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갈무리, 2009)를 다루고 있다. 관심을 끄는 주제이기도 하고 물망에 올랐던 책들 가운데 가장 얇다는 점도 고려됐다. 원고 마감 전날에야 '압구정 커피'를 마시며 읽고 이튿날 아침에 계절강의를 나가기 직전 부랴부랴 써서 넘긴 원고였다. 2010년의 시작이다.   

 

한겨레21(10. 01.11) 인지과학이 도달한 맹자와 대승불교

책을 읽는 중요한 목적이 배움이라면, <윤리적 노하우>(갈무리 펴냄)는 제목부터 그러한 목적에 충실하다. 조합은 새롭다. 윤리적 노하우? 노하우가 ‘기술’이나 ‘비법’을 뜻하는 말이니 윤리적 행위의 기술이나 비법을 전수해준다는 말일까? 힌트가 되는 건 ‘윤리의 본질에 관한 인지과학적 성찰’이란 부제다. 윤리의 본질을 다룬 책은 많으므로 이 책의 방점은 ‘인지과학적 성찰’에 두어진다. 그것이 ‘노하우’와 연결되는 것이겠다.   

저자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칠레 출신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다. 과학자로서 생각하는 윤리 사상을 세 차례 강의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는데, 일단 그가 보기에 윤리는 '노홧'(know-what)의 문제가 아니라 '노하우'(know-how)의 문제다. 즉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대처의 문제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윤리적 행위는 반사적이면서 즉각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규칙보다는 습관을 따른다. 이것은 흔히 윤리적 행위를 윤리적 판단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함축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구성적 인지주의’ 혹은 ‘구성주의’에 토대한다. 그것은 같은 인지과학 내에서도 ‘계산주의’와는 대조되는 입장이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했던 계산주의는 지식을 추상적 논리의 대응물로 간주한 반면에 구성주의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움직이고 만지고 숨 쉬고 먹으면서 만들어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당신이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두판매대에서 담배 한 갑을 사고 느긋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불현듯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안다. 당연한 일이지만, 느긋했던 상태는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고 생각은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곧 바쁘게 가두판매대로 되돌아가보는 당신에게 주변의 가로수와 행인들은 더 이상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새로운 상황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이니까. 이렇듯 우리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 이때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반복적인 행동이 체화된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 또한 그런 노하우의 산물이다.   

윤리적 노하우의 관점에 서면, 중요한 것은 윤리적 인식이 아니라 윤리적 숙련 혹은 훈련이다. 앎이 아니라 습관, 더 나아가 성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구성적 인지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윤리에 대한 동양의 전통적 관점과 만난다. 바렐라는 특히 맹자의 인간 본성론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맹자는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내재돼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계발하고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오랜 수신(修身)을 통해서 형성된 품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람이다.” 

이 정도의 ‘윤리적 노하우’라면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적’ 행위자의 행동이 중앙 통제적인 자아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 어떨까? 즉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실체성을 갖지 않는 ‘가상적 인격’에 불과하다면 조금 놀랄 만하지 않을까? 바렐라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자아가 가상적이고 비어 있다는 것이 현대 서구과학의 발견이다. 이것은 통일된 중심 자아를 부정하는 정신분석의 윤리와 만나면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경계해온 불교적 관점과도 조우한다. 사실 무아(無我)에 대한 불교의 오랜 가르침을 고려하면 그것은 ‘오래된 발견’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비어있음(공성)’과 ‘자비’라고 하면, 인지과학은 긴 우회를 거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이쯤 되면 저자가 티베트 불교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다). ‘윤리적 노하우’가 열어줄 새로운 실천에 대한 명상으로 한 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10. 01. 05.  

P.S.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무아 혹은 가상적 인격으로서의 자아에 대해서는 좀더 공부해볼 생각인데, 좀 어려운 분야이긴 하다. 바렐라의 동료 마투라나의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 외 <자유는 진화한다>(동녘사이언스, 2009) 같은 데닛의 책 몇 권, 그리고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 읽어볼 책들이다. <시차적 관점>에서는 4장 '자유의 고리'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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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10-01-05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는 진화한다...얼마전 읽다가 포기...는 아니고 보류...하고 있습니다.
넘 어려워요.........ㅡ,.ㅡ 그의 논리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디선가 휙 안내자를 잃어버리고 홀로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

제가 데넷을 접하게 된건...호프스태터와의 공저, 도킨스의 불독...뭐 그런 이미지여서...왠지...적어도....도킨스나 호프스태터에게 접근하듯 접근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 철학자는 철학자...(제게는 외계인)...싶더군요.^^

로쟈 2010-01-05 20:24   좋아요 0 | URL
<다윈의 위험한 생각>도 너무 난해해서 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군요..

Ritournelle 2010-01-05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적 노하우>는 오늘 지하철에서 처음 읽어봤는데, 너무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더불어 <앎의 나무>도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05 23:51   좋아요 0 | URL
네, 어떤 얘기들을 하는 건지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한 책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1-0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설 때문에 <한겨레21> 지면이 아닌 로쟈님 서재에서 먼저 서평을 보게 되네요. 인지과학 혹은 인지심리학에 관해서라면 <물질과 의식>에 있는 몇몇 구절을 접해본게 전부인데요.왠지 그 쪽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먼 훗날에는 철학(아마 인식론 분야겠죠)이나 정신분석은 모조리 과학이 대체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윤리가 인식이 아니라 숙련의 문제라...로쟈님은 맹자와 대승불교를 연결시키셨는데, 저는 그 구절을 읽으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르더군요. 그 뭐라더라. 숙련된(훈련된) 성품의 탁월함이었던가...좀 가물가물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읽은 듯 한데, 찾아볼려니 책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네요.^^;;

로쟈 2010-01-05 23:52   좋아요 0 | URL
프로네시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좀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카프라까지 생각나더라구요...

빵가게재습격 2010-01-06 01:17   좋아요 0 | URL
......
전문용어의 압박에...체할 뻔 했습니다...(갑자기 턱! 던지시면 이렇게 체합니다.^^;;;;) 그런데 프로네시스가 그거였나요? 제 기억엔 프로네시스는 덕성의 기준이 되는 사람 내지 속성 뭐 이런 정도였던 것 같은데...아무튼 가물가물입니다.(하필이면 책이 없네요. 아까 책장을 모조리 훑어봤는데 안 보이네요.)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을 쓴 카프라 말씀하시는 거죠?

로쟈 2010-01-06 21:11   좋아요 0 | URL
보통 '실천지'라고 하는데, '실천적 앎'입니다. '이론적 앎'을 뜻하는 에피스테메와 대비되는. 네, 카프라는 그 카프라죠...

빵가게재습격 2010-01-06 23:16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카프라 책은 전에 도서관에서 <통섭>을 빌리면서 같이빌려왔다가, 끝내 못 읽은 책인데요. 호기심이 생기네요. 아무튼 요새 출퇴근 대란입니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다이조부 2010-01-0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에 실린 선생님의 글 잘 봤습니다. 내용이 어려워서 잘 이해는 안 가지만,

마지막 구절에 샘의 대학신입생 시절 일화가 인상적 이었어요. 한 동안 500원 짜리

동전 보면 로쟈님 생각 날듯...

책 읽는 경향에 예전에 선생님도 책 추천하셨더군요.. 하루자 신문에 2번이나 실렸네요

ㅎㅎㅎㅎ 그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내용은 난이도가 있을것 같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찬찬히 읽어보고 싶네요

로쟈 2010-01-05 23:53   좋아요 0 | URL
흠, 중학생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좀 오버한 건가요?^^;

펠릭스 2010-01-0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리 밀리건-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다니엘 키스/황금부엉이>의
다중인격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읽을 만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