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두려고 했으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도 있고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봐야 두 권의 책 이야기다. 하나는 최근 바짝 붐을 타고 있는(짐작엔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개봉과 함께 바람을 탄 듯하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죽음의 중지>(해냄, 2009)이고, 다른 하나는 퓰리처상 수상작가 어네스트 베커(1924-1974)의 <죽음의 부정>(인간사랑, 200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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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9. 02. 14) 죽음이 사라진 세상… 천국일까? 지옥일까?

장생불사(長生不死)는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실명하고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 인류 본성의 밑바닥을 보여줬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87)는 이번에는 '죽음이 소멸된 사회'라는 세계를 가상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사회, 경제, 도덕적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라는 첫 문장이 암시하듯 갑자기 죽음이 소멸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현세에서 '불멸'의 권리를 얻게 된 사람들, 태초 이래 인류의 가장 큰 꿈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새 생명은 진실로 아름답다"고 외치며 집단적 환희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있으면 우는 사람이 있는 법. 죽음의 협력 거부라는 난공불락의 벽에 부딪힌 장의업계는 정부에 가축 매장과 화장사업의 독점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죽지 않는 환자들로 만원을 이룬 병원에서는 환자를 복도에 내어놓는다. 돌봐줄 환자가 없는 호스피스들도, 생명보험 해약 요구가 빗발치는 보험사들도 통곡의 벽에 머리를 찧는다. 근본적 존재 위기에 빠진 것은 교회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이 없으며, 부활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무의미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람들의 환호는 '지옥의 종소리'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공포 사이에 던져진 인간군상의 모습이 한폭의 만다라처럼 그려진다. 정부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죽음 직전의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찾는다. 아직 죽음이 활동하는 국경 너머에 죽을 병에 걸린 환자들을 데려가주는 마피아는 이제 자선조직이 된다.

방송사 사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혼란의 7개월은 종식된다. 편지의 발신자는 '죽음'. 죽음은 이 실험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언제까지나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것처럼 동의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군요." 

줄 바꾸기와 인용부호 따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작가 특유의 문장도 여전하다. 책을 덮고 나면 공자가 던진 '삶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未知生 焉知死) 하는 무거운 철학적 질문이 한 노대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깨닫고 그 긴 여운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이왕구기자)   

한편, 베커의 유작에 관해선 별다른 리뷰가 올라온 바 없다. 출판사 소개도 고작 넉 줄이 전부다. "현대 저술 중에서 죽음인식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저술은 에른스터 베커의 <죽음의 부정>(1973)일 것이다. 이 책은 죽음과 관련된 현대적 고전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심화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죽음의 부정>은 에른스터 베커 자신이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3개월 전에 비문학 작품 분야에서 퓰리처 수상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책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출간되긴 하지만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라는 스피노자의 경구를 에피그라프로 달고 있는 베커의 책은 개인적인 관심사에 잘 들어맞는 책이다('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가 나의 네 가지 주제다). 비록 36년 전 책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만을 놓고 보자면 그간에 더 나은 진전이 있었는지 얼른 답하기 어렵다. 머리말의 필자는 베커의 주장이 갖는 의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베커가 내린 근본적인 결론은, 세상을 납골당으로 변하게 하고 모든 개인과 국가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이타적인 동기들 - 보다 큰 전체와 합병하고, 보다 큰 대의명분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우주적 힘을 받들고자 한 우리의 욕망 - 에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것이다"(13-14쪽).  

사실 이 책을 서점에서 본 지는 오래됐지만 구입을 미루다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이유는 번역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방금 인용한 대목부터가 오역이다.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Becker's radical conclusion that it is our altruistic motives that turn the world into a charnel house - our desire to merge with a larger whole, to dedicate our lives to a higher cause, to serve cosmic powers - poses a disturbing and revolutionary question to every individual and nation."  

번역문은 접속사 that 이하의 전체를 마치 보어절인 것처럼 옮겼는데(Becker's radical conclusion is that- 을 옮긴 것처럼) 이는 물론 전혀 엉뚱한 해석이다. conclusion을 받는 동격절이기 때문이다. 전체 문장의 주어 'Becker's radical conclusion'을 받는 동사는 'poses'이다("베커의 과격한 결론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불온하면서도 혁명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중학생도 알 만한 구문을 엉뚱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나머지 번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베커 자신은 이 책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가 서문의 시작에서 하는 말. "존슨 박사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 놀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죽음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이라는 동물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인간 행위 - 주로 죽음의 치명성을 피하려고 고안된, 어떤 면에서는 죽음이 인간의 최종 운명이라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고안된 행위 - 의 주요 동기라는 것 이상이다."(29쪽)  

역시나 원문 '이상의' 번역이다. 원문은 이렇기 때문이다. "The prospect of death, Dr. Johnson said, wonderfully concentrates the mind. The main thesis of this book is that it does much more than that: the idea of death, the fear of it, haunts the human animal like nothing else; it is a mainspring of human activity - activity designed largely to avoid the fatality of death, to overcome it by denying in some way that it is the final destiny for man."  

먼저 'prospect of death'를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하다. 어려운 '고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죽음에 대한 예상', '죽음에 대한 전망'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저자가 암과 투병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존슨 박사'는 물론 저명한 영어사전의 편찬자 새뮤얼 존슨을 가리키겠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자는 지시대명사 that을 앞의 나오는 것 이상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잘못 읽었다. "새뮤얼 존슨은 죽음에 대한 전망은 우리의 정신을 놀랄만큼 집중시킨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죽음이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왜 그런가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죽음이라는 관념,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인간이란 동물에 들러붙어 괴롭히는 것은 없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핵심적인 동기이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대부분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해보고자, 죽음이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계획된 것이다."    

우리는 번역에 대해서도 원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경구는 이 경우에도 적절해 보인다.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언젠가 놀랄 만큼 집중해서 죽음에 대한 책들을 읽게 될 날이 올 것이다...  

09.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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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2-16 23:52   좋아요 0 | URL
죽음이 없으면 무간도지요.무한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도 없을겝니다....그래서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엄마의 한을 풀기위해 그 먼나라 별나라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거 아니겠어요.ㅋㅋㅋ
그러니 <돌아 가야 할 때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라는 거죠.중의적이네요.ㅋㅋ

로쟈 2009-02-17 01:12   좋아요 0 | URL
불멸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불멸을 감당하기 어려운 게 인간이죠...

람혼 2009-02-17 00:4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랑시에르 번역에 관한 페이퍼는 어쩌면 국역본 <미학 안의 불편함>에 대한 글일 거라는 예상이 살짝 드는데요...^^

로쟈 2009-02-17 01:11   좋아요 0 | URL
미리 정해둔 제목은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입니다.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함께 다루려고 해요. 시간이 되면...

2009-02-17 0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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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08: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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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7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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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8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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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8 1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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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8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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