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번역서는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이다. 3대 비판서를 백종현 교수가 혼자 힘으로 완역한 셈인데, 이로써 최재희(이석윤)판 3대 비판서가 수십 년만에 완전히 세대교체되었다. 기념비적인 업적이며 역자가 '한국의 칸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겠다. 여하튼 덕분에 한국어로 칸트를 읽어볼 생각을 품을 수 있게 됐다(나는 대학 2학년 때인가 최재희판 <순수이성비판>을 읽다가 그만 둔 기억이 있다). 물론 온전한 세대교체 및 한국어 번역의 정착은 일반 독자들뿐 아니라 철학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읽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가령 학술논문에서도 백종현판 칸트가 인용된다면 비로소 '한국어본'의 소임을 완수하게 되는 것). 한국어로서 칸트는 아직 '젊은' 철학자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16) 근대 정신세계 혁신, 그 파괴와 건설의 완결편 

“그의 철학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었고 많은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의 사상은 근대 의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노르베르트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이 문장의 주인공이 바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다. 근대 철학의 혁신자이자 계몽 정신의 산마루였던 칸트는 파괴자였던 것만큼이나 건설자였다. 그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고 정신의 새 건축물을 세웠다. 이 파괴와 건설의 논리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그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이 세 비판서 가운데 마지막 저작 <판단력비판>이 칸트 전문 연구자 백종현 서울대 교수의 번역과 주해를 거쳐 새롭게 나왔다. 앞서 백 교수는 <실천이성비판>(2002)과 <순수이성비판>(2006) 번역·주해본을 펴낸 바 있다. 이로써 칸트 3대 비판서가 백종현판으로 완역됐다. 40년에 걸친 칸트 연구의 결실이다.  

우리에게 각인된 칸트의 이미지는 파괴자라는 말이 주는 격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는 단조롭고 엄격하고 규칙적인 삶을 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걸어다니는 시계가 그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후년의 칸트를 칸트 생애 전체로 확대한 모습이다. 젊은 시절 칸트는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기 당구를 즐기고 살롱과 클럽을 드나들고 흥겨운 대화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교계의 총아, 멋쟁이 신사가 칸트였다. 그랬던 그는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정교수 취임을 전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칸트는 사교계에 발을 끊고 은둔자가 됐다. 그 무렵 하나의 거대한 문제가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철학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감이었다. 골방에 틀어박힌 칸트는 고투에 고투를 거듭한 끝에 10여 년 뒤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순수이성비판>(1781)이다. 칸트는 이 책에 이어 7년 뒤 <실천이성비판>(1788)을 완성했고, 다시 2년 뒤 <판단력비판>(1790)을 세상에 내보냈다. 3대 비판서를 완성한 후의 칸트는 젊은 날의 습성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노인이 돼 있었다.

칸트가 세 주저에 ‘비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가 계몽정신의 아들임을 보여준다. <순수이성비판>의 초판 머리말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를 “모든 것이 비판에 부쳐져야 하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라고 규정한 뒤 이렇게 말한다. “이성은 오직, 그 자신의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승인한다.” 이성이 모든 것을 비판에 부친다면, 이성 자신도 그 비판의 법정에 서야 할 것이다. 이성이 이성 자신을 소환해 심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칸트 비판철학의 놀라운 전환이다. 인간 이성이 이성 자신을 규명함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과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간해 내는 것이 이성 비판의 제1과제라고 칸트는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비판이란 이성 자신의 기능과 능력을 밝히고 그 한계를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서 그 한계를 모르는 이성은 가차 없이 탄핵당한다.  


칸트의 비판 작업은 정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냈다. 이성의 자기비판 작업을 통해 칸트는 우리 정신이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며, 그 인식을 통해서 사물 자체의 존재가 확실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인간 이성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상세계의 창조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신이 담당하던 창조자 구실이 인간의 이성 안으로 옮겨졌다. 세계 존재의 근거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의식의 규정을 받는다는 이 발상, 신의 업무를 인간의 업무로 바꿔놓은 이 발상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그렇게 의식이 창조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제멋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엄격한 법칙을 따른다. 이렇게 의식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의 법칙’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면, 그런 자연의 법칙 안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유의지로써 세계를 바꾸고 도덕적 이상을 구현해 가는 정신 능력의 근거를 규명하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이다. 물론 이때도 정신은 엄격한 내적 법칙 곧 도덕법칙을 따른다. <판단력비판>은 이 두 저서 사이 가교 노릇을 하는 책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 사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다. 행위하고 실천하려면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는 마음의 능력의 원천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칸트가 먼저 탐구하는 것이 ‘미적(미감적) 판단력’이다. 이 미적 판단력 규명이 이후 철학적 미학의 진정한 출발점을 이룬다. 나아가 칸트의 미적 판단력은 현대의 정치철학에도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한나 아렌트의 ‘정치 판단 이론’은 칸트의 이 판단력비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명섭 기자)     

 

세계일보(09. 05. 13) 칸트 3대 저작물 완역 마침표 찍다

서양의 세 문화기둥인 그리스·로마 문화와 과학, 기독교 사상은 칸트에 이르러서야 최초로 통합됐다. 그는 이 세 문화기둥을 동시에 한 시야에 두고 반성하며 설명했다. 한국 철학사와 정신사에 칸트 철학이 미친 영향도 지대했다. 한국에 칸트 사상이 유입된 것은 20세기 초. 우리 사회가 19세기 말부터 서양전통에 합류한 게 계기가 됐다. 우리 사회 저변에는 유교적인 가치 체제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서양의 가치가 사회 유지의 잣대가 되고 있다. ‘사회 정의’라는 문제만 하더라도 ‘서양 법사상’이 사회 유지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흐름의 핵심에 ‘칸트’가 있다. 칸트 철학은 우리보다 앞서 서양철학을 받아들였던 일본을 통해서였다. 한국 철학박사들 중 ‘칸트’를 주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는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를 주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들보다 많은 수치다. 

이처럼 철학사에서 칸트의 비중이 컸으나, 그간 그의 사상이 ‘동일 학자의 일관된 설명’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칸트의 3대 저작물인 ‘순수이성비판’(1781년)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은 그의 인식론을 잘 담아냈으나, 한 학자가 풀어낸 경우는 없었다. 각기 지식(眞)과 행위(善)의 영역을 논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더해 감정 영역인 ‘미(美)’의 문제를 다룬 ‘판단력 비판’을 한 사람이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백종현(59)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성과는 눈에 띈다. 백 교수는 최근 ‘판단력 비판’(아카넷)을 내놓으며 칸트의 3대 저작물 완역에 이정표를 찍었다. 일본 저작물을 답습하던 관행을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칸트의 3대 저작물을 한 학자가 완역한 경우는 외국에서도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게 책을 출간한 아카넷 오창남 편집장의 설명이다. 



칸트가 10년에 걸쳐 3대 저작물을 내놓았듯 백 교수도 3대 저작물 번역에 1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다. 2002년 ‘실천이성비판’에서 시작해, 2006년 ‘순수이성비판’를 거쳐 올해 ‘판단력비판’을 번역하며 작업을 마무리했다. 백 교수는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 저수지’에 모이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이 저수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칸트 철학이 우리 사회에 주는 뜻은 각별하다”고 설명한다.

“사람의 여러 가치를 논했던 칸트 철학은 ‘인간 소외’가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는 현실에서 더 유용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치’가 있는데, 이 가치를 가치있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칸트는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어요. 사람이란 결함이 있는 존재인데, 이를 극복하는 가치있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나오지요.”

우리 사회의 좌우갈등과 빈부격차 등 문제점도 칸트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법률적 평등과 시민적 자유에서 조화를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면 갈등의 강도가 낮아진다고 백 교수는 설명한다. 사회의 소외층 혹은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중요하다. 백 교수는 “소외층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며 “약자가 감사하다고 여기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3대 저작물 완역은 일본 영향을 받았던 선배 학자들의 한계를 건너뛰었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또 통일되지 않았던 철학 언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는 점도 의미 있다. 일례로 그간 국내 저작물에서 ‘오성’(깨닫는 능력)으로 번역됐던 독일어 ‘VerStand’(아는 능력)는 본래의 뜻인 ‘지성’으로 풀이했다. 백 교수는 칸트의 3대 저작물 완역에서 더 나아가 4대 저작물의 하나로 그의 종교 철학을 다룬 ‘순절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번역하고 있다. 2∼3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번역이 끝나면 칸트 사상의 ‘진선미성’(眞善美聖)이 완결되는 셈이다.(박종현 기자) 

09. 05. 15.  

P.S.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로는 백종현 교수의 <존재와 진리>(철학과현실사, 2008)가 있지만 입문서도 겸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옮긴 카울바하의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서광사, 1992)가 예전엔 입문서 역할을 했었다. 김상봉 교수의 <자기의식과 존재사유>(한길사, 1998)는 짐작에 우리말로 씌어진 가장 쉬운 칸트 소개서가 아닐까 싶다('쉽다'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책들과의 비교에서만 의미를 갖지만). 칸트 전공자인 김상봉 교수는 언젠가 <판단력 비판>을 옮기겠다고 한 적이 있어서 나는 김상본판이 백종현판보다 먼저 나올 줄 알았다.  

개인적인 바람을 적자면, 승계호 교수의 입문서 <칸트>가 꼭 좀 번역/소개됐으면 싶다. 영어권의 칸트 입문서로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이 읽힌다는 건 자랑할 만한 일 아닐까. 정작 이런 책을 번역하는 데에는 국내 학자들이 왜 인색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바람을 더 적자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번역 이후에 백종현 교수가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마저 번역해주면 좋겠다. 한국의 헤겔 전공자나 헤겔학자들은 임석진판을 넘어서는 <정신현상학> 번역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므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건 '부지런한' 칸트 전공자가 아닐까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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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6 00:16   좋아요 0 | URL
정말 감사드려야 할 일인거 같아요.

로쟈 2009-05-16 00:30   좋아요 0 | URL
일당백이라고 해야겠어요. 덕분에 동료 철학 전공자들이 좀 민망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2009-05-16 0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6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슴츠레 2009-05-16 15:57   좋아요 0 | URL
가히 '감동적'인 소식이군요.ㅎㅎ 백종현 선생님 덕분에 칸트를 읽지 않을 핑곗거리가 또 하나 줄은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16 21:10   좋아요 0 | URL
사실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동료 학자들에겐 '민폐'인데요.^^;

푸른바다 2009-05-16 16:51   좋아요 0 | URL
최재희 역이나 전원배 역의 순수이성비판도 휼륭한 편이었으니, 칸트는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행복한 철학자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석윤 역 판단력 비판이 가장 한자가 많고 딱딱했는데, 새 번역이 기대되는 군요. 말씀대로 백종현 교수님이 정신현상학 마저 새로 번역하신다면, 우리나라 번역사에 신기원이 이루어지겠군요^^

로쟈 2009-05-16 21:1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백종현판을 안 읽어봤는데, <판단력비판>부터 읽어보려고 합니다...

푸른바다 2009-05-16 22:53   좋아요 0 | URL
백종현 판이 가장 나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하지만 아직 칸트가 우리말로 완전히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백종현 판에서 기존의 번역에서 사용되던 '오성'을 '지성'으로 바꾸었지만, 우리말에서 흔히 사용되는 '지성'이 과연 칸트 철학 체계에서 'Verstand'에 대한 적절한 번역인지는 의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말에서의 '지성'이 칸트의 'Verstand'보다 포괄적이고 개념의 지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Verstand'는 칸트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용어이고 따라서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한국말은 없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Verstand'는 감관을 통해 들어온 지각들에 대한 좁은 의미의 '판단'인 반면 우리말에서 '지성'은 넓은 의미의 지적인 능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칸트의 Verstand로 한정되기에는 지성이 일상 생활에서 너무 빈번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에 오히려 칸트 이해를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차라리 관례대로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오성'을 그냥 Verstand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편이 혼돈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말씀하신 대로 지식인들이 '백종현 판'을 한국어 저본으로 받아들이고 꾸준히 인용하고 그 개념들을 공유했을 때, 비로서 칸트의 한국말화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성'의 경우 과연 칸트적 의미의 Verstand로 좁혀지기에는 너무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아닐까 싶군요.

로쟈 2009-05-16 22:20   좋아요 0 | URL
'지성' 번역에 대해서는 저와 뜻이 같으시네요.^^ 역자가 독어 'Verstand'야 잘 이해하시겠지만 한국어 '지성'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간과하신 게 아닌가 싶었어요. 게다가 국내 로크 전공자들은 '인간 오성론'을 아직까지는 '인간 지성론'으로 바꿀 의향이 전혀 없는 듯싶으니, 독자로선 어차피 '지성'과 '오성'을 다 알아야 합니다. '도덕형이상학'을 '윤리형이상학'이라고 '의역'한 것도 저는 공감하기 좀 어렵습니다...

푸른바다 2009-05-17 09:35   좋아요 0 | URL
존 로크의 'Human Understanding'은 오히려 우리말 '지성'에 좀 가까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uman Understanding'은 데카르트의 'Bon Sens'와 통하는 개념이고 칸트의 'Vernunft'와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에서 존 로크의 'Human Understanding'을 '悟性'이라고 번역할 때도 포괄적인 이성 개념을 전제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悟'는 우리나라에서 '깨닫다'로 이해되듯이 어떤 포괄적인 이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존 로크의 'Understanding'에 대한 역어였던 '悟性'이 더 좁은 개념인 칸트의 'Verstand'의 역어로서 채택 되었는지도 궁금하더군요^^

칸트도 수차례 번역되고, 데카르트, 흄, 버클리의 책도 대부분 번역되어 있는 판에 유독 근대 인식론의 진정한 출발인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만 번역이 진행되지 않는 것도 신기합니다^^ 제가 알기론 1970년대 초반 휘문출판사에서 간행한 조병일 선생의 발췌 번역본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캉이 '프로이트에로의 복귀'를 외치 듯, 화이트헤드는 '존 로크로의 복귀'를 외치는 듯 싶은데 우리 말로는 복귀할 곳이 없는 셈입니다^^

로쟈 2009-05-17 10:34   좋아요 0 | URL
서지에 밝으시네요.^^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이런 개념들을 처음 접하면서 '오성'이란 말이 입에 익었기 때문에, '悟性'이란 어원적 의미를 참조하지 않고도 그냥 쓰게 돠는데요.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이게 '지성'으로 깔끔하게 대체되기 어렵다면, 결국 독자들은 '하나 더' 알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것이죠. 차라리 고정시켜서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인지 의문입니다(그래서 저는 '초인'을 '위버멘쉬'라고 음역하는 것도 '전문가적 오버'라고 생각합니다). 독어의 Verstand를 결국 영어권에서는 intellect가 아니라 Understanding으로 옮기는 것 아닌가요? 차라리 쓰던 말의 의미역을 좀 확장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푸른바다 2009-05-17 19:08   좋아요 0 | URL
서지에 밝기는요^^ 로쟈님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아무튼 저도 로쟈님 의견에 동감입니다. '오성'이라는 말을 사용한지도 벌써 100년(?)년 가까이 된듯 싶고, 일관되게만 사용한다면 학적인 추론이나 대화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칸트적 의미의 '이성'이나 '오성'도 웬만큼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듯 싶구요. 저는 '위버멘쉬'로 번역해 놓은 전문가들을 보면 왠지 '라파엘 전파' 미술가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물론 그분들의 학문적 노력과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마시구요^^ 불경의 한역 과정에서 '번역어'가 '원어'로 바뀐 사례는 있는 것 같습니다. Nirvana가 무위로 번역되다가 음사인 '열반'으로 바뀐 경우겠지요. 이 경우 무위가 이미 도가철학의 핵심 용어이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는 차원에서 발생한 필연성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초인'의 경우 니체외의 다른 철학체계에서 사용된 적이 거의 없는 니체 번역용 '신조어'에 가깝기 때문에 '위버멘쉬'의 의미를 초인에 부여해서 쓰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이라도 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초인'하면 니체를 떠올릴 터이니 '초인'의 의미만 잘 해설되어 있다면 니체철학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5:40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대양출판사 번역본(한상범 역)에는 '인간지성론'으로 되어 있네요.
1978년 초판 81년 중판.이 역본은 해설이 정말 자세하고 저자 연표도 자세해서 좋아요.

푸른바다 2009-05-17 15:59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이야 말로 서지에 밝으시군요^^ 저는 그런 번역본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한상범씨 책은 완역인지 모르겠네요^^ 로크의 원저 자체가 난삽하고 길고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영어로도 축약본이 더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축약된 영어본 2종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조병일 번역본은 축약본도 아닌 발췌본입니다^^ 언제 헌책방에서 찾아 봐야 할 것 같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5-17 16:38   좋아요 0 | URL
역자가 "이 발췌에 대해서는 역자가 책임을 짐.골자는 다 들어가 있음"이라고 밝혔어요.영어본 중에도 발췌본이 있는데 역자는 그 책들은 참고하지 않았다네요.대양출판사 세계사상대전집은 헌책방에 있을 거에요.저는 낱권으로 몇권 구입했는데 고물상에서 구입한 것도 있어요.
댓글 수준이 높군요.자세히 읽어봐야겠네요.
<니이체 철학의 현대적 조명>(청람)에 실린 정동호 논문제목이 '위버멘쉬는 누구인가'네요.

bam 2009-05-17 07:10   좋아요 0 | URL
김상봉 선생님의 번역본도 올해 안에 나올 것입니다. 지금 번역은 일단 끝냈고 옮긴이 주 다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후일 두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재밌을 듯 하네요. 칸트번역에 대한 백종현 선생님의 노고는 정말 이루말할 수 없이 고마운 것이고, 특히 순수이성비판의 경우, 1쇄에 나왔던 사소한 오역과 오류들을 다음쇄 찍을 때 교정하고 했던 모습도 좋았습니다만, 번역본을 볼 때 가끔 참을 수 없이 싫은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대표적으로 칸트가 라틴어를 사용한(또는 인용한) 대목에서 '고어'의 느낌을 살리시고자 한문으로 번역한 점. 어쨌듯 백종현 본이 최재희나 전원배 번역본보다 물론 나쁠리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번역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기존의 번역어들에 대한 몇 몇 수정이 백종현 본을 읽을 때 치명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거든요. 오역의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어 선택의 문제랄까, 백종현 선생님도 연배가 꽤 있으셔서 그런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들을 부러 선택하시는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아주 가끔 <접속사>의 번역이 부적절하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한 가지 더: transzendental (이하 tr.)과 a priori (이하 ap.) 의 번역 / 백종현은 transzendental을 '초월적'으로, a priori를 '선험적'으로 번역합니다. 그 전에는 대개 tr.을 '선험적'으로, ap.를 '선천적'으로 번역되었었는데, 그런 기존의 관행이 ap.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innatus(본유적/선천적)와 ap.를 혼동시키기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는 ap.를 '선험'으로 번역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r.에 있습니다. transzendental이란 개념은 칸트 자신이 창안해낸(혹은 칸트 시대에 창안된)개념입니다. 물론 tr.은 스콜라철학의 transzendentalia(초월자/직역하자면 초월적인 것들)과의 일정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과거에 '초월'은 'transzendent'의 번역어였고, transzendent와 transzendentalia는 중세 스콜라의 신학적 맥락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종현 선생님은 transzendentalia와 tr.의 관련성 때문에 이를 '초월적'이라 번역하고, 기존에 '초월/초재'라 번역되던 transzendent를 '초험'이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초월'이란 역어는 니체의 위버멘쉬를 '초인'이라고 번역할 때와 꼭 같은 난점을 가지게 됩니다. '초월'이나 '초인'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혹은 읽었을 때, 저는 언제나 super-natural 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저에게만 해당하는 극주관적인 느낌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칸트의 tr.은 그 자신이 설명하듯 ap.와 밀접한 개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둘이 서로 치환되어 사용되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죠. 칸트는 'a priori한 인식'이란 표현으로 '대상 일반에 대해 가능한 순수하고도(경험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을 의도하고 있고, transzendental이란 표현으로는 'a priori의 가능성을 문제삼는/탐구하는'이라고 설명합니다. <순수이성비판> 머리말의 유명한 구절 중에 "transzendental Philosophie는 a priori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철학이다."라는 말도 있는데(정확하진 않습니다), 어쨌듯 '초월'이란 역어는 이상합니다. 이런 사정때문에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tr.의 번역에 있어서도 '선험'을 사용하곤 합니다. 한편 김상봉 선생님은 tr.과 ap.의 연관성을 고려하시고 tr.을 '선험론적'이라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 저는 백종현 번역본을 읽을 때, transzendental이라는 표현을 '선험론적'으로 모두 바꾸어 읽어야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요. 또 tr.은 이후 하이데거나 프랑스철학에서도 많이들 사용되는 개념인데, 번역할 때는 보통 a priori랑 구별 없이 둘 다 '선험적'으로 번역되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17 10:25   좋아요 0 | URL
댓글로만 읽기에는 아까운 지적이신데요.^^ 김상봉판도 기대가 됩니다(갑자기 '칸트 르네상스'라도 된 듯싶네요). 저도 오래전 읽은 기억으로 '선천적/선험적'을 '선험적/초월적'으로 바꾸고 transzendent인가를 '초재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식의 설명을 읽은 듯합니다. 기본적으로는 학술용어/전문용어의 경우 의미상의 맞대응어를 찾기는 어렵고, 그걸 고정시키고 사용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정/사용에 얼마간의 '근거'나 '적합성'을 고려해야겠지만요. 더불어 이해의 용이성도 중요하게 고려해야겠구요. 이런 대목에선 같은 전공학자들끼리도 합의가 어려운 듯싶어요. 들뢰즈 번역어들의 경우도 그렇고. 그게 물론 학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일반 독자들에겐 '골탕'먹는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번역된다는 걸 과연 모두 알아야지만, 칸트를 이해할 수 있고, 들뢰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좀 소모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푸른바다 2009-05-18 14:20   좋아요 0 | URL
초인에 대한 님의 느낌이 극주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에겐 꼭 super natural의 느낌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super natural한 힘을 가진 자로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는 '초능력자'이지 '초인'은 아닌 것 같네요^^ 유리 겔라를 초능력자라고는 해도 초인이라고 하면 어색하듯이 말입니다. '초인'이란 말은 일상어에선 명사로 보다는 '초인적'이란 형용사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때도 니체적인 의미의 초인과는 물론 다르겠지만 '초능력'과도 매우 다른 보다 현실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말은 유리 겔라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를들어 야구에서 '초인적인 역투'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형용사적으로 사용된다는 건 초인의 경지에는 달성할 수 없다는 걸 전제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초능력 보다는 현실적인 개념으로 제겐 느껴집니다.

이육사의 '광야'에도 초인이 등장하는 데, 이 개념이 니체랑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super natural한 힘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독일어에서 ubermensch도 어차피 신조어니 이의 간결한 번역어인 '초인'에도 니체가 ubermensch에 담고자 했던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한다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네요. 위버멘쉬하면 전 왠지 '어륀지'가 연상되어 웃음이 나옵니다.

로쟈 2009-05-17 22:31   좋아요 0 | URL
네, 하지만 '위버멘쉬'론자들은 동일한 사안이라고 생각지 않는 듯합니다...

푸른바다 2009-05-17 23:04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니체가 이 땅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서양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집이 2회나 간행된 철학자도 니체가 유일한 듯 싶고... 번역하시는 분들이 자신의 마음에 맞는 번역어를 고르는 것은 '오역'만 아니라면 어느정도 자유의 영역에 속하겠죠. 하지만 이 번역어의 생존 여부는 민중이 얼마나 그 번역어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초인이라는 번역어는 니체가 이땅에서 읽힌 이래 영원회귀와 함께 니체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였고, 니체를 읽으면서 느꼈던 수많은 개인적인 감정들과도 얽혀 있습니다. 전 아무래도 위버멘쉬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아마 많은 니체 독자들도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