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일자 경향신문 지면에 실리는 '책읽는 경향' 코너를 옮겨놓는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811005&code=960207). 지난주에 청탁을 받았지만 짧은 분량이어서 계속 미루다가 오늘 오전에야 원고를 작성해서 보냈다. 일간지라서 저녁에 벌써 기사로 올라와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2008)이 떠올리게 해주는 간단한 단상을 적었다.  

   

경향신문(09. 03. 02) [책읽는 경향]쓰레기가 되는 삶들  

요즘 부모들의 관심은 온통 아이들의 성적과 키에 쏠려 있는 듯하다. 부유층과 서민층을 가리지 않기에 ‘평균적인’ 관심사라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아이들의 평균적인 학력과 키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내 아이’의 성적이고, 다른 아이와의 성적 ‘차이’다. 키 또한 그렇다. 성장기 아이의 키가 ‘상위 90%’(성장도표 백분위수 기준)라고 하면 부모는 우쭐댄다. 그렇게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고 남보다 뛰어나길 열망한다. 그래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우리’와 낙오된 ‘그들’이 나뉜다. 한편에는 성공한 소수로서의 ‘우리’, 곧 ‘대한민국 1%’나 ‘최소한 20%’에 턱걸이한 ‘우리’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빈곤층과 몰락한 중산층이 구성하는 ‘그들’이 있다. ‘우리’는 항상 ‘그들’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질타한다. 그런 ‘그들’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고,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충고도 보탠다. 그렇게 ‘우리’의 특권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쓰레기’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지그문트 바우만·새물결)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와 ‘그들’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부유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우리’이고 빈곤한 저개발 국가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없으며 ‘우리’가 존립할 수도 없다는 점.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임금의 10분의 1만 받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안락과 품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는 기식자다. 성장의 한계를 넘어 거인증에 걸린 지구는 ‘기식자’와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09. 03. 01.  

P.S.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임금의 10분의 1만 받으면서 화장실을 청소해주는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안락과 품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란 구절은 바우만(<쓰레기가 되는 삶들>, 90쪽)에게서 간접 인용한 것이고, 바우만은 리처드 로티(<철학과 사회적 희망>)에게서 인용한 것이니까 일종의 간접 재인용이다.   

바우만이 이 인용문의 앞뒤에서 하고 있는 얘기는 '그들'의 과잉에 대한 부국들의 대처다.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와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20개년 계획의 '인구와 건강 프로그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들'(개발도상국)이 비용의 2/3를 부담하고, '기증자' 국가들이 나머지를 부담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부유한 국가)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1994-200년 사이에 1억 2천2백만 명의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걱정시키는 '그들'의 과도한 출산에 맞서는 싸움에 예기치 않은 동맹군이 등장했는데, 다름아닌 에이즈이다. 예컨대 보츠와나에서는 같은 기간에 기대수명이 70세에서 36세로 떨어졌고, 2015년 예상 인구는 28%나 떨어졌다. '우리'의 제약회사들은 '지적 재산권'을 수호한다는 이유로 필요한 약을 적절한 가격에 공급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과잉을 억제하는 것이 또 다른 일면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의 생활방식'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적은 수가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그들'을 수입해야 한다는 냉엄한 전망"이 그것이다.  

"인간 쓰레기, 특히 부유한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인간 쓰레기를 써먹을 새로운 용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소름끼치지는 - 경비가 철저한 회사의 이사회의실과 지루함을 자아내는 학술회의장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듯이 - 않았을 것이다."(91쪽)  

인용문에 착오가 있어서 겸사겸사 지적을 해둔다. 삽입절을 빼면 "인간 쓰레기, 특히 부유한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한 인간 쓰레기를 써먹을 새로운 용도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전망이 그렇게 소름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가정법 문장이고, 원문은 이렇다. "That prospect would not be so frightening were it not for a new use to which wasted humans, and particularly the wasted humans who hve managed to land on affluent shores, have been put."(46쪽) 즉, 현재 사실의 반대를 나타내는 '가정법 과거' 문장이다. 따라서 번역문이 '가정법 과거완료'로 옮겨진 것은 시제상의 오류이다. <유동하는 공포>에서도 그렇고, 바우만의 가정법 문장이 자주 착오를 유발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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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0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이익과 안락한 삶을 위해서는 타자의 인권이나 생명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동정이니 뭐니 하는것도 결국 나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한에서만 허용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오늘의 세계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어 무섭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로쟈 2009-03-03 00:03   좋아요 0 | URL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이 모여 결국엔 '쓰레기'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말 그대로 '유동하는 공포'입니다.--;

[해이] 2009-03-02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글들은 술술 읽혀서 좋은것 같습니다. 내용도 알차면서 크게 난해하지 않게 글을 쓰는거 같아서 원추이죠 ㅋ

로쟈 2009-03-03 00:0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별로 반응을 못 얻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습니다...

다락방 2009-03-0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안그래도 어젯밤에 경향신문 읽으면서 책을 메모해 놓았거든요. 이거 한번 봐야지, 쓰레기라니, 하면서요. 그리고 이름을 보고 로쟈님과 이름이 같구나, 했는데 옆에 로쟈님이라고 쓰여있더군요. 하핫.

핸드폰에 메모해놓았어요. 어제 경향의 책소개,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로쟈 2009-03-03 22:31   좋아요 0 | URL
네, 한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