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을 해야 한다고 조르는 아이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분위기 그저 그렇고 맛도 별로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온 뒤라, 게다가 속까지 더부룩하여 글을 쓸 만한 기분도 아니지만(이것이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인가!) 생각난 김에 메모 정도는 해놓는다. 예수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게리 윌스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를 지난달에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와 함께 구입해서 조금 읽어본 적이 있다(두 책의 영어본도 같이 구했지만, 지금 찾다가 포기한 탓에 번역본만 갖고 이 메모를 작성한다). 기억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을 읽으면서 참고하려던 것이었고,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을 포함해서 몇 권의 책을 그렇게 뒤적인 듯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원제는 그냥 'What Jesus Meant'이고 이건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의미한 것' 내지는 '예수가 말한 것'이라고 직역될 수 있겠지만, 국역본의 제목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서문보다 먼저 등장하는 '번역에 대하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몇 쪽 분량의 '일러두기'만을 읽었고 그걸로도 책값을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대한 독자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나와는 계산방식이 다르거나 더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읽지 않은 책이지만 성경과 예수에 대한 길잡이로 유익하지 않나 싶다.
'번역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는 건 예수가 사용한 언어와 그 번역 문제다. 성경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자세히 알려고 한 적도 없지만) 초기의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가 완전 저잣거리의 언어여서 전혀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고. 박식한 고전주의자 니체가 이렇게 말해놓았을 정도다. "만약 하나님이 신약성서를 작성했다면, (하나님은) 분명 깜짝 놀랄 만큼 그리스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우아함에 굳이 시련을 부여하여 이처럼 타락한 언어 사용을 선택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은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때문이다. 그가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을 때 피정복 지역의 사람들이 정복자 및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공용 그리스어'였다. 일종의 혼합언어인 이것을 '코이네'라고 부르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을 더 참조하면 이렇다.
BC 4세기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AD 6세기 중엽)까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및 헬레니즘 문명에 동화된 일부 아프리카와 근동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주로 아테네 방언에 바탕을 둔 코이네는 2세기까지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 방언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구약성서>(70인역 그리스어 성서)와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저서는 코이네를 사용하고 있다. 코이네는 근대 그리스어의 토대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미국인은 잘 못 알아듣는 그 '영어'가 일종의 '코이네'이다. 대부분의 혼합언어처럼 이 코이네는 섬세함이 부족하여 기초적인 단어들만 접속사도 없이 길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빌라도 같은 로마인이나 예수와 같은 아람어 설교자들고 그의 제자들이 함께 사용했던 이 기초적인 언어로 씌어졌다."
'아람어'란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역시나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BC 7~6세기에 차츰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근동지방의 링구아 프랑카(국제혼성어)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의 언어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에즈라>는 아람어로 씌어 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유대 율법과 주해를 집대성한 책)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가 사용한 이 아람어가 히브리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못 들어본 말은 아니다.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배우들이 사용한 말이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고대 아람어'는 어떻게 재구해낸 것일까? 우리는 삼국시대의 한국어를 모르지 않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그래서 아람어의 그리스어(코이네) 번역이다. 그리고 그 점이 바울의 언어와 예수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특이한 그리스어라고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반면에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니체주의자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는 이 바울의 언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바울의 그리스어는 학파 또는 그 어떤 모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없으며, 그의 내적인 마음 상태에서 어색하지만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언어처럼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남겨진 시간>, 15쪽)
강조한 대목은 오역이다. 어순을 약간 조정하여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예수의 언어처럼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맞다(원문은 "his Greek is not translated Aramaic (as are the sayings of Jesus)"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그 그리스어로 번역된 아람어로 어떻게 말했나?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What to me and to you, woman)?'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나오는 문장인데, 내가 갖고 있는 개역한글판으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나이까"이고 병기된 NIV판 영역으로는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이다. 우리말 번역보다는 영어 번역에서 차이가 더 도드라지는데,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와 비교하면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은 흡사 콩글리쉬 아닌가?
게리 윌스는 여러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누가복음 2장 49절은 또 어떤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I must be at my father's)?"가 직역이고, 개역한글판과 영어판으로는 각각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와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로 옮겨졌다. 여기서도 "I must be at my father's?"와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간의 차이를 음미해보는 것이 좋겠다. 윌스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의 무엇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주석자들이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이 이런 식으로 투박하고 모호하여 성서 번역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그리스어(코이네) 문장들을 정확하게 옮기기보다는 우아하게 옮기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대목의 우리말 번역은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의 투박함이 많이 제거돼 있다. 실상은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니었을까? "야야, 그게 니랑 나랑한테 뭐시간디?").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영어 번역들은 신약성서의 '결점들'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문법을 보강하고, 시제를 보다 일정하게 맞추었으며 반복어구를 잘라냈다." 그리하여 공손한 고어체로 이루어진 품위 있는 성서를 만들어냈다(흠, <바이블 키워드>와 <아시모프의 바이블>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이 '킹 제임스' 번역본이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진짜' 성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은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만약 새로운 번역이 원전의 효과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면 품위가 없어야 한다. 복음서의 언어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언어는 언어학적 세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칠게 다듬어진 위엄이다."(10쪽) 그래야지만 "하층민 남자로서 노동자 출신인 자신의 제자들과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윌스는 말한다.
그런 성서를 사실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예수 또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대신 우리 곁에 있는 건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와 '추락하는 한국교회'다). 마치 '예수 메시아'란 뜻의 '예수 크리스토스'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고 음역함으로써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메시아'를 배제하고 유예시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닌지('메시아' 대신에 우리가 갖게 된 것이 반항적 록정신을 상실한 '거세당한 슈퍼스타'이다. '한국형 슈퍼스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서문은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몇 가지 행적만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Jesus Do)?" 운동의 허상을 폭로한다(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리하면 이렇다. 과연 사람들은 예수처럼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한다거나(마태8:22) 부모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마태8:22, 누가14:26) 혹은 자신들이 일궈낸 성공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는 교외의 부자 교회를 찾아가(혹은 소망교회를 찾아가) 헌금접시를 들고 있는 사람을 채찍으로 내리치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 2:16)라고 하거나 "강도들의 소굴"(마가11:17)이라고 고함칠 수 있을까?
또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23:27)고 외치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 10:34)고 하거나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려고 왔다"(누가12:49)고 한다면, 그런 예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예수가 했던 바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축복과 은총을 받아서) 기름이 번지르한 윤택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왜 나입니까?'라고 반문하며 고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건 사실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마리아의 성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들 중에서, 마리아를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작품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한 게리 윌스의 말에, 나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그가 사례로 제시한 건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그림이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옮겨놓는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대경실색한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궁금히 여겼다."(누가1:29) NIV판으로는 "Mary was greatly troubled at his words and wondered what kind of greeting this might be." 인류의 역사가 그 수태로 인하여 좀 바뀌었다면 그 기원적 정념이 놀람이고 공포였다는 점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기쁨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래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나는, 성탄절을 보내며, 생각한다...
08. 12. 25.
P.S. 예전 같으면 눈길도 가지 않을 책들인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관심분야가 더 넓어졌다. '성경과 기독교'란 주제와 관련하여 더 읽어볼 만한 책은 바트 에르만(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 등의 책이다. 저자는 신약학의 권위자라고 하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 가운데서도 관심이 가는 타이틀이 많다.
<예수>를 비롯해서 <신약>, <신의 문제> 등이 그런 타이틀이고 내년봄 출간 예정인 그의 최신작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러셀도 같은 제목의 책을 쓴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