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개봉예정작에는 이미 '걸작'이란 소문이 파다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가 포함돼 있다. 명불허전이므로 간단한 소개 기사들만을 챙겨둔다(개인적으론 러시아 마피아를 소재로 한 영화여서 더 기대가 크다). 그럼에도 기사는 꼼꼼히 읽지 마시길...  

 

한겨레(08. 12. 08) 비극은 한 권의 일기서 시작됐지

‘냉혹함’과 ‘포근함’은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조산실의 풍경과 사내들이 서로의 목을 향해 칼질을 서슴지 않는 ‘조직’의 세계는 좀처럼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스파이더>(2002)와 <폭력의 역사>(2005)에서 기묘한 느낌의 세계를 구축해 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나타나는 풍경들을 서늘하게 그린다.

런던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조산사 안나(나오미 와츠)는 ‘타티아나’란 이름의 열네 살짜리 그루지야 소녀가 낳은 아기를 받아 낸다. 숨진 소녀와 살아난 아기. 안나는 아기의 연고를 찾기 위해 소녀의 일기장에 꽂힌 명함 주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인자해 보이는 노인 세미온(이민 뮬러-스탈)이 안나를 맞는다. 세미온은 겉으로는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신사지만, 실제로는 동유럽에 근거를 둔 런던 최대 범죄 조직 ‘보리 V 자콘’의 두목이다. 세미온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안나는 조직의 운전수 니콜라이(비고 모텐슨)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안나는 러시아어로 써진 소녀의 일기를 읽을 수 없다. 세미온은 안나에게 “일기를 번역해 주겠다”고 말하고, 안나는 그에게 일기 사본을 넘긴다. 일기에는 안나가 모르는 뜻밖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세미온의 세계’는 ‘안나의 세계’에 개입한다.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당신이 있을 곳은 저기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저 같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셔야 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비정한 조직은 니콜라이를 세미온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 대신 사지에 내몬다. 사우나실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두 괴한의 침입을 받은 니콜라이가 보여주는 절박한 폭력의 몸짓은 영화의 ‘백미’라 꼽을 만하다. 싸늘한 주검이 된 타티아나가 그랬듯 니콜라이도, 세미온도 한때는 ‘포근함’의 세계에 속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11일 개봉.(길윤형 기자)

필름2.0(08. 12. 05) 크로넨버그의 새로운 경지

한 가족사를 통해 폭력의 생태를 짚어나가는 <이스턴 프라미스>는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크로넨버그가 다시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음을 증명하는 걸작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런던. 평범한 외관의 이발소와 약국에서 뜻밖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중년 남자가 이발하는 도중 청년에게 살해당하고 약국을 찾은 임신 중인 소녀는 하혈을 하며 기절한다. 소녀는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아이를 낳고 죽는다. 유품인 일기장에서 소녀의 이름이 ‘타티아나’임을 알게 된 간호사 안나(나오미 왓츠)는 러시아어로 쓰인 수첩 내용을 번역해 아기의 연고지를 찾기로 한다. 안나는 수첩에서 발견한 명함의 식당인 ‘트랜스 시베리아’를 찾아간다. 새미온(아민 뮬러-스탈)이라는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이곳에서 안나는 새미온 가족의 운전수로 일하는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를 만난다. 하지만 안나는 곧 식당이 러시아 마피아의 유럽 본거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니콜라이는 위험에 처한 안나와 아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주제와 형식면에서 <폭력의 역사>(2005)와 연작으로 묶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일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 2부작’이라 불리는 두 영화는 모두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크로넨버그가 그리는 폭력은 여타 영화들이 폭력을 이야기하고 사용하는 방식과 사뭇 다르다. 그의 폭력은 특정한 공간, 주체, 이유, 대상을 갖지 않는다. 폭력이 존재하는 곳은 어두운 뒷골목이 아니라 대낮의 식당 혹은 이발소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고 폭력을 행하는 이는 익명성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에서 우위를 점하는 폭력은 그 자체가 존재 이유다. 그런 폭력으로부터는 보통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다. 즉 크로넨버그가 영화에서 그리는 폭력은 평범한 인간과 일상에 기생하는 종류의 것이다. 때문에 쉽사리 발견되지 않고, 은밀하기에 깊고 단단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폭력이 인간 본연의 선처럼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로넨버그가 영화에 담는 것은 바로 이런 폭력의 절대성이다. <폭력의 역사>는 가족 드라마를 내세워 일상에 잠복한 폭력의 속성을 정교하게 그린 수작이었다. 마찬가지로 한 가족사를 통해 폭력의 생태를 짚어나가는 <이스턴 프라미스>는 끊임없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크로넨버그가 다시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음을 증명하는 걸작이다.

온화한 인상의 식당주인 새미온은 사실 런던 최대 범죄 조직인 러시아 마피아단 ‘보리 V 자콘’의 보스다. 그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은 조직의 2인자로서 이발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청부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운전수인 니콜라이는 조직의 해결사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가 두려운 것은 단순히 마피아여서가 아니다. 이들의 악행이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범죄세계와 무관한 안나는 연고가 없는 어린 산모가 남긴 아이 때문에 마피아 조직의 타깃이 된다. <폭력의 역사>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 벌어진 사건이 평온한 가정과 마을을 피로 물들였듯이 안나의 일상에도 폭력의 공포가 스며든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역사>가 톰(비고 모텐슨)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마을 전체에 피어오르던 폭력의 기운을 담았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실체를 좀 더 구체화, 형상화해 보여준다. 건실한 가장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폭력은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갱들의 몸을 빌려 표현된다. 검은 정장과 선글라스의 남자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폭력의 잔혹함을 예감케 한다. 그만큼 폭력의 묘사 역시 직접적이다. 아이들의 교내 싸움, 부부간의 섹스 등을 통해 일상에 도사리는 폭력성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던 <폭력의 역사>와 달리 영화는 첫 장면부터 폭력의 섬뜩한 실체를 보여준다.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이발소에서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유쾌한 농담을 건네던 남자의 목을 칼로 가른다. 벌어진 살 틈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이 장면은 사실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폭력을 그리는 크로넨버그의 수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단연 중반부 사우나 격투 신. 니콜라이가 두 명의 킬러와 맨몸으로 싸우는 이 장면은 영화가 구사할 수 있는 폭력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오감이 압도되는 이 장면에서는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쾌감조차 느끼기 힘들다.

크로넨버그가 우리가 몰랐던 일상의 이면이 드러나는 무대로 범죄 도시의 이미지가 희미한 런던을 택한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이곳에서 크로넨버그는 구원도 희망도 찾아보기 힘든 세계를 구축한다.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냉기 어린 고요가 흐르는 런던의 풍경을 잡아내기 위해서 제작진은 런던의 뒷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장소 헌팅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러시아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만큼 다문화적 특성이 드러난 곳이어야 했다. 고심 끝에 낙찰된 장소는 킬번, 그린위치, 해크니, 할레스덴 등 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런던의 변두리다.

일상의 한복판에 던져진 폭력의 양상을 탐색하는 크로넨버그는 또 다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나?’로 시작된 질문은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르러 ‘구원은 있나?’로 확장된다. 크로넨버그는 이례적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는 남겨놓는다. 아이와 후반부의 반전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바라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에도 이 질문에 답하기란 힘들다.

영화가 담은 폭력의 속성은 결국 변하지 않을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아이라는 명백한 구원의 요소가 일종의 연민 어린 판타지로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폭력을 통해 마침내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관통한 <이스턴 프라미스>는 크로넨버그의 경이적인 성취를 보여주는 영화다.

문신으로 새겨 넣은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 속 문신은 힘의 과시라기보다 개인의 정체성, 역사와 맞닿아 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수감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심지어 그 사람의 성적 취향까지도 드러낸다. 비고 모텐슨의 등과 손목, 발목, 손가락에까지 새겨진 문신은 총 43개. 옥스퍼드 문신 박물관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약 4시간 동안 작업한 결과다. 호랑이, 별, 아기와 함께 있는 성모마리아, 십자가, 바벨탑, 예수, 벌거벗은 천사, 나뭇가지, 단추, 까마귀, 약탈자, 스콜피온, 단검, 문장 등 다양한 종류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문신들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는데 대표적인 문신의 뜻을 살펴본다.

발목 수갑 문신 수용자들이 자신의 발목을 그어버리던 베드로 시대의 오마주

가슴의 십자가 종교적 의미가 아닌 모범이 될 만한 도둑이라는 의미를 내포

세 개의 둥근 지붕 모양 교회 3개의 다른 감옥을 의미

무릎의 별 문양 실제 마피아 집단인 보리의 영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직 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함

08. 12. 07.

P.S. 최근 데이비드 린치의 책도 출간된 김에, 이 '또 다른 데이비드'의 책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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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7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8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0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노골적인 영화였어요.
특히 아민뮬러스탈의 이중적인 모습은 뮤직박스 이후 두번째 만났습니다.

로쟈 2008-12-08 21:26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가 됩니다...

드팀전 2008-12-0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작이지요. 비고 모텐슨은 정말 러시아사람처럼 영어를 하던데. <씨네21><필름2.0>이 '배트맨' 이후 집중적으로 좋아라하고 있습니다.ㅋㅋ

로쟈 2008-12-08 21:26   좋아요 0 | URL
네 걸작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수유 2008-12-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연말이 되니 좋은 영화들이 한두편 들어오나요, 수첩에 적어야겠습니다!!

로쟈 2008-12-08 21:26   좋아요 0 | URL
볼 만한 영화들은 많은 듯싶어요...

하이드 2008-12-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등의 해골은 살인자,
팔에 호랑이 문신은 행동대장.

무삭제로 나온다고 얘기 들었는데, 그렇다면 정말 ㄷㄷㄷ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이라고 해서 괴영화를 예상했는데,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여서, 더 오래오래 남을듯합니다.

로쟈 2008-12-08 21:27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취향이시죠?^^

2008-12-09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9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8-12-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많은 매서운 눈들이 있어서 전 이제 영화에 대해 모라고 말을 하기가 겁납니다^^

로쟈 2008-12-09 14:05   좋아요 0 | URL
영화평론도 사양업종이라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