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주의에 관한 책은 옹호서이건 비판서이건 그간에 적잖게 출간됐기에 또 새로운 책이 나온다고 하면 그다지 주목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신기욱 교수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창비, 2009)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지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한다는 게 결론이라면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다(설마 그게 전부일까?). 짐작엔 미국이나 영어권 독자들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설 연휴인지라 민족주의란 주제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사실 더 핵심적인 건 가족주의 아닌가? 왜 일제 때부터 있지 않았나. 있는 자들의 이데올로기.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  

 

경향신문(09. 01. 25) "한 핏줄 신화에 빠진 한국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 민족주의’로, 서구의 민족주의 이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 진보와 보수를 모두 지배하는 단일민족 신화에서 벗어나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합니다.” 

신기욱 미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의 저서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이진준 옮김·창비)가 번역, 출간됐다. 민족주의를 거시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2005년 [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란 제목으로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먼저 나왔다.  

출간에 즈음해 방한한 신 교수는 “한국사회의 구성원리인 민족주의를 ‘신채호의 민족주의’ ‘안창호의 민족주의’와 같은 지성사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구조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신 교수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민족(nation)·종족(ethnicity)·인종(race)을 구분해 사용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세 가지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가 종족과 직결되지 않는 근대국가의 정치적 구성원리인 반면, 한국에서는 ‘한 핏줄이니까 한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식의 종족 민족주의로 발전한다.

현재와 100년 전의 구도가 비슷해요. 현재 전지구화/민족주의/동아시아주의가 공존하는 것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문명개화론/민족주의/아시아주의가 있었지요. 이 땅에 민족주의가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인권·시민의식이 강조됐는데 일본의 식민통치를 거치며 동질성과 집단의식을 강조하는 종족 민족주의가 강화됐습니다.”

이 같은 종족 민족주의는 식민통치, 전쟁, 분단체제, 통일문제 등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1920년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나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은 한민족의 독특함과 순수성의 기원을 입증할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문화·유산을 연구했으며 해방 이후 이승만의 일민주의나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공통적으로 종족 민족주의에 호소한다. 70년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론, 80년대 민주화세력의 반미 민중 민족주의 역시 민족주의적 수사를 차용한다.

신 교수는 “앤더슨, 홉스봄 등 서구학자들이 민족주의는 근대의 발명품이란 걸 밝혀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는 중세 이후 안정된 영토에서 응집력 있는 정치공동체를 유지해왔다는 특수성이 있다”면서 “서구의 민족주의 이론과 맞지 않는 한국사회를 제시하는 것이 학자로서 도전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가 약화됐다고 하지만 ‘붉은악마’ 현상, 촛불시위,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대북·대미관계란 점에서 아직 강력합니다. 특히 저처럼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외국인이 보기에는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는 독특하지요.”

그의 제안은 종족 민족주의를 벗어나자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현대사회의 정치제도로서 폐기의 대상이 아니지만 한 세기 전처럼 폐쇄적 형태로 가서는 안 되고 전지구화나 동아시아주의 등 다른 항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인 신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북한문제 전문가이자 서울과 워싱턴의 정치인들과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다. 이회창 창조한국당 총재,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 김형오 국회의장,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등이 스탠퍼드대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양국 정치인들을 연결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신 교수는 1992~2004년 한·미관계를 분석한 저서를 올해 말쯤 낼 계획이다. 이 저서의 주장은 “과거에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을 주도했는데 지금은 한국도 미국을 보는 렌즈가 있다. 단 한국의 렌즈는 여러 개로 갈라져 있다. 그리고 미국의 렌즈는 너무 흐리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한윤정기자)  

09. 01. 25. 

 

P.S. 미국쪽 한국 학자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민족주의'보다 더 흥미를 끄는 주제는 '근대성' 혹은 '근대화'이다. 신기욱 교수와 마이클 로빈슨 등이 엮은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삼인, 2006)이 그 성과를 묶어낸 책이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라는 부제가 소위 '제3의 시각'을 집약해준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신의 '내면 풍경: 이광수의 <무정>과 근대문학의 기원' 같은 글에 흥미를 느낀다(원문도 복사해놓았지만 아직 들여다보진 못했다). 마이클 신의 연구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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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9-01-25 10:51   좋아요 0 | URL
짐작하신대로 거의 정확하게 서구에서 먹힐만한 방식의 한국 (그리고 특히 북한)과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논의가 진전된 상황에서 신기욱 교수 얘기는 정말 '그저 그렇다'는 느낌입니다. 사회과학 방법론을 사용햇다는게 고작 서베이 몇개 돌리고 통계 자료 몇개 사용한 정도더군요.

로쟈 2009-01-25 13:54   좋아요 0 | URL
사실 논의가 좀더 생산적이려면 민족주의에 대한 비교연구가 좀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듯싶은데, 거기까진 다루지 않나 보군요...

2009-01-26 0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6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1-26 23:39   좋아요 0 | URL
먼댓글로 링크시키라고 하시지만.... 음,그런데 지금 보니 제가 쓰는 블로거는 먼댓글을 지원하지 않는군요... 그냥 두죠 뭐. ^^

로쟈 2009-01-26 23:45   좋아요 0 | URL
제가 '아서 단토의 책 논쟁'(http://blog.aladdin.co.kr/mramor/2144892)에 덧붙여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