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모레면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서거 50주기가 된다고 한다. 낮에 전철에서 이정우 교수의 칼럼을 읽고 알게 됐다. 칼럼은 중도파로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조봉암과 노무현을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비교해놓으니 닮은 점도 많다. 두 사람의 죽음은 '중도파의 비극'이면서 또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터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죽산의 생애를 좀더 자세하게 조명한 한겨레의 칼럼과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중고등학교는 방학이어서 학생들에게 이런 건 교육하지 못하겠구나 싶으니, 유감스럽다...      

경향신문(09. 07. 29) 중도파의 비극, 조봉암과 노무현

7월31일은 죽산 조봉암 선생이 돌아가신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을 이기긴 했지만 찜찜한 승리였다. 이승만 504만여표, 조봉암 216만여표, 얼핏 보기에는 이승만의 압승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투표, 부정개표가 있었다. 진보당은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기가 어려웠고, 일부 참관인은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무효표가 무려 185만여표 발생했고, 조봉암 표를 이승만 표로 바꿔치기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진보당에서 “득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라고 선언한 것이 억지나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당시 민심은 부패하고 오만한 이승만을 떠나 있었다. 이승만은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약진하는 조봉암을 큰 위협으로 느꼈다. 자기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이승만이 기어코 황당무계한 간첩 사건을 조작해냈다. 양명산의 허위 자백에 기초하여 조봉암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서둘러 사형집행한 날이 1959년 7월31일이었다.

죽산 사거 50년을 추념하는 사회민주주의연대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하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전강수 교수의 글을 보니 조봉암과 노무현의 비슷한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봉암은 해방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평등지권을 실현하고자 했고, 노무현은 토지 보유세를 강화하여 좀더 높은 차원에서 평등지권을 실현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진보적 정치가였으며, ‘좌파 빨갱이’로 매도당한 점, 그리고 권력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한 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원칙·대의에 충실했던 중도파
과연 그렇다. 거기에 몇 가지 더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중도파의 길을 걸었고 그러다 보니 좌우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조봉암은 일제시대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해 힘썼고, 일본·중국·러시아를 오가며 불굴의 독립운동을 했고, 7년이나 옥고를 치렀는데,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노선을 달리 했다. 미국, 소련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으면서 민주, 민족적 중도진보 노선을 걸었다. 그리하여 수구, 보수로부터는 여전히 빨갱이 취급을 받았고, 극좌파로부터는 변절자, 기회주의자로 몰렸다.

노무현 역시 과거 미국 일변도의 외교를 넘어 자주노선을 추구했으며, 국내 정책도 수구·보수로부터는 좌파라고 공격당했고, 진보 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자로 매도당했다. 오직 극좌, 극우만이 기승을 부린 남북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도파의 어려움, 좌절을 보여주는 것이 두 사람의 인생행로다.

두 사람 다 원칙과 대의에 충실하여 손해를 보면서도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았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태도를 지녔다. 두 사람 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조봉암은 자신을 위한 구명운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사는 정치를 했고,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했다. 노무현은 죽음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권력에 의한 죽음마저 비슷
노무현은 5월23일 새벽 길가에 난 풀을 뜯고는 마실 가듯이 태연한 걸음걸이로 죽음을 향해 갔다. 50년 전 7월31일 아침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던 조봉암은 호송 간수를 잠깐 기다리게 한 뒤 서대문 형무소 담장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에 다가가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은 뒤 담담히 형장으로 들어갔다.

이전투구로 소용돌이치는 정치판에서 언제쯤 이런 거인의 풍모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극좌, 극우가 아닌 중도의 길을 걷는 양심적 정치세력을 국민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죽산이 간 지 벌써 50년, 언제 그런 날이 올까. 오기나 할까.(이정우 | 경북대 교수·경제학) 

한겨레(09. 07. 30) 조봉암 선생 50주기, 명예회복을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들이 죽산 조봉암 선생을 ‘사법살인’한 지 7월31일로 50주년이 된다. 치열한 독립운동가, 평화통일론자를 권력에 중독된 이승만과 친일에서 반공으로 ‘성형수술’한 법조인들이 합작하여 처형한 뒤 반세기가 지났다. 그 억울함과 부당함, 불법과 폭력이 아직까지 신원되지 않고, 재심 조처와 독립유공자 인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죽산은 일제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 동상으로 손가락 7개를 잘라내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 박헌영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족진영에 가담하여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정부수립 과업에 기여했다. 그리고 “평화통일론”과 “고루 잘사는 사회” 건설을 내세우며 이승만 정권에 도전했다가 정치보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 죽산을 죽이기 위해 국무회의에서 세 차례나 ‘죽산 재판 문제’를 언급하여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고, 검찰과 법관들은 ‘국부’의 뜻을 받들어 총대를 멨다. 상고심의 재판장 김세완과 주심판사 백한성·변옥주 등은 총독부 판사로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했고, 사형집행에 서명한 홍진기 법무장관 역시 총독부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해방 조국에서 총독부 판사 출신들이 독립운동가에게 애먼 누명을 씌우고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한 것은 반문명·반이성·반민족의 극치다. 1959년 7월이면 해방 9년이 지난 시점인데, 감옥에 가 있거나 은둔했어야 할 친일파들이 법복을 입고 독립운동가를 처단한 것은 참괴이고,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사법부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 참담하다.  

죽산은 투철한 독립운동가, 진보적인 평화통일론자, 양심적인 개혁정치인이었다.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북진통일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제기하고 자유당의 부패한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개혁정치를 주창하다가 용공으로 몰려 회갑을 두 달 남겨두고 처형되었다. 6·25전쟁 때는 공산군의 체포령이 내려지고 부인이 납북되는 시련을 겪었다.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국민기본권 신장과 균형 있는 경제 조항을 신설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기용되어 농지개혁의 기초를 만들었다. 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협력하지 않은 것은 죽산의 농지개혁 기초에 힘입은 바 컸다. 제3대 대통령 후보로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는” 불운을 겪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교수대에 서게 되었다.

죽산의 생애에서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진보당의 정강과 정책은 당의 강제해산과 당수의 처형 이후 ‘불온’의 대상이 되고 망각에 묻혔다. 죽산은 유언에서 자신은 ‘평화통일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열매는 후대에 맡긴다고 말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 또다른 이 대통령 치하에서 평화통일운동은 용공좌경의 동의어가 되고 다시 북진통일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50년대의 트라우마가 반복되는지, 역사가 거꾸로 가는지 개탄스럽다.

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할 때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듯이 한 치 앞을 볼 줄 몰랐던 이승만과 수하들은 죽산을 죽인 지 9개월 만에 4월혁명으로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투옥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죽산 사건은 정치탄압이므로 명예회복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제 정부는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하고, 사법부는 재심을 통해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것은 50년 묵은 산 자들의 책무이다. 삼가 죽산 선생의 명복을 빈다.(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09. 0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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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7-30 00:03 
    조봉암과 노무현 비교하기 — 경향 via 로쟈
 
 
드팀전 2009-07-30 02:19   좋아요 0 | URL
제가 진보당 사건과 관련해서 늘 떠오르는 또다른 인물 한명은 윤길중이라는 사람입니다.제 또래라면 그의 얼굴을 기억할 겝니다. 머리 희끗하고 얼굴 퉁퉁한.. 5공때인가 그 이후인가 국회부의장도 했었고 선상 파티에서 일본어 망언으로 유명한 적도 있었는데...대학때 그가 과거 진보당 간부였다는 것을 알고 묘한 생각이 들어서 여전히 그의 이름이 기억됩니다.죽산은 사형대에서 사라지고 그는 남아서 나름대로 반독재전선에 머물렀지만...결국 국보위와 5공을 거치면서 퇴락해갔었는데..얼마전에 보니 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거론되고는 하더군요...
사람이 인생의 끝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는 결국 그가 살아온 모든 삶을 단 한장의 스냅사진으로 남기는 것 같습니다.죽산도 그렇고 노무현도 그렇고...좋은 사진 한장 남기기 위해 살아서 용맹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이가 열이 많이 나서 1시간 가량 닦아주고 재워주고 그랬는데...그러다 아이는 자고 저는 또 멀뚱해졌습니다.

펠릭스 2009-07-30 11:41   좋아요 0 | URL
윤길중 전 의원 생각납니다.
1980년 제5공화국의 출범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 의원,
1980년 11대 국회의원선거로 민정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로쟈 2009-08-02 12:32   좋아요 0 | URL
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펠릭스 2009-07-30 09:29   좋아요 0 | URL
내일이면 조봉암 선생 50주기(1959.7.31)로 사형집행(사법살인) 되었던데요.
1946년 조선공산당과 결별했고, 관련 가족사 또한 구구절절하겠습니다.
현재 우리 상황에서 진보.보수 성향에 적잖은 울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09-08-02 12:32   좋아요 0 | URL
아직 살아있는 가해자들도 있을 듯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