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원신문 5월호에 기고한 글이지만 내부 사정으로 신문이 나오지 않게 된 바람에 붕 뜨게 된 원고를 옮겨놓는다(나중에라도 나오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혁명'을 키워드로 한 '당신 서재의 나침반'인데, 그냥 김규항의 <예수전>(돌베개, 2009)과 몇 권의 책을 거명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자칭 ‘B급 좌파’ 김규항은 <예수전>(돌베개, 2009)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이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이 영성이다. 김규항이 보기에 영성 없는 혁명가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 없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개인의 심리적 평온뿐이다. 마르코복음 읽기를 통해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예수의 참모습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예수는 한 사람의 변화가 우주의 변화인, 그리고 우주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인 그런 변화와 혁명을 꿈꾸었다고 그는 적는다.  

그렇게 보자면, 개인의 자발적인 변화를 도외시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그러한 영성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 즉 사회주의 패망이 말해주는 것은 ‘영성 없는 혁명’의 필연적인 실패일 뿐이다. 우리에겐 아직 시험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이다. 그것이 바로 2000년 전에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가 우리에게 전해준 메시지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된 한 ‘시골 청년’이 꿈꾼 ‘하느님 나라’이고 새로운 세상이다. 그것은 어떤 세상인가?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모든 억압과 착취,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그것이 아무런 과정이나 절차 없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오는가? 가령,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문제로서 ‘정치적인 해방’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김규항은 마르코복음 5장에서 돼지떼에게 귀신이 들게 하여 호수에 빠져 죽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복음서를 통틀어 가장 또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돼지 같은 로마군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려 모조리 물에 빠져죽게 했다는 것이 로마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이 이야기의 숨겨진 메시지이자 익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예수의 정치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생각이나 태도로 볼 때 그가 로마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좀 허전하다. 로마는 예수의 분명한 적이었을 테지만 정작 이 로마의 지배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김규항은 진정한 변화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고 적어놓긴 했다. 그는 혁명과 변화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대신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분노는 주로 ‘위선자’ 바리사이인들을 향한다. 그러한 예수의 방식을 따라서 김규항도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은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를 표어를 내걸고 활동한다. 이들은 배운 만큼 배운 사람들로서 나름대로 안정된 경제력을 갖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 정도에 머문다. 이들은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적대세력으로서 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비판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과연 그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김영사, 2009)를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으로 ‘완고한 신앙’을 가진 대다수 한국 교회도 포함해야 할 듯싶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믿사오니’를 외치는 예수 신자로서 예수 ‘믿으미’는 많아졌으나, 그의 명령을 올곧게 따르는 예수 ‘따르미’는 적어진 것이 한국 교회의 성장사다. 물론 이러한 왜곡이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역사적 예수’는 증발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만 더 강화된 기독교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주요 개신교 교파마다 세계 제일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판국이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가 새삼스럽지 않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의 힘과 조직의 힘을 숭배하며, 그런 교회일수록 예수의 이름을 크게 외치지만 실상과 이름과 현실이 따로 노는 위선적인 행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잘못된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온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러한 회개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우리가 진정한 혁명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변화를 창출할 수 있을까? ‘자발적인 변화’와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시 숙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것은 근대 혁명의 원점으로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걸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프레시안북, 2009)를 참조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라고 이 혁명가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평가되는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에 쓴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9)에서 이러한 파괴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1963년작 <혁명론>(한길사, 2004)에서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르벨은 1970년에 펴낸 <마르크스도 예수도 없는 혁명>(법문사, 1972)에서 20세기의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 곧 ‘혁명 없는 혁명’이 바람직한 혁명의 조건이라면 ‘자본주의 혁명’이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09. 06. 12.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리우스 2009-06-1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뭔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문제였는데 핵심적으로 연결하고 배치하고 설명해주셨네요.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책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읽고 있죠. 그럼 건필하시길.......

로쟈 2009-06-13 08:26   좋아요 0 | URL
'건필'은 보시는 대로입니다.^^

꼬마요정 2009-06-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큰 생각은 못 하고... 명박이라도 내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우리 역사를 볼 때 언제나 우리의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면 얼마 뒤 다시 빼앗겨 버리는 게 일쑤라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청산 없는 혁명은 (혁명이라는 뜻 안에 대안과 청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못 쓰겠네요..) 혁명이 아니라 그저 전복일 뿐이겠죠.. 아.. 짧은 지식으로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ㅠㅠ 사회주의 혁명이니 자본주의 혁명이니 다 좋지만, 정말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혁명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13 08:29   좋아요 0 | URL
'혁명'이란 말도 하도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자체만으론 모호한 감이 있습니다. 그걸 좀 분명하게 해두는 게 좋을 듯해요...

2009-06-15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