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스캔들로 얼룩져가는 게 요즘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다. 대선이 껴있는 연말까지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모처럼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맑지 않은 이유이다. 개인사는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 마음 또한 그러하다.
책소개 글들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기에 매주 나오는 북리뷰들을 일견해보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하긴 이건 오랜 습관이다). 가을날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 떠나는 팔자는 아닌 것이다. 이번주에는 별로 눈에 띄는/드는 책들이 없는데(내 경우엔 '의외성'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다. '뜻밖의 책'과의 만남이야말로 가슴 뛰는 일이니까), 그냥 담담하게 <중세의 사람들>(이산, 2007)이나 만나보기로 했다.
중세와 중세사에 관한 책들이 비교적 드물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밋밋한 제목의 책이 눈길을 끄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먼저, 저자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영국의 여성 사학자로서 중세관련으로는 국내에 많이 소개된 프랑스쪽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책이 먼지 흠뻑 뒤집어쓰고 있을 만한 1924년작이라는 것. 80년도 더 된 책이 여전히 출간될 만하다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을 갖고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과문하지만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이라고 한다. 출판사 소개는 이렇다.
이 책 <중세의 사람들>은 바로 그 새로운 시각으로 쓰인 사회경제사의 한 전형 같은 역사서로서, 지금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외국에서는 서양중세사의 기본텍스트로 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초판이 출판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완역되었지만, 의외로 비전문가인 학생과 일반인도 적지 않게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이 책 1장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책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쉽게 눈에 띈다.

이 책을 이미 알고 있는 "의외로 비전문가인 학생과 일반인" 축에도 못 끼는 형편이라 쑥쓰럽지만 여러 기대와는 달리 로쟈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독서가 취미는 넘어서지만 직업은 아니기에). 더구나 중세사에 관해서라면 기본서들이나 장서용으로 모아두었다가 지금은 박스에 보관중이니 전문가는커녕 '비전문가'도 못되는 것이다. 아래 리뷰를 보면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고 강추하고 있다. 나 같이 '무지한' 독자에게 딱 맞는 책이겠다.
경향신문(07. 11. 03) 중세, 민초의 삶을 더듬다
서양 중세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사 교수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쓴 ‘중세의 사람들(Medieval People)’은 평범한 6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중세 사람의 다채로운 삶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무겁고 어두운 중세의 종교적 분위기 대신 민초들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6명은 샤를 마뉴 치세 하의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 상인 겸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수녀원장 마담 에글렌타인, 파리의 중간 계급 가정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15세기 지정 거래소의 양모무역 상인인 토머스 벳슨, 헨리 7세 시대 에식스의 모직물 업자인 토머스 페이콕 등이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에는 마르코 폴로처럼 매우 유명한 사람도 있고, 마담 에글렌타인처럼 수녀원장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중세시대에 살던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중세 사회를 떠받치고 변화를 주도해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라는 말로 단순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층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만 굳이 이 책이 ‘민중사’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등장 인물들의 사회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다.
아일린 파워는 자신이 여성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주인공 6명을 남자 3명, 여자 3명으로 설정했다. 저자는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그들의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최근 역사 연구에서 여성사를 제외하면 여성을 남성과 같은 비중으로 다룬 역사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그것도 중세사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여성의 삶과 일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업으로 평가될 만하다.
‘중세의 사람들’은 여느 중세 관련 서적처럼 성직자, 영주, 기사의 신앙이나 무용담을 다루는 게 아니다. 생산과 유통을 담당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저자는 “사회사는 정치사에 비해 저명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독자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간혹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비판을 받는다”면서도 “개인 위주의 서술 방식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재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개론적 지식 이상의 것을 얻으면서 역사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원저의 초판은 1924년 나왔으나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완역됐다.(설원태 선임기자)
07. 11. 04.





P.S. 중세에 관한 너무도 많은 책들 가운데 <중세의 사람들>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건 자크 르 고프 등의 <중세에 살기>(동문선, 2000)와 노만 켄터의 <중세 이야기>(새물결, 2001)이다. 특히 '위대한 8인의 꿈'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중세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아일린 파워의 책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이다.
저자 켄터에 따르면, "이 책은 4세기에서 15세기에 살았던 여덟 명의 중세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파워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일반 독자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씌여졌으며, 중세인 여덟 명의 간략한 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파워의 고전적인 작품과 몇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파워는 사회경제사가인 반면 나는 문화사와 지성사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파워의 책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다. 특별히 중세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르 고프와 함께 중세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르주 뒤비의 <12세기의 여인들>(새물결, 2005) 등이 번역돼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