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하는 책들이 널려 있지만 머리가 무겁다는 핑계로(마음이 무거운지도 모른다) '사는 법'에 대해서나 좀더 배워보도록 한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이어 읽기이다(지난번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27022). 실상은 이 책의 헌사와 관련하여 데리다와 크리스 하니에 관한 페이퍼를 지난주에 좀 쓰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남아공의 공산당원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던 크리스 하니에게 바쳐진 책이다). 이런 페이퍼로 먹고 살지 않기에 간단히 요약해서 적는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주로 책의 내용을 풀어주는 일을 많이 하게 된다('강사lector'란 '읽는 사람'이자 '읽어주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연구자로서 쓰는 논문과 강사로서 맡게 되는 강의의 수신자(독자)는 각기 다르며 둘 사이에는 아직은 제거될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즉 '연구'와 '강의' 사이의 먼 거리가 현재 대학 교육의 현실이다). 가령 이 헌사의 첫문단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는가?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제를 위한 한 부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역사적 폭력을 하나의 환유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을, 다양한 경로에 따라(응축, 전위, 표현이나 표상) 해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분이자 원인, 결과, 증상, 사례로서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곳에서, 항상 이곳에서 -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든 - 집에서 좀더 가까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역해준다. 무한한 책임, 곧 모든 형태의 떳떳한 양심에 대해 금지된 휴식."
어려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이 문단이 뚯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수년 전 일이지만 신문의 만평을 해석해보라는 시험문제에 40%의 학생들만이 제대로 답안을 써냈다. 영상세대라고 하지만, 시사만화의 '독해'조차도 어려워하는 세대인 것이다!). 인문서의 독자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현실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내가 여전히 계몽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으로서 데리다의 독자가 300이 아닌 3000쯤 되면, 좁게 말해서 우리의 독서문화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로쟈'의 일거리가 떨어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먼저 첫문장.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체를 위한 한 부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역사적 폭력을 하나의 환유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체를 위한 한 부분'이 '환유(metonymy)'의 정의라는 걸 아는 독자라면 이 페이퍼는 더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 남아공의 가혹했던 인종격리정책인 '아프르트헤이트'가 '역사적 폭력'인 것은 그것이 이미 종식된 과거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저항과 반발을 가져온 남아공 백인정부의 이 인종차별정책은 흔히 만델라의 정치적 역정과 병치되는데,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1993년의 신헌법으로 흑인과 기타 인종집단에 참정권이 부여되고 1994년 다인종총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의장인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남아프리카에서는 최초의 흑인정권이 탄생했으며 이로써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 폭력'이다.
데리다는 이것이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곧 '다른 폭력을 지칭하기 위한 폭력', '전체를 위한 한 부분', 곧 '폭력 전체를 지칭하기 위한 한 폭력'으로, 다시 말해서 다른 폭력과 폭력 일반에 대한 환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고유명사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차별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다. 두번째 문장이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을, 다양한 경로에 따라(응축, 전위, 표현이나 표상) 해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응축으로서, 전위로서, 표현이나 표상으로서 해독될 수 있다는 것.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에서 '독특성'은 'singularity'의 번역이다. 들뢰즈 번역서들에서 '특이성'이라고 옮겨지고, 가라타니 고진은 '단독성'이라고 옮기는(애용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소수 백인과 다수 유색인종의 관계를 지배했던 남아공의 특정한 정책'을 가리키기에 독특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즉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은 딴데는 없고 남아공에만 있었다는 점에서 유일하지만 유사한 사례들을 대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차별과 폭력은 세상 어디에나).
세번째 문장 "부분이자 원인, 결과, 증상, 사례로서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곳에서, 항상 이곳에서 -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든 - 집에서 좀더 가까운 아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역해준다."는 두번째 문장을 한번 더 풀어준 것이다('번역해준다'는 '해독해준다'란 뜻으로 읽어도 된다). 요점은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곧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란 얘기다.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것(예컨대,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외모와 학력에 대한 우리 가까이의 차별들).
이러한 인식의 자연스런 귀결이 마지막 문장이다. "무한한 책임, 곧 모든 형태의 떳떳한 양심에 대해 금지된 휴식." 조금 풀어서 말하면 "우리는 무한책임의 주체이며, 떳떳한 양심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휴식은 없다."("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열심히 일하라!"인 것.)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 이 윤리적 주체는 '그까이꺼 대충'의 주체가 아니라 '불면의 주체'이다(누가 자빠져 자는가?). 잠들 수 없는 나날들...
이러한 도입부에 이어지는 건 이 헌사가 씌어지기 바로 며칠 전, 곧 1993년 4월 10일 "한 명의 폴란드 이민자와 공범들"에 의해 암살된 크리스 하니에 대한 추모이다. 데리다는 그를 '공산주의자 그 자체', '공산주의자로서의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탁월한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 중의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다(역자가 요즘 유행하는 '코뮤니스트'란 번역어로 비껴가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단지 '한 남자'의 죽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상징도 아니다. 그의 삶도 마찬가지며, 그것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언제나 명명하는 바"의 어떤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명령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투쟁의 대중적인 영웅이었던 이 사람은, 모순에 빠져 있던(*내분에 빠진) 소수파 공산당에 다시 한번 헌신하기로 결정한 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고위직 자리를 그만두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자유롭게 된 나라에서 아마도 앞으로 그가 맡게 될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 심지어 정부 관료 역할 역시 포기한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위험스러운, 참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크리스 하니를 추모하고 이 강연을 그에게 바칠 수 있게 허락해 주기 바란다."
역시나 '사는 법'을 배울 시간은 부족하다(어서 다른 일들을 해야 한다). 한 문단만 인용하겠다: "산다는 것은, 말뜻만으로 볼 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아니며,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삶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타자로부터 삶의 가장자리에서, 내적인 가장자리 또는 외적인 가장자리에서,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의한 교육인 것이다."(10쪽) 데리다가 크리스 하니에게서 배우고 우리가 데리다에게서 배우는...
07. 10. 15.