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명박 정부의 국정수행을 지지한다는 십 몇 퍼센트의 MB마니아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현시국은 한심하거나 더러운 세상이다. 개인사로도 다들 바쁜 와중에 나라 걱정까지 하려니 없던 지병까지도 생기겠다(얼마전부터 나는 음식물을 삼키는 일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시국의 '최전선'에 있는 시사주간지 두 편집장의 권두언을 나란히 읽게 됐다. '수'가 없으면 '법'이라도 필요한지라 챙겨놓는다.
한겨레21(06. 07. 21)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나는 시를 짓겠어요.”
허난설헌이 말한다. 여인이라 천대받고 가난한 여인은 더 천대받는 세상.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기방에 빠진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모진 시집살이 속에 두 아이마저 잃은 그는 스물일곱 연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문집은 명나라와 일본에서까지 이름을 얻었다.
“나는 칼을 들겠소.”
홍경래가 말한다. 출신에 따라 입신 길이 열리고 닫히는 세상.
“당일 (과거시험)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을 각제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홍경래전>)
난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창고를 열어 백성의 배고픔을 달래며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으나, 정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관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2천 명을 죽였다.
“나는 책을 읽으며 농사를 짓겠네.”
성호 이익이 말한다. 이해관계에 얽매여 파당을 짓고 돈과 힘을 차지한 쪽이 상대방을 찍어내는 세상.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당쟁에 휘말려 부친이 숨지고 형마저 극형을 당한 뒤 시골로 내려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빈궁하게 살았으나, 그의 철학은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다”는 정약용의 상찬처럼 조선 후기를 빛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이번호 기사들을 읽으면서 혹 더러운 세상에 탄식하고 정신의 이물감에 잠 못 이룰 독자들을 위해, 바르지 못한 시대에 처해 선현들이 짚어간 길 몇 가지를 소개했다. 저마다 풍진 세상을 만났으나 마음만은 더럽히지 않고 의기를 꺾지 않았으니, 연꽃같이 피어난 시심은 거룩하고 의분 담긴 칼끝은 서늘하며 호미로 새긴 논지는 길이 빛날밖에.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더 가혹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걸출한 인물이었을 게다. 참신한 21세기의 상상력으로 각자 처지에 맞는 대처법을 궁리해보시길. 이름하여,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근까지 <한겨레21>에 연재된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이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한겨레출판)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칼럼의 인용 부분은 모두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다.(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시사IN(08. 06. 30) 이명박 정부에서의 절망 탈출법
참 오랜만에 ‘구악’이라는 말을 다시 여러 군데에서 듣게 된다. 구악이란 군부독재 시절부터 철저하게 권력과 사주의 편에 서서 곡필을 휘둘러온 퇴물 기자를 가리키는 말로, 일종의 언론계 전문 용어다. 촌지와 향응 문화 속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양지만 골라 다녔지만 민주화와 함께 서리를 맞아 역사에서 퇴장하는가 싶었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언론계 기관장 자리를 노리고 떼를 지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경탄할 만한 탐욕을 가졌다.
기자 시절 이런 구악을 상사로 모시게 되면 지옥을 맛본다. 전 직장에서도 언론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 사람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제정신을 갖고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는 지시만 할 줄 알지 소통이란 걸 몰랐다. 언론도 기업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으려면 권력이나 대기업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지치지도 않고 주절거렸다. 기자들이 항의하면 그는 마지못해 사과하는 척했다가 급한 소나기만 피하고 나면 어느새 시치미 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와 일하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고 나름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 도가 수행자가 한다는 유체이탈도 자주 써먹었다.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해 회의실 천장을 날아다니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회의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와 울분이 가라앉곤 했다. 그와 지낸 몇 년 동안 유체이탈 분야에서 상당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불행에서 벗어날까 책도 많이 뒤져봤는데 소득은 별로 없었다. 과학자들이 제시한, 절망에서 놓여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창의력을 발휘하라든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는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 시간이 갈수록 극도의 분노와 절망을 표출하는 이들이 자꾸 늘어만 간다. 얘기를 들어보면 구악과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증상과 비슷하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위장 반성했다고 분노하고, 그리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시도하는 걸 보며 절망한다. 이제 100일밖에 안 지났는데 남은 4년 몇 개월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고 하소연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 밑에서 유체이탈을 해 ‘명박산성’ 뒤에 웅크린 대통령의 초라한 모습을 지켜본다면 위안이 되려나. 매일 밤 창의력을 발휘해 공권력을 희롱하고 경찰버스를 끌어내느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걸 보면 시위대는 이미 절망 탈출법을 체득한 것 같기도 하다.(문정우 편집국장)
08. 07. 22.
P.S. '명박산성'이 위키백과에도 등재돼 있다(http://ko.wikipedia.org/wiki/%EB%AA%85%EB%B0%95%EC%82%B0%EC%84%B1). '이견'이 제기되어 '삭제 토론'중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누리꾼들의 이런 수고가 요즘은 '절망' 속에서도 사는 재미를 잠시나마 느끼게 해주는군. 몇 군데 둘러보다가 찾은 오늘의 굿뉴스와 배드뉴스. 나쁜 쪽은 너무 많아서 꼽을 수도 없다. 단적으로, 외국인들이 31일째 주식을 매도하고 있다는 소식(http://news.hankooki.com/lpage/economy/200807/h2008072202484984010.htm). "지금까지는 미국경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신용경색)로 인해 외국인들이 주식을 팔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이젠 한국경제(경기침체+기업실적악화)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도 별로 전망이 없다는 걸 그들은 아는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좋은 소식이란 '정치인DB'가 구축될 예정이라는 것(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220023375&code=940401). "의정활동 내용과 이력, 발언 등을 기록한 정치인 온라인 이력 시스템을 만드는 시도다. 촛불정국에서 드러난 정치권의 무능력에 실망한 대학생들이 네티즌 손으로 직접 정치인 자료를 축적하고 평가할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당장 다음 선거에서부터라도 활용된다면 좋겠다. 국민들의 '닭짓'을 중단시켜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