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11/021162000200711290687031.html)를 옮겨놓는다.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 출간을 빌미로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 몇 자 적은 것이고 한 문단은 예전에 쓴 글에서 따왔다. '한나 아렌트'가 '해나 아렌트'로 표기된 건 한겨례의 표기원칙에 따른 것이다(나로선 동의하기 어렵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사진은 마음에 든다... 

한겨레21호(07. 11. 29) 人間을 들여다보라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라 할 만한 해나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펴냄)은 지난 1975년 세상을 떠난 그의 유고 중 하나다. 책은 국내에 먼저 소개된 <전체주의의 기원>(1951)과 <인간의 조건>(1958) 사이의 유고들을 주로 모은 것이다. 대부분이 반세기 전에 쓰인 글들인 셈이지만 여전히 정치의 의미와 정치적 사유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럼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그는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과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었는데, 거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행위인데, 이는 ‘정치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을 때, 그가 말한 ‘준 폴리티콘’(zoon politikon)은 실상 ‘정치적 동물’로 번역되어야 하며(‘사회적 동물’로 번역한 이는 로마의 세네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혹은 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나 단수로서의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을 다룬다. 아렌트가 보기에 철학과 신학은 항상 단수의 인간과 관계하기 때문에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하지 못한다(따라서 ‘정치철학’은 모순형용이다).

정치란 인간들 ‘사이에서’, 혹은 단수의 인간 ‘외부에서’ 생겨난다(사실 한자어 ‘人間’은 이미 이러한 관념을 잘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그래서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장이 그리스의 ‘폴리스’였다. 아렌트의 지적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롭다는 것은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며, 거꾸로 폴리스에서 살기 위해 인간은 이미 자유로워야 했다. 즉, 본래적 의미에서 ‘정치적 인간’은 권모술수의 인간이 아니라 ‘자유의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자유가 정치의 의미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치란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이며 그 행사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고 흔히 오해되는 그리스어 ‘이소노미아’(isonomia)가 뜻하는 바 또한 모든 사람이 법적 활동을 동등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평등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에서는 폴리스, 곧 정치의 공간에서만 가능했다. 폴리스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남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자유의 공간으로서 ‘폴리스’가 있는가? 우리는 노예가 아닌,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정당하게 향유하고 있으며 또 적합하게 행사하고 있는가? ‘정치적 인간’ 대신에 ‘경제적 인간’이, ‘정치’ 대신에 ‘정치공학’이 득세하고, 후보들의 정책공약이 아니라 ‘BBK’ 같은 금융사기 사건이 국민적 (무)관심사가 되고 있는 즈음인지라 ‘정치의 약속’에 대한 아렌트의 사유와 ‘정치로의 초대’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적 구호들은 난무하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정치가 부족하다.

07. 11. 30.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람혼 2007-11-30 13:1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기고문들만 읽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각각 따로 챙겨서 읽지 않아도 여기 오면 거의 모두 읽을 수 있으니, 좋은 글들에 항상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형용모순으로서의 '정치철학'이라는 단어,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너무도 부족한 정치'에 대해서 숙고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숙고만으로 풀릴 일은 아니겠지만요! ^^

로쟈 2007-11-30 13:42   좋아요 0 | URL
'숨가쁠' 정도는 아닙니다.^^; 말씀대로 숙고로 풀릴 일은 아니고 '정치적 행위'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냥 찍는 행위로는 부족한...

李潤映 2007-11-30 22:09   좋아요 0 | URL
폴리스에 산다는 것과 자유를 동일 시 하는 아렌트의 생각의 관점에서 자유란 무엇인가가 궁금해지는군요. 인간자체를 본질적으로 자유로 보는 견해와는 사뭇 다르게도 느껴지는 데, 아렌트의 생각이 너무 정치일변도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인간이 무엇이냐를 생각한다면 아렌트의 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수긍이 가지 않는 면도 업지 않지만, 과연 복수로서의 인간만을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들기도 하구요. 여하튼 재미있는 글이었읍니다.

로쟈 2007-11-30 23:21   좋아요 0 | URL
제 어줍잖은 중개보다는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쉬운 입문서론 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책세상)이 있고, 이번에 두툼한 전기도 나왔기 때문에 아렌트 읽기는 매우 용이한 편입니다...

송연 2007-12-01 10:27   좋아요 0 | URL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평등한 발언의 기회, 즉 행위가 이뤄지는 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래서 행위한다는 것은 결국 자유를 경험하는 또다른 표현일수 있겠네요. 인간 자체를 본질적으로 자유로 보는 견해도 맞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자유개념과 다른 '정치적'자유를 아렌트는 의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정치적이라는 표현도 현실정치를 넘어서서, 좀 더 확장된 존재론적인 의미로서 이해하시면 좋을것 같구요. 복수로서의 인간만을 아렌트가 생각한다는 표현은 조금은 이상한것 같기도 한데요... 단수로서의 인간은 개인 각자의 '고유성', '다름'등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에 대한 비판으로 그녀가 복수성 개념을 꺼낸것이구요... 제가 대충 아는데 까지만 어설프게 답변을 드리긴 했는데 로쟈님 말씀처럼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더 정리가 잘 되실듯 하네요..;;

로쟈 2007-12-01 11:5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단수로서의 인간은 신학적 인간이고 철학적 인간인데, 그런 면에서 정치적 인간과 대조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행위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체험되고 확보될 수 있다고 보는 점이 아렌트의 의미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밀실에서의 자유' 같은 건 아렌트가 보기에 유사-자유일 따름이죠)...

swk516 2008-02-02 00: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십니까, 김선욱입니다. 오랜만에 클릭클릭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지젝을 얼굴로 쓰시는군요. 제게도반가운 얼굴입니다. 번역은 했지만 깊이 읽고 써 주시는 글을 읽으면서 많이 배웁니다. <정치와 진리>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지젝과는 대담도 하셨으니까 반가우실 만하겠습니다.^^ 저야 좋은 책을 내주시는 역자/연구자분들께 감사를 드려야죠. 아렌트에 대한 제 이해는 많은 부분 김선생님께 빚지고 있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