과 일정한 거리를 보이는 데 반해 자허마조흐의 장편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명실공히 그의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생활에서도 쫓겨다니다가 사지가 묶이고 굴욕스러운 처벌을 받거나 모피를 입은 당당한 여자에게 채찍질과 같은 육체적 고통을 당하기를 즐겼다는 자허마조흐의 경험과 취향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액자 구조로 되어 있다. 화자가 주인공 제베린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다. 자신의 집 위층에 사는 반다라는 아름다운 과부에게 매혹된 제베린이 반다와 노예계약을 맺고 육체적 학대를 당하고 질투의 심연을 맛보는가 하면 치욕스러운 배신을 거치면서 비로소 증상을 ‘치료’하게 된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 제베린이 반다의 사랑(=그러니까 학대)을 갈구하며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는 전형적인 마조히즘에 해당한다. 모피는 그에게 피학성욕의 상징과 같다. 



“저는 고통 속에서 이상한 매력을 느낄 뿐만 아니라 폭력, 무자비 외에는 그 무엇도 제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특히 아름다운 여인의 배신이 그러합니다. 이런 여자, 추함의 미학으로부터 나온 이런 특이한 이상형, 몸은 프린이지만 영혼은 네로인 여자를 저는 모피 없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74쪽)

“사랑에는 평등 관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를 선택한다면, 아름다운 여자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군요”(46)라는 그의 말은 사도마조히즘이라는 ‘비정상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 자체를 꿰뚫는 핵심을 담지하고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범죄’란 ‘사랑이라는 범죄’의 다른 말이 아닐까.(최재봉 문학전문기자)  

10. 02. 05. 

P.S. 예전에 마조히즘 읽기에 관해서 적을 때 언급한 바 있지만,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2007)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번역돼 있다. 이 작품의 우리말 번역이 최소 3종은 되는 셈. 닉 맨스필드의 <마조히즘: 권력의 예술>(동문선, 2008)도 같이 읽어볼 만하다. 그렇게 계획만 세워두고 실행하지 못한 지도 몇 년째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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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2-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소설도 생각나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로쟈 2010-02-06 17:43   좋아요 0 | URL
<빛의 제국>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2-06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예전 기억으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떠올라서요.^^;

로쟈 2010-02-08 13:42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도 봤는데, 마조히즘 장면이 얼른 떠오르진 않는군요.^^;

펠릭스 2010-02-07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권력에 예속되어 자신의 둥지를 만들려는 인간의 자존력이 곧 생존 본능같습니다(06:31). 오후에 우연히 <모피를 이은 비너스>의 표지 그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오스트리아생)'의 '키스'를 보게되어 반가웠어요. '자허마조흐' 책의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클림트'의 그림은 출판기획자의 의도인지 작가가 좋아한 그림인지 궁금합니다.

로쟈 2010-02-08 13:42   좋아요 0 | URL
영화 <클림트>도 볼 만합니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이기도 하네요...

딸기 2010-02-0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96년에 나온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읽었어요. 재미있었는데...
근데 저는 그 책보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훨씬 더 재밌었어요 ^^

로쟈 2010-02-08 13:39   좋아요 0 | URL
그거야 그럴 거 같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