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를 다루고 있다(시간에 쫓겨 교정도 보지 않고 보낸 글이라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지면으로 읽으니 '티'는 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바우만에 대해서는 그동안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회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가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우만의 책들을 좀더 진지하게 읽기로 작정한 이유이다. 참고로, 기사에서 수잔 니먼의 <근대 사상에서의 악>은 번역/소개되면 좋을 듯싶어서 일부러 명기를 했다. 관심을 갖는 번역자나 출판사가 있었으면 싶다(나는 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한겨레21(09. 03. 02) 공포는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2008년 5월 8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이 진앙지 주변에 있던 지핑푸 댐의 물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보도되었다. 쓰촨성 지진광물국과 미 컬럼비아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쓰촨성이 지진 다발 지역이긴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지진활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것은 수력발전용 댐에 가두어진 엄청난 무게의 물이 지하 단층에 압력을 가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진대에 400개에 이르는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이런 추측을 진화하기 위해 부심하면서 쓰촨성 지진의 연구자료에 대한 접근도 차단하고 나섰다 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상조사와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또 다른 지진 피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대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댐을 건설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고 합리적 계산능력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은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공포’의 한 양상이다. 최근에 나온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펴냄)는 그의 ‘유동적 근대성’(liquid modernity) 시리즈의 하나인데,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이러한 유동성의 양상은 물론 단단한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과 대비된다. 바우만의 통찰은 ‘유동적 근대성’을 ‘고정적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이면서 그 필연적 귀결이라고 보는 데 있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2002)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서 바우만은 근대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지진에서 찾는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사망한 이 재난은 당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자비한 자연의 재앙과 전지전능하신 신의 섭리는 도저히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흔히 자연재해는 죄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이었지만 “이 피할 수 없는 충격에는 무고한 자나 죄인이나 똑같이 희생되었다”(볼테르). 이러한 모순에서 비롯된 악에 대한 성찰이 결국엔 자연을 신의 섭리로부터 분리시키는 ‘탈주술화’를 가져왔다. 자연에서 신의 가면을 벗겨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탈주술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연은 여전히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도 대신에 과학과 기술을 새로운 대응책으로 선택한 근대인은 도덕적 악이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악도 이성에 의해 예측과 예방이 가능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것이 근대성의 기획이자 견고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바우만이 보기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재해는 ‘원칙적으로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거꾸로 도덕적 비리가 ‘고전적인’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악보다도 더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바우만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근대 관료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닌 ‘규칙에의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사실 20세기의 역사는 그러한 ‘합리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역사적 교훈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바우만은 아우슈비츠와 굴락(소련의 강제수용소), 히로시마의 교훈을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들이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도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위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유동적 근대의 공포인 것이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이 유동적 공포에도 차별이 있다는 점.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분명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이 자연재해가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카트리나가 덮치기 이전에 법질서에 버림받고 근대화에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미리 고려해서인지 연방정부는 홍수 대비 예산을 마구 삭감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늑장 출동한 주 방위군은 구호활동에 나서기보다는 ‘법질서’ 유지에 더 주력했다.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은 근대화의 두 가지 모토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배려할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그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유동적 공포란 지속될 수도, 보편화될 수도 없는 근대화와 세계화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바우만의 예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09. 02. 23.   

P.S. 내가 흥미롭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건 주로 2장과 3장이다. 바우만의 핵심적인 아이디어, 적어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가 그 두 장에 집약돼 있고, 이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새물결, 2008)의 2장('그들'이 너무 많은가?)과도 이어진다. 가령 이런 문제의식: "우리를 걱정시키는 것은 항상 그들의 과잉이다. 우리 주위로 눈을 돌리면 그와 반대로 출산율의 지속적인 저하, 그리고 그것이 갖고 오게 될 결과, 즉 인구의 고령화가 우리를 안달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우리'가 미래에도 있을까? 미래에도 청소부가, 즉 '우리의 생활방식'이 날마다 쏟아내는 쓰레기를 수거할 사람들이 충분할까?"(<쓰레기가 되는 삶>, 90쪽)란 물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생활방식'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기사에서 정리한 대로,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창안된, 훨씬 안락해 보이는 삶의 방식을 '보편화'하기, 그것은 그런 방식을 채택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려된 적이 없다."(<유동한는 공포>, 28쪽) 오히려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일이 진정으로 참담한 재앙을 낳을 거라는 논리, 곧 '사다리 걷어차기'를 정당화하는 논리만을 들먹일 뿐이다. '세계는 평평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평평함'이며, 그것이 근대화/세계화의 허구이자 본질이다.  

한편 <유동하는 공포>의 번역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바우만의 문장들이 기본적으로 길고 나열적이어서 번역이 까다롭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몇몇 오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에서 내용을 가져온바 "반면 세계 인구의 11퍼센트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들은 세계 총생산의 겨우 0.5퍼센트만을 차지한다. 그것은 세계 최부국 3개국의 소득을 합산한 만큼에 지나지 않는다."(127쪽)에서 '세계 최부국 3개국'은 'three wealthiest men on the planet(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을 잘못 옮긴 것이다('men'을 아마도 'nations'로 잘못 본 듯하다. 대체 얼마나 빨리들 번역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떨까? 

"근대적 발전은 그 '자연스러운' 그리고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 문제 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 이 지구의 한계가 인식되고 진지하게 고려되었다면, 그런 발전이란 시작도 못했으리라.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으리라.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 말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근대적 발전 개념의 선구자들과 그 실행자들은 야심적인 개발 전략이 '실제로 추진'될 경우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낭비와 폐기물 문제에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128쪽)  

의미가 불투명하여 반복적으로 읽어보다가 원문을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원문은 '바우만식 문장'으로 복잡하다: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 If, in short, the promoters and practitioners of the modern concept of development the 'really deployed' stragedy of progressive improvement necessarily entailed."(74-5쪽)  

문법적으로 보자면 문단 전체가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처럼 과거형의 평서문 문장으로 바꿔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번역문은 이 문단을 '가정법 현재+가정법 과거완료+평서문 과거'로 어지럽게 옮겼다. 일단 첫문장을 가정법 현재로 옮긴 것은 부정확하다(이 문장은 '과거 사실'에 대한 유감만을 전달할 뿐이다). 귀결절에 해당하는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는 "근대적 발전은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가 아니라 "근대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확신하건대 그와 같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조건절은 어떻게 되나?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이고, 3개의 동사구로 구성돼 있다. 번역문은 이것은 "(문제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이라고 옮겼는데, '(문제제기를)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은 주술관계가 맞지 않는 비문이다. 그리고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를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라고 옮긴 것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대로 옮기면 "근대적 발전의 '자연적' 한계, 침해 불가능한 공간적 한계 문제를 논파하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면, 혹은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쉽게 배제하지 않았다면"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경우도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고, 조건절은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이다. 조건절이 두 개인 셈. 한데 두번째 조건절이 국역본에서는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라고 귀결절인 것처럼 옮겨졌다. "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의 한계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고 또 존중했더라면, 그리고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이란 교훈에 간헐적이고 피상적인 립 서비스 이상의 관심을 가졌더라면" 정도로 옮기고 싶다. 거기에 이어지는 귀결절이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이고, "근대적 발전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고,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을 것이다."로 옮겨진다.  

비록 대의를 파악하는 데 큰 지장은 없더라도 이런 식으로 '뜯어읽어야' 하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조금 더 세심한 교열이 이루어졌다면 좋았을 뻔했다. 끝으로 141쪽에서 '데카르트적 개체'는 '데카르트적 객체'의 오타라는 것 외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그건 145쪽에 나오는 '추방의 제거'라는 번역어다. 바우만은 'adiaphorization'이라는 희귀한 단어를 쓰고 있는데(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설명으론 "인간 행동의 바람직함을 따지는 과정에서 도덕적 범주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아예 그런 범주를 평가 기준에서 일체 삭제해버리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런 뜻이 어떻게 '추방의 제거'로 옮겨질 수 있는지 나의 한국어 실력으론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책임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근대 관료제의 두 가지 주된 도구라고 바우만을 말하는데, 내 생각으론 전후 맥락상 '몰관여성' 정도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다(*몇 분이 의견을 주셨는데, '무감각화'가 더 적합한 번역이다)... 

09. 0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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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3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san Neiman의 "Evil in Modern Thought" - 시간을 내어 숙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깊이 있는 책입니다.

로쟈 2009-02-25 00: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09-02-2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로쟈 2009-02-25 23:52   좋아요 0 | URL
분량은 만만찮은데요...^^;

게슴츠레 2009-02-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adiaphorization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adiaphoron을 응용해서 만든 개념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수업에서 짧게만 들었던 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과 사, 부와 가난같은 것들은 단지 '선호'의 대상으로서 '합리적인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합니다. '도덕적인 삶'의 기준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 얼핏 보면 크게 달라보이지만 도덕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데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사람이 부자일수도 가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도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경향에 지쳐있던 때 수업을 들으면서 이거 참 좋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우만의 설명을 연관지어 들으니 거 참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로쟈 2009-02-25 23: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냥 쉽게 '무관심성'이라고 옮겨도 될 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