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의 두 얼굴
러시아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의 양심: 지드와 윤동주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뒷부분은 아이스킬로스(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것이다.  

Α. 티탄족(거인족)과 올림포스 신들(제우스 패) 간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의 입장에 있었다(혹은 제우스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티탄족들이 패했어도 그들만은 지옥행을 면할 수 있었다. 현명하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프로메테우스는 티탄들이 싸움에서 패배할 줄 알았기 때문이고, 무엇이든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에피메테우스는 누가 이길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프로메테우스가 티탄족인지라 올림포스 신들은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Β. 제우스 대신을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에게 어떤 제물을 어떻게 바치느냐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이때 프로메테우스는 자진해서 조정의 역할을 맡고 나섰다. 커다란 소를 한 마리 잡아 인간의 몫과 신들의 몫을 만들어 놓았는데,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포스 신들을 골탕먹이려고 맛있는 살코기와 내장은 가죽에 싸서 거기에 곱창을 씌어놓고 또 한편에는 뼈를 기름진 비계로 덮어 맛있게 보이게 한 뒤 제우스에게 한쪽을 선택하라고 했다. 제우스는 겉만 보고 기름기가 덮여진 뼈를 골랐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속은 제우스는 화가 났다. 그렇잖아도 인간들의 타락과 비행을 언짢게 여겨왔던 제우스는 이번에야말로 인간들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인간들에게서 불을 빼앗아버렸다(제우스는 인간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Γ. 평소에 제우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은근히 제우스를 무시해 왔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또 곯려주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들을 위해 신들의 화덕(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의 화덕)에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글쓰기, 셈하기, 가축 기르는 법, 집짓는 법,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법 등등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프로메테우스는 문화와 지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감히 신의 지위를 넘겨다보고 신과 대등하게 된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디오니소스의 재로 인간을 만들어서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자이다.       

Δ. 올림포스의 대신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한 짓이 마땅치 못했다. 그래서 그에게 벌을 주기로 하고 오케아노스 강 끝에 있는 코카서스 산으로 끌고가 바위에다 쇠사슬로 묶어 놓고, 그의 간을 독수리가 매일 와서 파먹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밤이 되면 간이 새로 돋아 나왔으니 프로메테우스는 수 세대에 걸쳐 독수리에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Ε. 한편 제우스는 여러 신들에게 부탁하여 에피메테우스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판도라를 만들어 그에게 주었다. 판도라는 신들의 선물을 담은 상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절대로 뚜껑을 열어 봐서는 안된다고 했다. 해서는 안된다는 일을 더하고 싶은 법이어서, 판도라는 기어이 뚜껑을 열어 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속에 들어 있던 갖가지 질병, 재앙 등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닫아버려서 가장 게으른 희망만은 그 상자 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Ζ.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첫째, 신이 프로메테우스를 대신해 죽어야 하고, 둘째, 신이 아닌 인간이 독수리를 죽이고 쇠사슬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켄타우로스 케이론이 그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했고,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여 그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 화해하고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고문 겸 예언자로 존경을 받았다(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패망의 비밀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상이 대략적인 프로메테우스 신화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나 <일과 나날> 등에서 읽을 수 있는 이 신화에 새로운 문학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이후 진정한 ‘신화’로의 길을 열어놓은 이는 아이스킬로스(B.C.525-455)이다.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도입부에서 제우스의 부하인 ‘힘’이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에게 건네는 말은 최고신(=절대권력)에 대항한 자의 죄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헤파이스토스, 아버님의 분부대로 이 악한을 철석 같은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저 높은 낭떠러지 바위에 꼼짝 못하게 해놓으시오. 이놈이 훔쳐다 저 인간들에게 준 것이 바로 그대의 꽃, 만물을 뜻대로 이루게 하는 기술의 빛인 불이었으니까. 그 죄 때문에 이놈은 신들에게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거죠. 제우스 신의 권력에 굴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26쪽)   

전체 이야기 중에서 이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장면은 징벌/고통(Δ)의 장면이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신들의 징벌은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신의 권력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은 그래서 ①신에 대한 반항과 ②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징한다. 아이스킬로스가 영웅적으로 그려내는 프로메테우스는 그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끝까지 감내하면서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 “나는 제우스의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견뎌볼 테다.”(37쪽)  

그가 온갖 회유의 유혹을 물리치며 제우스의 권위에 맞서는 무기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제우스 패망의 비밀이다. 이 비밀은 제우스의 부친인 크로노스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기면서 아들에게 내린 저주이기도 한데, 오직 프로메테우스만이 그걸 알고 있다. 때문에 이 비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사자인 헤르메스에게 이렇듯 분격하여 말할 수 있다: “나를 이 무서운 쇠사슬에서 풀어주기 전에는 제 아무리 고문을 하고 꾀를 부려 봐야 내 입을 벌릴 수는 없을 걸. 그러니 멋대로 벗갯불을 뒤흔들어 보라지.(...) 그래도 나를 굽히진 못할 걸. 저를 왕좌에서 몰아낼 자가 누군지를 내 입에서 알아내진 못한다니까.”(54쪽) 그리하여 아이스킬로스의 이 비극은 프로메테우스를 응징하는 제우스의 무서운 번개와 벼락으로 마감된다.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원래 올림포스 최고신인 제우스의 권위와 지성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도전의 부질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장중한 비극으로 재해석하면서 가져온 결정적인 전환은 바로 이러한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가치전도이다. 최고신인 제우스는 이 비극에서 절대권력의 폭군으로 그려지며,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반항적/박애적 행위 때문에 고통받는 영웅으로 부상한다. 그래서 관객으로부터 동정과 공감을 받게 되는 이는 단연 프로메테우스이며 그가 이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실현되지 않지만, 제우스와의 화해의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프로메테우스를 무작정 고통받는 영웅으로만 그리고 있지는 않다. 절대권력도 언젠가는 붕괴된다는 비밀을 프로메테우스가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언젠가는 해방될 프로메테우스를 우리는 예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중에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와 「불의 운반자, 프로메테우스」는 몇몇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온전하게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게 된다.   

09.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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