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을 읽다가 이탈리아의 사상가 잠바티스타 비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사이드와 비코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19521 참조). 그래서 그의 <새로운 학문>(1744)을 비롯한 몇몇 관련서를 독서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관련자료를 잠시 검색해보다가 기사 하나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역사학자 조한욱 교수가 쓴 비코 학회 참관기이다.
한겨레(05. 11. 25) 여기는 나폴리 역사학 주춧돌 앞에 서다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는 서양 역사학의 기틀을 세운 이탈리아 학자다. 서구는 물론 중국·일본의 학계에서는 그를 인문학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사상이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의식에 두루 영감을 줬다고 평가한다. 반면 한국에서 그 이름은 너무도 낯설다. 비코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국 인문학의 바탕이 넓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지난 10일부터 사흘간(현지시각) 나폴리에서 ‘잠바티스타 비코: 중국,일본,한국’을 주제로 열린 국제 학술대회 참관기다. 그의 글이 비코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마르코 폴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 곳곳에서 방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마르코 폴로는 동서 교류의 문을 연 사람이니, 동서 문화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전체 학술대회의 초점이 맞춰졌다. 이탈리아의 동양학자와 이탈리아를 연구하는 동양의 학자들이 모일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나폴리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는 철학자 비코에 초점을 맞췄고, 나는 여기에 초청받았다.
비코가 누구이기에 이탈리아의 거국적인 행사에 그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가 포함되었을까? 비코는 보통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수학적 지식만이 진리의 근거라고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인간 사회와 인간의 역사가 연구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설파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존립 근거를 확인해준 것이다. 그는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그 시대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찾았다. 원시시대에는 신화와 민담과 같은 것이 사람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한때는 무시당했던 그런 자료가 그 시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입구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코에게서는 ‘언어적 전환’, ‘담론 분석’, ‘상징적 해석’ 등등 현금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류를 이루는 방법론의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 헤이든 화이트, 게오르그 가다머,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인물들이 비코를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데카르트 과학적 방법론과 대적
열성가들의 간헐적이고 고립적인 노력으로 간간히 빛을 보던 비코는 1968년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뉴욕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어떤 한 사상가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로서는 최대 규모였던 이 심포지엄의 논문집은 1970년과 1973년 사이에 거의 90개에 달하는 학술 잡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국과 나폴리의 비코 학회 주관으로 비코에 대한 학술대회가 거의 매년 열려 국제적인 학문 교류의 가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이번 학술대회는 올해가 갖는 의미를 고려하여 특히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 아래 거국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11월10일 오후부터 본격적인 발표와 토론이 시작됐다. 첫번째 주제는 ‘비코의 동양’이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은 장롱시 홍콩 성시대학 교수의 발표였다. 비교문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장롱시는 비코가 동서의 교차 이해에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비코의 원리야말로 다른 문화에 대한 미적인 감수성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서 문화의 융합에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11월11일 오전에 두번째 주제인 ‘동양의 비코 연구’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우에무라 타다오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는 비코의 <이탈리아인 태고의 지혜>를 번역한 노학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소렐과 크로체를 통해 비코를 알게 되고 마침내 후설의 안내로 비코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는지 감명 깊은 여정을 술회했다. 마리오 사바티니 베네치아대학 교수의 ‘주광키안과 비코’가 이어졌다. 주광키안은 <새로운 학문>을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사바티니 교수는 본디 미학 교수였던 주광키안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며, 니체와 크로체와 마르크스를 거쳐 마침내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서 학문과 예술에 합당한 전망을 찾게 된 과정을 상술했다.
다음으로 나의 발표가 있었다. 한국에서 비코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뤄져왔다고 밝히며 이종흡 경남대 교수의 책 <마술, 과학, 인문학>과 나의 학위 논문 <미슐레의 비코를 위하여>의 내용을 소개했고, 앞으로 비코 연구가 발전하기 위해 관심 있는 학자들의 연대가 필요하고, 원전으로부터 옮긴 비코 저서의 충실한 번역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후에 세번째 주제인 ‘비코의 테마에 따른 동양과 서양’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주로 언어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상형문자를 사용하는 중국어가 상징적으로 갖는 의미에 초점이 맞춰졌다. 가장 뛰어난 것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모라비아 대학교 정화열 교수의 ‘비코와 중국어원학 재검토’였다. 사정상 불참하여 다른 사람이 대독한 논문에서 그는 중국어를 분석하며 그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된 기호임을 증명했다. 몸과 관련된 언어란 모든 인류에게 공통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는 언어다. 이러한 ‘문자 이전의 언어’를 통해 인류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비코야말로 자신의 시대를 훨씬 뛰어넘은 사상가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정 교수의 역량을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영감의 원천
마지막 날, 장소는 나폴리 동양대학교로 옮겨 속개됐다. 전날 오후의 주제가 오늘은 역사, 인류학, 종교의 분야로 이어졌다. 이 학술대회 전체를 조직했던 다비드 아르만도 이탈리아 학술원 연구원이 동양과 서양의 봉건제도의 차이에 대해 발표한 뒤, ‘비코 시대 유럽 문화에 비쳐진 동양인의 성격’, ‘비코와 보쉬에에게서 보이는 유교’, ‘잠바티스타 비코와 노리나가 모토오리’와 같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발표가 이탈리아 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발표 뒤 곧바로 비코를 동양어로 번역하는 문제에 대한 원탁토론이 벌어졌다. 비코를 직접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한 학자들이 체험담을 이야기했고, 나는 앞으로 비코를 원전으로부터 번역할 때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번역에 개재된 일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관중석과 질의응답이 있은 뒤 학술대회는 막을 내렸다.
학술대회는 낮에만 열린 것이 아니었다. 밤마다 만찬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많은 외국의 학자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탈리아 철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학자인 피에르 지라르는 나의 발표에서 미슐레가 나오는 바람에 놀랐다고 말하며, 내가 인용했던 프랑스의 비코 학자 알렝 퐁스가 자신의 친구라고 한다. 가오이 베이징 대학교수와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모더니즘을 산업화와 동일시했다. 그 정의가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미적 모더니즘과 같은 것은 사소하다”고 말함으로써 산업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중국의 절박함 또는 부박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어쨌든 한국과 중국의 프랑스사 전문가들이 함께 만날 기회를 마련해보자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키마에 도시야키 오사카대 교수와도 친해져, 내년 3월 오사카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초청하겠다고 꼭 참석하여 달란다.
가장 친밀감을 느낀 인물은 가장 말이 통하지 않았던 우에무라였다. 작년에 뇌에 문제가 있어 거의 사경에 이르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그는 건강 때문에 부인이 동반했다. 부인은 젠더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우에무라는 내가 번역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한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학문적 문제에 있어 나는 그와 공감하는 점이 많았고, 그의 삶의 태도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중·일 학자 번역문제 공감
학술대회 틈틈이 크로체와 비코의 생가를 찾았다. 지금은 인문학 연구소로 쓰이는 크로체의 방대한 저택과 달리 비코의 집은 시장 속 좁은 길에 있었다. 50여 년 전 로버트 카포니리는 비코의 역사 이론을 다룬 저서에서 비코가 자라난 나폴리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폴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분주한 삶이 좁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들끓듯 소란스럽게 펼쳐진다. 낡은 성문 앞에서 행상인들은 팔 물건을 소리치고, 등뼈가 부러질 정도로 짐을 실은 당나귀들은 그에 못지않게 많은 짐을 진 사람들과 갈 길을 다툰다. 탑의 그늘에는 불쌍한 중생이 앉아 신과 행인에게 탄원과 구걸의 목청을 높인다.” 지금도 그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당나귀 대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 나폴리에서 비코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비코는 자신에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 신이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학문>을 쓰도록 만들어준 기회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비코는 좁고 붐비는 시장 길에서도 방문객들에게 조금의 불편도 끼치지 않도록 관대하게 배려하는 나폴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로 세계의 학자들을 불러 모은 나폴리 학자들의 애정 속에 살아 있었다.(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
08. 06. 15.
P.S. 비코 관련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중역본 <새로운 학문>(동문선, 1997) 외에, 비코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한 박홍규 교수의 <처음으로 돌아가라>(필맥, 2005),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종흡 교수의 <마술 과학 인문학>(지영사, 1999), 그리고 이사야 벌린의 <비코와 헤르더>(민음사, 1997) 등이 내가 떠올려볼 수 있는 책들이다. 참고로, ‘비코의 동양’이라는 발표를 했다는 장롱시 홍콩 성시대학 교수는 내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 책 <도와 로고스>(강, 1997)의 저자인 듯싶다.
기사에 따라 비코 사상의 의의를 압축하면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수학적 지식만이 진리의 근거라고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인간 사회와 인간의 역사가 연구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설파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존립 근거를 확인해준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사이드가 <저항의 인문학>에서 짚어주고 있는 요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을 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데카르트 학파의 명제, 즉 명백하고 분명한 관념들이 있을 수 있고, 이 관념들을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실제 정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명제를 논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코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개개인의 인문학자와 역사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31쪽)
때문에 "인문주의적 지식과 실천으로부터 중립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을 도출하는 일은 무익"하다. 여기서 '데카르트 vs 비코'라는 구도는 '수학 vs 역사학', '철학 vs 문헌학'으로 변주될 수도 있겠다(지젝이라면 '관념론 vs 유물론'이라고 불렀겠다). 아무튼 현재의 '인문학의 위기'와도 관련하여 '데카르트적 학문'과는 다른 '비코적 학문'에 대해서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