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들에 치어서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곤한 날들을 지나고 있다. 별로 내세울 만한 일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일들'은 항상 생색을 낸다. 해서 서재일은 잠시 자중하고 있는데(마구 올릴 때보다 글을 뜸하게 올릴 때 즐찾이 더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요즘 '오늘의 마이리스트'로 띄워놓은 '도리스 레싱 읽기'와 무관하지 않은 기사가 눈에 띄어, 그건 옮겨놓는다. 그녀의 책이 없었다는 '거기'는 아메리카이고, 그 동네에 사는 '예의없는 것들'은 노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아무런 감회도 동조도 없는 듯하다는 소식이다(알라딘 서재에서는 그녀의 소설이 오늘 드디어 '서재가 사랑한 책' 종합 1위에 등극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문화'가 다른 것이다. 물론 필자의 지적대로, 그보다 더 심각하고 뼈아픈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이지만 말이다(몇 년전 모스크바통신에서도 적었듯이 러시아의 대형서점에서도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한국소설은 단 한권도 없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다). 하니 없는 건 그녀의 책만이 아니다...

한겨레(07. 10. 22) 미국 서점에는 그녀의 책이 없었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나고 일주일 후에 아이오와에서 문학도서가 가장 많다는 서점에 갔다. 이맘때 한국의 경우를 떠올리며 으레 도리스 레싱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코너가 없을 뿐 아니라 그녀의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대답에 놀랐다. 서점 직원은 보유하고 있던 다섯 권 정도의 책은 이미 팔리고 새로 주문을 넣긴 했지만 책이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서점 컴퓨터를 통해서 보니 미국 전체에서 <황금 노트북>을 주문한 총 부수는 2000부 정도였다. 본격문학 시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미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적은 수요는 아니지만 해마다 노벨상 특수를 누리는 한국 출판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엔 미국이 노벨문학상 결과에 냉담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영국 문학에 대한 묘한 열등감의 표현이거나 유력 후보였던 필립 로스가 수상하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그런데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스태프나 세계 각국의 작가들도 대체로 노벨문학상에 별 관심이 없거나 비판적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아랍계 작가들은 가오싱젠, 존 쿳시, 오르한 파묵 등 기존 수상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서구 중심적인 시각을 지닌 그들보다 뛰어난 작가들이 자국에는 적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이 절대적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노벨문학상 열풍은 다소 기이하기까지 하다. 물론 노벨상을 빌미로라도 문학이 얼마간 사회적 흥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문학의 위기다 어쩌다 해도 실제로 한국만큼 국내 문학시장이 남아 있는 나라도 드물다. 소설이 아닌 시집이 소수이긴 하지만 일이만 부, 때로는 수십만 부씩 팔리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생산력, 작품의 다양성에 있어서도 정체기에 들어선 서구 작가들보다 오히려 현재적 활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부의 관심과 활력을 어떻게 국제화하느냐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는 요행을 바라기보다 한국문학을 국제화하기 위한 기반을 지금이라도 차분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선 한국문학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뛰어난 번역자를 양성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할 때에도 베스트셀러 위주의 번역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 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양방향적인 교류가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몇 명의 국제적 스타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과 독자성이 무엇인가를 국제사회에 이해시키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이 40주년을 맞는 해라서 세계문학을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다. 아프리카 문학, 아랍 문학, 중국 문학, 일본 문학, 러시아 문학 등의 섹션이 마련되었지만, 한국 문학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세계화로 나아가려는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국적이 다른 시인들이 모여 일본의 중세 시가양식인 ‘렌가’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응용해 영어로 공동창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문학에서 과연 세계와 공유할 만한 보편적인 양식이 무엇일까 반문해 보았다. 이제는 노벨문학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런 질문과 성찰을 해나가야 할 때다. 미국 서점에 노벨상 수상자의 책이 없었던 것보다 내가 이곳에 와서 더 뼈아프게 확인한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현실이었다.(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0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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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0-2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렇게라도 읽으면 좋은건가 싶다가도, 외려 사람들을 책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오르한 파묵의 책 번역된건 다 있지만, 지난번 노벨상 발표후 나온 <새로운 인생>은 근 여섯달째 읽고 있어요. 도리스 레싱은 <황금노트북>과 같은 장편은 못 읽어 보고, 단편들만 접해봤지만, 역시 녹녹하고 기분좋게 읽히는 책은 아니죠. 찬물 한바가지 뒤집어쓴 것 같은 글들이었는데, 근데, 이렇게 마구 나오는건 팔리니깐 그런거겠죠???

로쟈 2007-10-22 19:45   좋아요 0 | URL
'더 멀어지게 하는건 아닌가'란 문제는 생각해볼 만하네요.^^ 역시 '명작'이란 건 나랑 안 맞아, 이렇게 나가떨어질 독자들도 있을 법하지만, 저는 '노벨상효과'라는 게 문학의 권위(아우라)를 유지시켜주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나랑 안 맞아!'는 그래도 '이런 게 무슨 명작이야?'라는 태도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stella.K 2007-10-2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우리나라는 상에 너무 목숨거는 경향이 있어 마뜩칞아요. 이번에도 고은님 탈 줄 알고 기자들이 떼로 그의 집에 몰려갔다가 해산했다는 얘기 읽었습니다. 해프닝이라고 해야할지, 열망이라고 해야할지...>.<;;

로쟈 2007-10-23 13:17   좋아요 0 | URL
아마도 누군가 수상할 때까지 계속될 '해프닝'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