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

오랜만에 학교에 와보니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Space)>(506호)이 책상에 놓여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갤리온, 2009)에 대한 서평을 실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술평론가 반이정씨가 꼽은 '올해의 미술책' 두 권이 진중권의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와 바로 이 책 <이것이 현대적 미술>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권에 대한 서평을 같은 지면에 썼다. 나름대로 책을 고르는 안목은 있었던 셈이다(서평대상은 편집자와 같이 고른다). 비록 두 권 다 너무 많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이어서 개인적으론 좀 멀미를 느꼈지만... 

  

공간(10년 1월호) 이것이 현대적 미술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갤리온, 2006)를 통해서 “바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종류의 현대미술이 펼쳐지고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는 미술평론가 임근준 씨가 세계미술의 동향으로 시야를 넓혔다. <이것이 현대적 미술>은 동시대 작가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가를 소개하는 그의 두 번째 보고서다.   

왜 ‘현대미술’이 아니라 ‘현대적 미술’인가? ‘현대미술’이란 말이 좀 모호하므로 개념을 잠시 정리해보자. 미술계에서 ‘모던아트(modern art)’의 번역어로 쓰이는 ‘현대미술’은 폴 세잔 이후의 미술을 통칭하지만 보통은 20세기 전반의 미술만을 지칭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의 미술은 ‘전후미술(post-war art)’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1980년대 이후의 미술을 가리키는 이름이 ‘당대미술(contemporary art)’ 혹은 ‘포스트-모던 미술’이다. ‘전후 미국 현대미술의 영웅’ 로버트 라우센버그에 대한 조명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책이 다루는 ‘현대적 미술’은 ‘전후 미술’과 ‘당대 미술’을 포함하는 ‘오늘의 미술’이다.  

‘오늘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오늘의 미술’이 지닌 여러 문제의 기원을 저자는 전후미술의 새로운 상황을 지탱한 두 가지 축, 곧 교육제도와 전시제도에서 찾는다. 일단 미술이 대학제도와 결합됐다. 거기에 현대미술 혹은 전후 미술만을 수집하는 미술관과 갤러리가 늘어나면서 전시 기회가 확대되고 많은 작품이 유통됐다. 그리고 비엔날레/트리엔날레 등의 전시가 유행처럼 늘어나면서 작가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커졌다. 그 결과 현대미술에는 현대문학이나 현대음악, 혹은 현대무용 등의 분야와 비교하여 ‘황당할 정도로’ 주요 작가가 많다. 이 책에서도 60여 명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가 처음에 작성한 목록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양적 팽창은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부작용을 낳기 시작한다. 미술학교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예비 작가의 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으며, 갤러리 수도 지나치게 많아지고 국제 비엔날레는 난립하고 있는 중이다. 2000년대 들어서 미술시장이 과열 양상으로 치닫자 많은 작가들이 ‘유행 논리’와 ‘시장 논리’에 휩쓸리게 되고 점차 예술적 혁신성을 잃어가게 됐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두 미술가의 반응이 이러한 상황을 잘 짚어준다. 먼저 전직 록 가수이기도 한 마이크 켈리의 말. “이제, 학생이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개인전을 열지 못하면, 자신을 낙오자라고 여긴다. 그들은 작가 생활로 먹고살 수 있기를 전적으로 기대한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 되고 싶어서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젊었을 땐, 미술가 노릇이란 사회에서 정말 자신을 배척시키고 싶을 때나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대 회화의 태두로 불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탄식. “미술시장은 개들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중국 등의 신흥 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좀 느끼려면, 최소한 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그런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저자는 “현대예술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전후미술의 금자탑을 세운 작가, 아니면 당대미술의 승자로 미술사적 위상을 확립한 작가, 아니면 바로 지금 현대미술의 전선에서 각축을 벌이며 문제적 지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작 작가”들의 사례를 통해서 답하고자 한다. 그 ‘너무 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는 1976년생으로 2002년 말에 <관찰을 통한 프랭크>란 첫 개인적으로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여성화가 데이나 슈츠이다.  



‘관찰을 통한 프랭크’ 연작은 “지구에 프랭크라는 백인 남자 한 명만 남았을 경우”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회화 실험으로 폐허가 된 암울한 상황하에서 원시적 삶을 연명해가는 마지막 생존자의 모습을 그림에 담고 있다. 이 ‘엉뚱한’ 연작을 통해서 작가가 던지는 ‘진지한’ 물음들은 이렇다고. “프랭크가 유일한 관객이라면, 내 그림은 여전히 예술일까?”, “내 그림을 통해서만 자아를 반추할 수 있는 프랭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 문화란 무엇일까?”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오늘의 미술’은 “세계를 보는 방법에 관한 성찰을 담은 예술”이다. 거기서 ‘세계’란 일차적으론 미술이 처한 현재의 상황, 혹은 미술세계의 현실이 아닐까란 생각이 책을 덮으면서 들었다. 한 미술 월간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09년에도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었다. 2005년 첫 조사 이후 5년 연속 1위다. 2, 3위는 각각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과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 더 이상 특정 작가나 그룹이 아니라 미술관 운영자들이 움직여가는 미술, 그것이 ‘현대적 미술’의 상황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미술은 무엇이고, 또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크레이지’하게 다시금 던져져야 할 지점이다

10.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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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10-01-2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학기 강의 준비 때문에 제 책상 위에도 이책이 놓여 있습니다. 몇몇 작가만 슬쩍 훓어 보았습니다만 말씀대로 너무 많은 작가 수 때문에 개략적인 소개에 그치고만 점이 좀 아쉽네요. 이정우씨나 반이정씨의 글 내용이나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겠습니다만 그들이 갖고 있는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부럽기는 합니다.(뭐 제 오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술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당위적 요구가 점점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면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년의 나이가 서글퍼지네요. 바깥에는 겨울비도 추적추적 거리는데 말이죠...그나저나 미술책은 저같은 동네 사람이 리뷰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ㅋㅋㅋ

2010-01-2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7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2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색과 소리와 맛과 문자 등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 색에 대한 집착은 많은 은유나 코드를 꿈꾸게 합니다. 일정 화면의 색채와 형태에 숨겨둔 이야기로 새로운 상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인데요. 색채를 통한 이야기를 소유하려는 장르중에 현대 미술도 활용된듯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화상은 시장원리의 주체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