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이번주 <씨네21>을 읽었다. 가판에서 '코언 형제에게 찬사를!'이란 문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언 형제(내겐 '코엔 형제'가 더 익숙한다)는 곧 개봉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언 형제이다. 더불어 홍상수의 신작 <밤과 낮>에 대한 기사도 들어 있었으니 손이 안 갈 수 없었다(그리고 든 생각. 좋은 영화들이 나와야 영화잡지도 때깔이 난다!). 기억엔 작년인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칸느영화제에 출품됐었는데 나는 그때서야 코맥 매카시란 생소한 거장이 원작자란 걸 알게 됐고 그의 책 몇 권에 대한 판권을 간접적으로 문의한 바 있었다. 그때 이미 국내의 한 무명 출판사로 넘어갔다고 전해 들었는데, 최근에 나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사피엔스21, 2008)를 보니 그게 '사피엔스21'이었던 모양이다(특이하게도 주로 입시문제집들을 내는 곳이다. <크리티카> 같은 무크 비평지와 함께). 올해 들어 가장 기대할 만한 원작과 영화에 대한 소개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매거진t(08. 02. 18) [이다혜의 BOOK]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그는 어떤 사람이오, 궁극의 악당?
그런 식으로 부를 사람은 아니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부르겠소.
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이지.
그건 범죄가 아닌데.
요점은 그게 아냐. 하나 말해 줄까.
말해 보쇼.
자넨 그와 거래를 할 수 없어. 다시 말하지. 설령 자네가 그에게 돈을 돌려준다 해도 그는 자넬 죽일 거야. 그와 얽혀들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으니까. 다 죽었지. 살 확률이 거의 없어. 아주 특이한 인간이거든. 원칙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돈이든 마약이든 뭐든 그런 것 따위를 다 초월하는 원칙.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줄거리는 이렇다. 모스는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만이 남아 있는 사막의 살육 현장에서 거액이 담긴 돈가방을 발견해 집으로 가져온다. 그 가방을 발견한 순간부터 모스는, 이 일의 끝이 단 하나 뿐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모스는 시거라는 추격자에게 쫓기며 도주를 시작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보안관 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음울하게 바라본다.

3. 코맥 맥카시는 서부의 작가다. 현대 서부, 멕시코와의 국경 지대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방식이 그의 책에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외에 <피의 자오선>을 관통해 국경 삼부작을 지나 <길>에 이르는 그의 서부에는 처연함만이 핏빛으로 빛난다. 소년들은 길 위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맞는다. 간결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암시하는 문장들은 책을 덮고 난 뒤 오랫동안, 입 속에서 모래의 칼칼함을, 뜨겁고 건조한 대기의 텁텁함을 느끼게 만든다.

4.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잘해봐야 본전이다(라고 쓰고 멍청한 짓이다, 라고 읽는다). 코엔 형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영화화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 그랬다. 당시 나는 맥카시의 소설 5권을 한 달 내내 연달아 읽은 직후였고, 눈만 감으면 소설 속 장면이 꿈 특유의 과장된 필터를 거쳐 꿈으로 형상화되곤 했다. 아무래도 코엔 형제와 맥카시의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미친 게 <분노의 저격자>였다. 영화는 책을 그대로 한 땀 한 땀 옮기듯 만들어졌고(몇 부분은 생략되었지만 이 정도면 고스란히 옮겼다는 말에 준한다), 영화는 책과 또 다른 방식으로 살육의 시를, 처연한 묵시록을 써내려갔다.

5. 한동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소설을 읽는 이유, 영화를 보는 이유가 이 한 작품의 소설 원작과 영화 버전으로 수렴되었다. 만일 책을 다 읽고도 영화를 다 보고도 이게 그저 서부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6. 이 나라는 사람들에게 관대하질 않아. 하지만 끝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도 없는 것 같아. 참 묘한 일이지. 끝까지 추궁을 안 하니 말야. 이 하나의 가족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봐. 내가 아직 여기서 무슨 영화를 보려고 얼쩡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어. 다들 젊었었지. 그 중 반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몰라. 여기에 뭐 좋은 점이 있을까? 그래서 내가 한 번 생각해 봤지.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나라에는 해결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못 느끼게 됐을까? 그런 걸 느끼질 못하지. 나라는 그저 나라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296~297)

필름2.0(08. 02. 14) 진정한 웰메이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이상한 학살 현장을 발견한다. 시체들이 널려 있고, 망가진 트럭 뒤엔 마약 더미가 가득하다. 또 다른 트럭 운전석에는 유일한 생존자가, 조금 떨어진 그늘엔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이 있다. 생존자 대신 돈 가방을 챙긴 모스는 한밤중 현장을 다시 찾지만, 마약 딜러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러나 더 끔찍한 추격자는 따로 있으니, 마약 조직의 의뢰를 받은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다. 마침 지역 보안관 에디 톰 벨(토미 리 존스)이 쉬거의 독특한 살인 기법을 알아보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하는 모스와 유령 같은 사내 쉬거, 보안관 벨 사이의 괴이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서부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미국 작가 코맥 맥커시의 2005년 동명 소설을 코엔 형제가 직접 각색한 스릴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위대한 서스펜스를 소유한 영화다.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과 무너져가는 세계, 자기 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고요히 성찰하며 씁쓸한 어른의 시선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시퀀스에 냉정한 유머와 조여드는 서스펜스, 소름 끼치는 추격전을 뒤섞는 노련함은 코엔의 영화 중 최고다.

1980년대 황폐한 서부 텍사스 국경 지역의 풍광을 훑는 오프닝부터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를 비집는 카메라와 이미지는 <분노의 저격자>(1984)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다(*원제는 <블러드 심플>. 코엔 형제의 데뷔작이자 내가 제일 처음 본 그들의 영화). 하지만 긴장의 밀도는 훨씬 높다. 손에 땀을 쥐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얼얼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쉬거가 산소탱크에 연결된 호스로 단숨에 사람을 죽여버릴 때부터 등장하는 기묘한 웃음과 살벌한 긴장은 내내 이어진다. 쉬거가 동전 하나로 식료품점 주인의 목숨을 농락하는 순간, 모스가 마약 딜러들이 푼 맹견에게 쫓기는 순간, 코엔 형제의 괴이한 리듬감과 유머감각은 탄복스럽다. 쉬거가 돈 가방 속 추적기의 신호를 따라 모스가 묵고 있는 모텔 방문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영화 후반 살육이 벌어진 이후 방 안에 숨은 쉬거와 문 밖에 선 보안관 벨의 모습이 뚫린 자물쇠 구멍 사이로 비치는 순간 등등 곳곳에 심어진 ‘침묵의 서스펜스’는 전율의 체험을 안겨준다.

살인적 서스펜스의 진수는 악의 결정체 쉬거로부터 온다.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과 유령 같은 표정으로 희대의 살인마 쉬거를 소화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는 엄청난 충격으로 남는다. 늙은 보안관 벨 역의 토미 리 존스, 인간 욕망의 표상 모스 역의 조쉬 브롤린 등 주변 모두를 압도하는 귀신같은 연기력이다. 영화음악가 카터 버웰의 미니멀한 사운드와 정교한 편집, 빽빽한 침묵 속을 가르는 절묘한 산탄총 사운드 디자인, 야만적이면서도 신화적인 텍사스의 풍광 속에 절망적인 인간들의 대결을 잡아낸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까지 모든 요소들이 최상급이다. 웰메이드에도 어떤 경지가 있음을 정말 실감하게 된다.

08. 02. 18.

P.S. 영화에 대해서는 예고편(http://www.youtube.com/watch?v=YOohAwZOSGo)과 자세한 리뷰 '오, 형제여! 여기까지 왔는가'(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5081)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그의 소설들도 작년에 구입했다! 어디에 두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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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8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8 22:35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추격자>와 함께 평론가들이 요즘 열심히 강추하고 있는 영화더군요...

2008-02-18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8 23:35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 읽는 걸로 때우는 영화들이 많아져서요.--; 그래도 두 영화는 볼 계획입니다...

드팀전 2008-02-18 23:12   좋아요 0 | URL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카데미에서 조연상 받을 성 싶은데..과연 어떨지 두고 봐야지요.^^

로쟈 2008-02-18 23:34   좋아요 0 | URL
주연이 아니고 조연인가요??

twoshot 2008-02-19 01:1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다니엘 데이-루이스한테 갈거 같고 하비에르 바르뎀에겐 조연상이 가지 않나 싶네요. 그나저나 저에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소설보다 영화가 더 강했습니다.

로쟈 2008-02-19 06:58   좋아요 0 | URL
저는 당연히 주연상 후보인 줄 알았더니 조연상 후보로군요. 주연은 따로 있단 얘긴데, 의외입니다.^^;

소경 2008-02-19 20:1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구미가 땡기는 영화네요. 그냥 심상치 않다고만 생각했는데 에피소드들도 읽을거리가 많겠네요. 정말 21일이 기다려져요

로쟈 2008-02-19 20:45   좋아요 0 | URL
네, 끝나가는 방학의 아쉬움을 좀 달래줄 것 같습니다...

turk182s 2008-02-22 00:48   좋아요 0 | URL
이거 초긴장 영화 입니다.. 안볼려다가 본건데 정말 솔직히 그냥 누가보라길래봤는데 예전에 본 "파고"하고 웬지 냄새가 비슷하길래,,, 알아보았더니 역시나 코엔감독이더군요...특히나 사이코패스의 엽기적행각과 각인물들의 조용한 갈등과 개성들이 스토리를 흥미롭게합니다. 다보고 너무긴장했는지 나중에 맥이빠지더군요,정말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