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언론리뷰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책이 있다. '유럽 시민발의 및 국민투표연구소(IRI)'란 곳에서 펴낸 직접민주주의 가이드북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8)도 그런 책의 하나다. 사실 한국식 대의민주주의가 저절로 잘 돼갈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요즘 아닌가. 해서 국민(인민) 주권은 이제 국민들 스스로가 챙기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우리의 생선은 우리가 지키자!). 책은 직접민주주의 노하우와 실제를 여러 사례를 통해 소개하고 있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직접민주주의의 '레시피'로서 유용해보인다. 더이상 권리를 도둑 맞기 전에 각자가 주권자의 위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노력으로 부족하면 분투를!..

국제신문(08. 12. 20) 'By the people(국민에 의한)' 궁극의 민주정치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로 또다시 국회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여당이 단독으로 한미 FTA 비준안을 상정하기 위해 회의장을 봉쇄하자 야당 당직자들이 해머를 들고 출입문 바리케이드를 부수었고 이들을 막는 소화기까지 등장했다.

국민 선거로 선출된 거대 여당의 과두정치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무관심이다. 사람들은 '난투극'이라는 현상만을 보며 정치를 더 혐오할 것이며 선거 투표율은 또다시 바닥을 길 것이다.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민의의 대표성을 상실하고 다시 소수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간접민주주의의 악순환인 셈이다.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는 이러한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을 강화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막가는 정치에 눈을 닫고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감시하고 행동함으로써 이들을 견제하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이처럼 책은 정치의 '퍼블릭 액세스' 시대를 어떻게 열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북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인 부르노 카우프만, 롤프 뷔치, 나드야 브라운 등은 유럽 최초의 현대 직접민주주의 싱크탱크인 '유럽 시민발의 및 국민투표연구소(IRI)' 소속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스위스에 돋보기를 갖다댄다.

'취리히시의 거주자이자 유권자로서 아스트리드는 1년 동안 6번의 선거와 30번의 국민투표에 참가한다. 5월 어느 일요일. 그는 연방정부 관련 9개, 주정부 관련 1개, 지방정부 관련 2개의 사안에 대해 투표를 했다. 또 당직자 선출을 위한 투표가 있었다. 투표자들이 너무 많은 사안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라고 언론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유권자의 능력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론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그건 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치라며.'
한 국민의 사례는 스위스 직접민주주의의 현재를 집약한다. 스위스에서는 법안을 시민이 발의, 투표를 통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헌법 관련, 주정부에서는 각종 법안과 연관된 시민발의가 제기된다. 유권자 10만 명 이상이 서명을 하면 연방헌법의 개정을 요구할 수 있고, 연방의회가 이를 거부해도 제안자들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는 한 발의된 개정안은 국민투표에 붙여진다. 이렇게 스위스 국민들은 적정한 집세, 적절한 건강보험료, 연 4일 차 없는 날, 장애인에 대한 동등한 권리 보장, 핵발전 반대 등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베른주에서 독립해 스위스 연방의 26번째 주가 된 주라의 분리 과정은 직접민주주의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다. 1815년 불어권 가톨릭계인 주라가 독일어권 개신교계인 베른주에 통합되면서 분쟁은 시작됐다. 소수집단이 된 주라가 끊임없이 분리를 요구했고 2차 대전 이후 주라의 분리주의 운동은 본격화된다. 1957년 주라 민회가 분리 사안을 놓고 시민발의를 했고 결국 1975년 주민 투표로 새로운 주 창설이 결정됐다. 이를 두고 저자는 "민족주의에 대한 민주적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책의 2부에서는 ▷스위스 시민발의와 국민투표의 통계자료 및 사례 ▷스위스 직접민주주의 운영 절차와 과정 소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각종 제안과 지침 ▷전 세계 직접민주주의 현황 등을 30개 주제로 나눠 도표와 그래프를 곁들여 설명, 독자의 쉬운 이해를 돕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국민투표, 주민발의, 주민감사청구제, 주민투표, 주민소송, 주민소환이라는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럽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고대 그리스 이후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는 최근 직접민주주의의 역동성과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역자인 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교수이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장은 서문에서 올해 5월 스위스 소도시 레인펠덴의 주민들이 음악교육을 헌법조항에 넣기 위해 시민발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런 움직임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스위스 국민들은 모두 비상근정치인이며 직접민주주의는 현지 선거 관계자의 표현대로 대의제라는 자동차에 달린 브레이크이자 액셀러레이터이다.'(이선정기자)
08. 12. 20.



P.S. 작년에 나온 책 <직접행동>(교양인, 2007)과 올해 나온 책 <절반의 인민주권>(후마니타스, 2008)도 같이 손에 들어봄 직하다. 내가 이 두 책보다 먼저 집어든 건 재작년에 나온 벤자민 바버의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일신사, 2006)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